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즐거움이 많은 달이지만, 내겐 5월이 아픈 달이다. 산자의 죄의식을 갖게 하는 5.18이 그렇고, 4년 전 5월 18일에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삶이 또 아프다. 102살까지 사신 시할머니를 모시느라, 당신은 어른이 되어보지 못한-시어머니로서의 권리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가신 삶이 짠하다. 막 결혼해서 여자의 일생을 생각하니, 이런 시어머니의 삶이 어쨰 그리 짠하던지... 내 딴엔 마음을 담아 편지도 보내며 좋은 며느리가 되고 싶었다. 그럼에도 살다보면 또 마음처럼 잘 하고 살지 못하는게 인생이더라.ㅠㅠ
말씀이 많지 않으셨던 시어머님은, 열여섯까지 일본에서 자라고 해방이 되어 우리땅에 돌아와 부모님이 정해준 배필 만나 혼인하고 자식 낳아 키우며 살아오신 전형적인 우리 어머니들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공무원이셨던 아버님의 박봉(예전의 공무원은 정말 박봉이었다)을 쪼개어 6남매를 키우고 가르치느라, 여늬 부모들처럼 자신을 위해선 철저하게 절제하며 살아오신 세월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지난 일요일은 시어머니의 제사였다. 돌아가시기 2년 전, 대장암 진단으로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았으나 전이된 암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수술하고 그 힘들다는 항암주사를 맞으면서도 시할머니를 1년 더 모셨으니, 우리 자식들은 너무 오래 사는 시할머니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할머니를 땅으로 보내드리며, 당신이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마음 섭하게 했던 일들을 다 용서하고 편히 가시라던 시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면, 언제나 내 가슴이 아프고 눈시울이 젖는다. 모시고 살면서 항상 잘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고 며느리 마음임을 나도 알만큼은 알 세월이 지났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의 임종을 혼자 지킨 나는, 처음엔 내 도리를 했다고 혼자 뿌듯했었다. 마지막 생신도 우리집에서 내가 차려드렸고, 목욕시켜 드리고 난 이틀 후 혼수상태가 되어 딱 이주만에 눈을 감으셨는데 그 임종까지 지켰으니 내 할 도리 다했다고 생각했다. 기차를 타고 가서 뵌 어머님은 차마 숨을 거두지 못하고 힘겹게 호흡하고 계셨다. 혼자 병상을 지키며 독서회 토론도서였던 '오월의 미소'를 읽고 있다가, 힘겨운 호흡을 유지하는 어머님이 안쓰러워 "혼자 남을 아버님이 걱정돼 못 가시나요? 아버님 잘 모시겠으니 걱정 말고 편히 가셔요!" 속삭였더니 정말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숨을 거둬가셨다.
시어머님을 보내고 치열했던 우리의 삶이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큰딸 세살때 이혼하겠다고 했던 내가, 곱지 않은 며느리였음에도 어머님은 찾아와 내 손을 잡으며 "네가 더 잘났으면 잘난 사람 만났겠지, 내 아들을 만났겠냐~ 그저 이게 네 복이다 생각하고 살아라!" 하시던 말씀에 난 더 할말이 없었다. 나도 내 자식을 키워보니, 자기 자식을 부족하다고 말하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겠더라. 부모에겐 다 금쪽같은 자식이고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자식인데, 그 자식을 낮춰 말하며 나를 다독였던 게 그분의 인격이고 사랑이었단 걸 절절히 깨달은 건 한참 후였다.
시어머님의 그런 다독임이 있었기에 내 자리 지키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시어머니 눈에 내가 곱기야 했겠냐만 어머니의 포용은 이렇게 우리 가정을 지켜낸 힘이었단걸 믿는다. 엊그제 제사에 동서들과 시누이가 모여 음식을 만들며 어머니 이야기로 그분을 추억했다. 2004년 5월 18일에 가신 시어머니를 추억하는 내게 5월은 아프다.
돌아가신 날을 음력으로 하니 5월 4일 일요일이었다. 성주,민경이랑 무궁화 기차를 타고 목포로 ~
한시간 후~ 목포역에 도착~ 마중 나온 큰시숙님과 큰동서, 둘째 시누이랑 같이 큰댁으로 가는 길에, 간만에 고향에 온 시누이를 위해 목포 앞바다도 보여줄 겸 빙~ 드라이브 ! 클리오님은 잘 아시겠지만(^^) 신안비치 옆에 있던 커피숍 '헤밍웨이'도 사라지고... 이번주 '한국사전- 이순신 3부'에 나올 '고하도'가 오른쪽으로 보이는데 사진은 못 찍었다. 차 세우기가 곤란해서.....ㅠㅠ
유달산의 '노적봉'은 차를 세우고 찍었다. 주변에 가려지는 것들이 많아서 형체가 보일려나~~
이사람 저사람 사들고 온 과일이 넘쳐 국산 수입산 가리지 않고 다 상에 올렸다. 카톨릭에선 고인의 사진을 놓고 제사지낸다. 이번 제사는 연휴라서 식구들이 많이 모여 사진에 다 담을 수 없었다. 우리 어머님 모처럼 흐뭇하게 지켜보셨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