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세크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인경 옮김 / 꿈꾼문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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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하고 생기없는 얼굴에, ‘모형 인간(p.17)같은, 또는 ‘어음 인간‘인 76세의 <장에스테르 반 곱세크>는 고리대금업자이다. 열 살 때부터 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온갖 사건들과 시련을 겪었지만, 그것을 견디고 부를 쌓은 사람이다.

곱세크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유일한 것은 돈(금)이라고 여긴다. 신처럼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파리 사람들을 조롱한다. 그들의 허영과 거드름에 냉소를 보낸다. 피곤한 삶의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돈이 필요한 허영심 많은 인간들의 마지막에 늘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파리의 고리대금업자들은 주중의 정해진 날에 모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서로 공유한다. 그들은 이름 있는 가문들의 금융 비밀이 들어있는 ‘검은 장부(p.47)‘를 가지고 있다.


그 어떤 발자크의 소설을 읽어도 신기할 정도로 똑같이 느낄 수 있는 것은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인간 행태가 지금 우리의 삶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미지가 주는 허상만을 좇는 현대인의 삶. 그것을 이용하고 조종해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축적하며 무자비하게 세계를 난도질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발자크가 그려내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법은 모든 것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 권력은 돈을, 돈은 권력이 필요한 절대적 상황에서 그 둘은 법을 등에 업어야만 동시에 비상할 수 있다.

이웃으로 만난 곱세크와 소송 대리인 데르빌은 우정을 나누며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나눈다. 데르빌은 발자크 인간극의 ‘인물재등장‘ 기법으로 열네 편의 소설에 등장한다. 데르빌은 다른 소송대리인과는 달리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기에 곱세크가 ‘드 레스토‘ 집안에 가한 인정사정없는 재산 몰수로 인해 그들은 결별하게 된다.

《고리오 영감》의 등골을 빼먹고, 결국 그를 빈털털이로 죽게 한 고리오 영감의 큰 딸인 ‘아나스타지 드 레스토‘ 백작 부인도 곱세크의 주요 고객이다. 그녀는 자신의 정부인 잘 생긴 놈팽이인 막심 드 트라유 백작때문에 곱세크에게 빚독촉을 받는다.

루이 15세 집권 때의 장 라스 지폐 시스템의 붕괴, 혁명정부가 발행한 아시냐 화폐의 가치 폭락으로 프랑스인들은 지폐를 불신했다. 그런 이유로 발자크 시대는 거의 어음과 채권이 유통되었고 사람들은 연금에 목숨을 걸었다. 수없이 할인되어 돌고 도는 어음은 정작 돈이 필요한 사람들의 발목을 잡았고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파산하기 일쑤였다.

셰익스피어의 샤일록과 달리 발자크의 곱세크는 나름의 철학과 신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이 나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허상에 집착해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더 나쁘다고 한다. 그는 단지 그런 사람들의 욕망에 의해 존재할 뿐이라고 한다. 마치 <오셀로>에서 이아고의 말에 잠시 혼이 뺏겨 그의 말을 인정하게 되는 것처럼 곱세크의 말에 넘어간다.

물론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기 직전의 곱세크와 그가 사는 집의 꼬락서니를 보면 결국 곱세크의 생각과 말이 틀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돈을 지배한다는 오만에 사로잡힌 곱세크는 그때부터 돈에 예속되어 지옥의 삶을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발자크 소설 읽기의 좋은 점은 작가가 치밀하게 설계하고, 계산한 서사와 문장들로 독자가 편하다는 사실이다. 독자는 그저 그의 글들을 읽고 묵묵히 생각만 하면 된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지,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매번 상상한다.
혹시 로또 당첨으로 나에게 돈이 많이 생긴다면
그 돈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어쩌면 난 그 돈의 노예가 되어 돈만을 좇는 전형적인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신이시여!
저에게 돈을 내려 주시어 저를 시험해보지 않으시렵니까?

[풍속에 대해서 말한다면 인간은 아무 데서나 마찬가지라네. 어디서나 가난한 자와 부자의 싸움이 있지. 어디서나 그것은 불가피하다네. 그렇다고 하면 남들에게 착취당하는 자가 되는 것보다는 자신이 착취자가 되는 편이 더 나은 게지.

-p.29


거기에서 보았던 것은 탐욕의 마지막 단계로, 시골의 수전노에게서 곧잘 그 예를 볼 수 있는 이 탐욕에는 비논리적인 본능밖에 남아 있지 않지요. 곱세크가 숨을 거둔 방의 바로 옆방에는 썩은 파이와 온갖 종류의 식료품, 심지어 뽀얗게 곰팡이가 덮인 어패류와 생선까지 있어서, 그 잡다한 악취 때문에 나는 하마터면 질식할 뻔했습니다. 사방에 구더기와 벌레들이 우글우글했지요.
_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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