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형편없는 인간을 판단할 때조차 나는 언제나 할머니의 입장에서 생각했는데, 이런 할머니가 지금 내게 닫힌 채로 외부 세계의 일부가 되었고, 그리하여 나는 할머니의 
상태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보다도 
할머니에게 말해 줄 수 없었으며, 내 불안한 마음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에게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이 낯선여인에게 하는 것보다 더 자신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늘 할머니에게 털어놓았던 생각이나 슬픔을 이제 막 할머니가 다시 내게로 돌려주신 것이었다. - P9

우리는 흔히 죽음의 시간이 불확실하다고 말하지만, 이런말을 할 때면 그 시간이 뭔가 막연하고도 먼 공간에 위치한 것처럼 상상하는 탓에, 그 시간이 이미 시작된 날과 관계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또 죽음이ㅡ 혹은 우릴 먼저 부분적으로 차지하고 나서 그 후엔 결코 손에서 놓아주지 않는- 이렇게 확실한 오후, 모든 시간표가 미리 정해진 오후에 일어날수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 P11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머리칼에만 유일하게 늙음의 관이 씌워졌을 뿐,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의 고통으로 새겨진 주름살이나, 오그라들고 부풀어오른 살, 팽팽하거나 늘어진 살로
부터 해방된 얼굴은 이제 다시 젊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주 오래전 할머니의 부모님이 남편을 골라 주던 날처럼 
할머니의 이목구비는 순수함과 순종으로 섬세하게 새겨져, 
뺨에는 세월이 점차 파괴해 버린 순결한 희망과 행복에의 꿈, 결백한 즐거움마저 빛나고 있었다. 할머니로부터 조금씩 물러가던 삶은, 삶에 대한 환멸마저 앗아 가 버렸다. 
할머니 입술에 미소가 떠오르는 듯했다. 장례 침상에서 죽음은 중세의 조각가처럼 할머니를 한 소녀의 모습으로 눕히고 있었다. - P60

우리가 사는 동안 사물이나 존재가 관통하는 동심원은 그리 많지 않으며, 내가 다른 모든 이들 중에서 택한 이 꽃핀 
얼굴을 멀리 있는 틀로부터 나오게 하여 새로운 도면에 놓고 마침내 입술을 통해 얼굴의 인식에 도달한다면, 내삶은 그것만으로도 어느정도 충족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P91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거의 모든 집에 불행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집에는 배신한 남편 때문에 우는 아내가 있고, 저 집에는 반대로 아내 때문에 우는 남편이 있었다. 다른 집에는 부지런한 어머니가 술주정뱅이 아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면서도 그 고통을 이웃들 눈에 감추려고 
애쓰고 있었다. 거의 인류의 절반이 눈물을 흘렸다. 
내가 알게 되었을때, 그들의 상태는 얼마나 끔찍했던지, 간통한 남편이나 아내가 다른 이들에게는 그토록 매력적이고 충실한 것으로 보아. 나는 그들이 받아 마땅한 행복을 
거부당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그들이 옳은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 P104

부인은 그렇게도 우아하고 자연스럽고 다정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그녀는 과거의 일을 완곡 어법이나 모호한 미소와 암시적인 말로 애써 설명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상냥한 태도에서도 뒤로 돌아가거나 고의로 말을 하지 않거나 하는 일 없이 자신의 위엄 있는 큰 키만큼이나 뭔가 거만한 꼿꼿함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 누군가에 대해 느꼈을지도 모르는 원한 따위는 완전히 재가 되었고, 이런 재 자체도 그녀의 기억이나 적어도 그녀의 태도에서 아주 멀리 내던져졌으며, 또 다른 사람이라면 불화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구실이 되었을지도 모르는일도 그녀는 지극히 감탄할 만한 단순함으로 처리했으므로,
그때마다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에서 일종의 정화 작용을 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 P119

이는 우리가 나날의 세월을 연속적인 순서대로 다시 체험하지 않고, 
어느 아침이나 어느 저녁의 상쾌함과 햇빛으로 응결된 추억 속에서, 나머지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로 여기저기 고립되고 가두어지고 움직이지 않고 멈추고 상실된 풍경의 그림자가 어려 있는 추억 속에서 살기 때문일까? 그리하여 우리 밖에서뿐아니라 우리 꿈과 성격의 발전 과정에서도, 만일 우리가 다른해에서 뽑아 올린 다른 추억을 떠올리려고 한다면, 우리도 지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한 시기에서 아주 다른 시기의 삶으로넘어가는 점진적인 변화가 삭제되어, 이 두 개의 추억 사이에 존재하는 균열과 망각의 거대한 벽 덕분에 
마치 해발이 다른심연과도 같은, 
호흡하는 대기와 주위의 빛깔마냥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두 성질의 불일치 같은 것을 발견하기 때문일까? - P145

안개는 더 이상 우리가 찾는 신기루가 아니라 맞서 싸워야하는 위험이 되었고, 그리하여 길을 찾고 안전하게 항구에 도착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려움과 불안을 거쳐 마침내는 안전의 기쁨을, 고향을 떠나 어리둥절해하며 낯설어하는 나그네에게 주어지는 안전의 기쁨을-길을 잃을 위험에 처해 보지못한 사람은 결코 느낄 수 없는ㅡ 맛보는 것을 의미했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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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7-13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장을 길게 쓰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지만, 이 문장을 읽다보면, 길게 쓰는 게 어렵긴 해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페넬로페님, 여긴 오늘 비가 많이 오고 있어요.
비 피해 없으시면 좋겠습니다.
편안한 저녁시간 되세요.^^

페넬로페 2022-07-15 00:42   좋아요 1 | URL
문장이 길어도 저 문장들이 넘 아름다워 밑줄긋기 했어요.
작가가 사물이나 인간의 행동을 깊이 보고 그것을 묘사하는 힘에 계속 읽게 되는것 같아요^^

서니데이 2022-07-14 1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래에 일어날 일들은 전혀 모르고 산다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바로 앞에 일어날 일도 하나도 알 수 없으니까요.
페넬로페님, 시원하고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페넬로페 2022-07-15 00:44   좋아요 1 | URL
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들이기에 미래는 암담하죠~~
우리의 육체에 죽음의 자리를 망각하고 살다 미래의 언젠가는 그걸 깨달을 것 같아요.
아니면 지금 깨달아야하는지도 모르지만 자꾸 망각하는 것도 같아요^^

scott 2022-07-18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는 철학자이나 심리학자 였던 것 같습니다

잃시찾 읽다보면

결국엔 우리 모두의 생의 모습을 담은

심리 철학서 ^^

페넬로페 2022-07-18 17:34   좋아요 0 | URL
scott님의 해석이 정말 탁월하고도 공감됩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했어요.
인간들의 심리를 어떻게 이리도 잘 표현했나해서 계속 감탄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