전쟁은 무슨 짓을 저지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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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그 해 여름 ㅣ 사계절 아동문고 56
김정희 지음, 강전희 그림 / 사계절 / 2005년 9월
평점 :
어린이들에게 이런 작품을 읽히기엔 참혹하지만, 그래도 감춰지고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알아야 하기에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은 1950년 7월, 충북 영동의 작은 마을 노근리에서 벌어졌던 미군의 양민 학살에 대한 진실을 얘기한다. 열두 살 은실이가 겪은 그 참담한 사건을 담담하게 풀어내지만, 너무나 참혹하고 끔찍해서 책을 덮어버리고 싶었다.
임계리에 사는 초등 5학년 은실이는 이웃집 현수 오빠를 좋아하는 평범하고 순진한 여자아이다. 전쟁이 났어도 산골마을이라 피난가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는데, 어느날 미군들이 도와준다며 무조건 피난가라고 몰아부쳤다. 임계리와 주곡리 주민들은 미군들의 총부리가 무서워 어쩔 수없이 피난길에 나섰고, 그들이 마을을 나서자 곧 집들이 불태워졌다. 다들 공포에 떨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피난 행렬에 폭격이 쏟아지고, 놀란 사람들은 철길에서 도랑으로 숨어들고 산으로 도망쳤다. 살아난 사람들은 노근리 쌍굴 다리에 이르렀고, 미군이 시키는대로 쌍굴다리 속으로 들어갔다. 굴 양쪽에서 총을 들고 지키는 미군이 무서워 꾸역꾸역 굴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을 때, 미군들은 굴속으로 총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상관들이 명령한 대로 행동할 뿐, 사람들이 읍내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라는 명령에 따라 흰 옷 입을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으면 무조건 사격한 것이다. 가만히 집에 있는 사람들을 총부리 들이대고 억지로 끌고 와서 죽인 미군, 대체 그런 명령을 내린 자는 누구인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25일 쯤, 노근리 쌍굴다리에 갇힌 사람들은 죽은 시체를 입구에 쌓아 올렸지만, 미군의 총질에 속수무책 죽어나갔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몰래 산속으로 도망쳤고, 죽은 시체더미에서 언뜻 인국이를 본 은실은 입을 다문다. 언니 금실이와 막내 홍이는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고, 은실이를 몸으로 감싼 엄마는 등판에 수없이 총을 맞고 죽었다. 그 나흘간 굴 속에 박힌 채 피비린내 나는 핏물을 마시고, 죽은 시체에 득시글거리는 구더기 속에서 그들은 죽은 듯 살아 있었다.
그 참혹한 광경을 은실이가 보고 겪은 그대로 풀어낼 뿐이다. 어린 소녀가 견디기에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다. 미군이 쫒겨가고 인민군이 들어오자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죽은 이들을 버려둔채 산자들만 돌아가 죽은 듯이 사는 건, 정말 살아 있다고 할 수도 없다. 다시 국군이 들어오자 인민군에 부역한 사람들은 또 다시 죽어나가고... 은실이 아버지도 끌려서 전쟁터로 간다. 할머니는 다른 식구는 안중에도 없고 은실이 아빠만 걱정하는 게 어린 은실의 눈에는 야속하고 섭섭하다.
나중에 집을 찾아온 언니 금실은 정신을 놓고, 늘 업어주던 막둥이 홍이를 잃고 베개를 아기 삼아 업고 자장가를 불러준다. 은실이도 감당하기 어려운 참혹함을 겪은 충격으로 말문이 닫혀버린다. 그렇게 고통을 견디는 사람들에게 미군이 마을에 들어와서 한 일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는 함구령이 떨어졌다.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보고 겪은 일을 말하지 못하는 그 억울함,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을 어찌할 것인가? 어린 은실이의 가슴은 무겁기만 하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할머니는 아버지의 재혼을 서두른다. 은실이는 엄마와 죽은 가족을 배신하는 것 같아 새엄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새엄마가 아들을 낳고, 새엄마가 데려 온 단비가 동생에게 뺏겨버린 엄마의 사랑을 질투하자 은실이는 단비를 보듬어 준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서로 보듬으며 살아가지만, 은실이는 노근리를 잊지 않는다.
너하고 난 전쟁터에서 용케도 살아남았어. 죽은 것도 슬프지만 살아남은 건 더 슬픈 일이지.
왜?
죽은 사람들을 늘 기억해야 하니까. 난 노근리 굴을 잊어버릴 수 없어.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겠어.
작품은 이렇게 끝이 나지만, 그 참혹한 일을 겪은 아이들이 자라서 노근리 사건의 진실을 밝혀냈다. 정부와 미국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끝까지 거짓말을 하고 발뺌을 했지만, 그 사건을 겪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노근리 쌍굴에서 식구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마음과 뜻을 합쳐 세상에 알리게 된 것이다. 공식발표는 사망자 177명, 부상당한 사람이 51명, 행방불명 된 사람이 20여명이지만, 일가족이 모두 죽거나 다른 지방에서 피난 온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라니, 사상자가 공식발표보다 많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지금 서해에서 침몰한 천안함을 둘러싸고 무언가 은폐하려는 자들은 노근리 사건의 교훈을 새겨야 할 것이다. 80년 5월의 광주처럼 아무리 감추고 덮으려 해도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역사의 교훈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