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충청도 시골에 살면서 책에 굶주렸던 나, 원 없이 책을 사려고 빨리 돈벌고 싶었다. 고등학교 입학원서 쓸 당시 1년 선배부터 실업계 선지원 불합격되면 인문계 후 배정을 받았다. 그때 인천에서 어깨에 힘깨나 주던 학교를 지원했기에 떨어지면 당연히 인문계에 가는데도 기어이 2차 지원을 안했다. 깝깝한 담임선생님,

"임마, 고등학교도 안 나와서 뭐할래?"
"그냥 공장가서 돈 벌래요."
"니가 공장가서 얼마나 벌 거 같으냐?'
"제가 보고 싶은 책 살 만큼만 벌면 돼요."

"너, 고집이 그렇게 쎄서 뭐에 써 먹을래?"
"제 인생 제가 책임질 테니 걱정 마세요!"

그때도 순 오기로 살았던 나, 솔직히 경제사정이 최악이던 상황이라 절반은 사춘기의 반항으로 절반은 미래에 대한 체념으로 선택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5321이란 수험번호 덕분인지 합격되었고, 공부는 싫어하면서도 3년이란 시간이 흘러 졸업 전 취업이란 형태로 79년 졸업했다. 학생 신분을 벗고 사회에 동댕이쳐진 내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아주 슬프고 우울한, 미래가 불투명한 일상에 허우적거릴 즈음, 내 친구들은 명문대에 진학해 아름다운 청춘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 내가 꿈꾸던 미래는 이게 아니었는데, 이것이 내 인생인가?'

79년 여름, 인천 자유공원은 내 청춘의 아픔을 수장시킨 곳이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청춘의 아픔과 치열하게 싸웠던 곳. 몇 해 전, 25년도 훌쩍 지나 찾았던 자유공원의 그 길을 걸으며, 난 울컥~~ 뜨거웠다. 자존심을 따를 것인가, 자긍심으로 견딜 것인가 처절했던 몸부림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구나! 혼자 감회에 젖어 다독였다.

어우~ 이런 얘기를 쓰려던 게 아니었는데, 마치 수기를 쓰는 기분이다. 엄마가 뭐 쓰나 다가와 들여다 본 우리 막내,
"헐~~ 엄마가 저런 말을 했단 말이야?"
"왜, 엄마가 범생일 줄 알았어?"
"글쎄~~ 엄마는 뭔가 고상한 직업으로 돈 번다고 할 줄 알았지?"
"후후~ 엄만, 자유인이야~~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신적인 자유인!"

각설하고, 공부를 하자니 돈이 없었고, 직장을 다니자니 시간이 부족했다. 시간을 많이 낼 수 있는 직장을 택하니 월급이 적어, 원 없이 사려던 책도 딸랑 한 두 권으로 족해야 했다. 책을 사기 위해선 어떤 것도 충동 구매할 수 없어 내 청춘을 담보 잡혔다. ‘이 돈이면 책이 몇 권인데...... ’ 이런 계산이 항상 지출을 막아 많은 부분에서 빛났을 청춘이 희생돼야 했다. 어려서나 젊어서나 충족될 수 없었던 책에 대한 갈증이, 아니 그보다 더한 한을 풀기 위해, 지금은 망설이지 않고 책을 지른다. 쓸데없이 모여 밥 한 끼 먹는 것은 아깝지만, 오직 돈쓰는 것이 아깝지 않은 지출, 내 인생의 유일한 충동구매는 오직 너, 책뿐이다!

우리 애들 친구 집에 가보기 전엔 다들 우리처럼 책이 많은 줄 알았단다. 학원비는 아까워서 못 보내도 책사는 것은 아깝지 않은 엄마의 특별한 계산법 때문에 원 없이 사들인다.

 

미래의 내 모습, ‘도서관’의 엘리자베스 브라운을 꿈꾸는 순오기. 지금은 이웃들의 작은도서관으로 자족하지만, 10년쯤 후에는 앞집까지 튼 제대로 된 마을도서관을 꿈꾸며 오늘도 내 인생의 유일한 충동구매 지름신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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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12-12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을 하면 다시 또 올라가나 봐요?
제가 글 올리고 항상 수정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래서 오늘의 태그 관련 글에 두번 세번 올라가는 거 아닌가 싶어서......ㅠㅠ

가시장미 2007-12-12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전 태그를 안 써서 잘 모르는데.. 그런가요? ^-^;;
아.. 책만 충동구매 하신다니.. 부러워요.
저는 충동구매한 옷들이 옷장에 쌓여있고, 신발들이 신발장에 쌓여있고...
책은 별로 안 사는 것 같네요 ㅋㅋ

그나저나 도서관이라는 책.. 몇 학년이 보기에 적당할까요?
저도 과외를 해서 4-5학년용 도서는 꾸준히 보고 있거든요.
좋은 책 있으면 추천좀 부탁드릴께요. :)

순오기 2007-12-12 08:59   좋아요 0 | URL
가시장미님, 도서관은 그림책인데 유치원기나 초등저학년도 좋고요, 제대로 그 의미를 알고 새기자면 고학년도 제격이죠. 항상 글이 적은 그림책은 꼬맹이들 것으로 인식하는 것에 대해, 전 반대하고 싶거든요.^^
4~5학년용 도서요~~ 우선은 교과서에 수록작은 필수고...
음, 나중에 제가 읽은 것을 중심으로 리스트로 올려 볼게요.

비로그인 2007-12-12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입니다.
지금은 저도 '충동구매' 대상은 책뿐이거든요.^^
그러나 정말 멋지겠는데요. '마을도서관'이라니.

순오기 2007-12-12 09:00   좋아요 0 | URL
ㅎㅎ~~ 알라디더 중에 책의 충동구매로부터 자유로울 사람 별로 없지 싶어요! ^^ '마을도서관'은 우리 삼남매의 기념관과 연계한 프로젝트랍니다!!
아직도 꿈꾸는 아줌마... 그래서 행복하다지요 ^^

bookJourney 2007-12-12 0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 200%입니다.
엊그제도 후배한테 '책 지름신'이 내렸다고 구박을 받았거든요. ^^;

순오기 2007-12-12 09:01   좋아요 0 | URL
200% 공감이요~ㅎㅎㅎ '책 지름신' 장난 아니죠?
하지만, 책값은 누가 읽든 그 값을 꼭 합니다! 절대 그냥 썩는게 아닙니다~~~ 팍팍!!

엔리꼬 2007-12-12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첨 댓글 쓰는 서림이라고 합니다. 인사드립니다. 꾸벅
글이 너무 맛깔스럽고, 한 문장 한 문장이 주옥같습니다. 재미도 있고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알라딘이라... 저의 미래 꿈이랍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 부탁합니다...꾸벅

순오기 2007-12-12 10:03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서림님.
제 문장이 주옥같을 건 없고요, 제 삶의 얘기들이라 그냥 공감되겠죠 ^^
우리 애들이나 남편, 내 형제들이 읽어봐도 미화되었거나 우리 얘기와 다르다고 느끼지 않는 진솔한 삶을 끄적거리는 거예요.
처음 쓰는 댓글, 저도 몇 달 전 얘기네요. 그런데, 요것도 중독돼요~~~~ㅎㅎㅎ

라로 2007-12-12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책뿐 아니에요~.
제 흉이 날까봐 일부러 충동구매에 대한 글을 안썼드래지요~.^^;;;;

순오기 2007-12-12 18:50   좋아요 0 | URL
다들 충동구매 경험이 왜 없겠어요~~ㅠㅠ
누구나 그런 흉 다 있으니 나비님만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 듯해요^^

비로그인 2007-12-12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인 수기(?)를 읽으며 가슴이 찡해지는 순간,
님께서 알아서 제동을 거셨군요.
저도 유일한 사치가 책사는것이에요.
알라딘에서 말고는 선물도 책은 잘 안하던걸요.

순오기 2007-12-12 18:51   좋아요 0 | URL
승연님, 감동적인 수기(?)였나요? ㅎㅎ
저도 대부분 선물은 책으로 하지요. 알라딘에서... ^^

coolpotato 2007-12-12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올려도 돼요.
답글 쓰려고 방문했더니 윗글이 저를 반기네요.
인생을 고민하고 책임질줄아는 학창시절을 보내셨군요.
도종환님의 시가 확 떠오르네요.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역사는 그냥 이뤄지진 않는것 같아요.
고통과 번민과 괴로움과 인내가 수반하지요.
지금의 순오기님을 만든 청춘이 부럽습니다.

아아, 그리고 저의 형편없는 블로그에 글을 남기시다니 깜짝 놀라웠고 고맙습니다.

순오기 2007-12-13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흔들리며 피는 꽃... 감동입니다! 감사^^
올해가 가기전에 '시낭송회'를 해야는데, 요걸로 해 볼까? 싶네요.
사진 올려도 된다니 수일내로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