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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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없는 불행》ㅡ 페터 한트케

2019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페터 한트케!
그래서 당연히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작가의 책, ‘소망 없는 불행‘
그러나 이 작품은 자신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산문인 ‘소망 없는 불행‘ 과
딸을 혼자 키우면서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고
딸을 통해 느끼고
육아와 일의 양립의 고충을 얘기하면서
그래도 자신이 딸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듯한
산문같은 소설인 ‘아이 이야기‘ 가 들어 있다.

작가의 어머니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누군가가 자살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사람들은 잔인하지만 그 이유를 궁금해하고
그 이유가 타당한지도 생각한다.
작가의 어머니에게 삶은
잠깐 동안의 반짝임을 제외하고는
생의 전체가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시절에 누구나 겪었던 가난,
발전할 수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고정된 관념들을 가진 부모와 형제 밑에서
자라고 유부남의 아이를 낳았다.

ㅡ이런 환경에서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애당초부터 치명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미래에 대한
걱정은 안해도 좋다는 안이함을 의미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가능성이란 없었다.
사소한 불장난, 몇 번의 킬킬대는 웃음, 잠깐의 당혹감,
그리고 나서 처음 짓게 되는 낯설고 침착한 표정.
다시금 찌들린 집안 살림이 시작되고 첫아이가 태어난다,
p 17


전쟁을 경험했고 한 남자와 결혼해서
다시 불행이 시작된다.
함께 살지만 그 남자의 아이를 낳기 싫어 꼬챙이로 직접 아이를 유산시키기도 한다.
세 아이를 유산시켜도 다시 아이는 태어나고, 태어나고....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고
말년엔 힘든 병마와도 싸운다.
그랬기에 그녀의 자살을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족이라면, 그녀의 아들이라면
분명 그 의미가 다를 것이다.
글쟁이인 아들은 글로써 치유를 시작한다.
글을 쓰면서도 작가는 표현방식에 대해 고민한다,

ㅡ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라 하더라도 재구성하여
표현한다는 것은 결국 허구적인 것이 아닐까?
사건의 단순한 보고에 만족한다면 덜 허구적이겠지만,
자세히 표현하고자 하면 할수록 허구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야기 속에 허구를 많이 집어넣으면
넣을수록 다른 사람에게는 그 이야기가 더욱 흥미로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단순히 보고되는 사실보다는
허구적 서술에 보다 쉽게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p 24

ㅡ그렇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사실들을 출발점으로 삼았고, 그 다음에 그 사실들을 서술하는 형식들을 모색했다. 그런데 서술 형식들을 찾는 동안 어느 틈에
내가 사실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사실이 아니라 이미 써오던 서술 형식들,
즉 인간의 사회적 경험 속에 들어있는 언어군을
출발점으로 삼는 새로운 접근 방법을 택했다.
그러고서 나는 이 서술 형식들에 들어맞는
사건들을 나의 어머니의 삶에서 추려냈다.
p 39-40


소망이 없는 삶
그건 불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의 어머니는 생의 대부분을 그런 삶을 산 것 같다.

‘아이 이야기‘
아이를 키우는건 녹록지 않다.
그것도 혼자서 키우려면!
아이 이야기는 딸아이를 혼자 키우며 글을 써내야하는
작가의 투쟁기같다.
작가는 그래도 그 아이를 키우며 어떤 불만과 신세 한탄을
내보이기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같은 아이를
사랑하고, 커가면서 보이는 아이의 변화를 잘 묘사했다.

페터 한트케의 문장은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한 페이지를 다 읽고는 또다시 돌아가서
천천히 또박또박 읽으며
글자 하나하나를 다지듯이 읽어내고
그 의미를 찾는 일을 계속 반복했다.
배경지식의 불충분한 설명 때문이기도 하고
굉장히 객관화시킨 어머니와 아이의 얘기라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어머니와 아이의 얘기인지라
읽는 내내 공감했고 같은 느낌을 공유했다.

내게 존재를 준 엄마,
내가 존재를 준 아이!
단기기억을 자꾸만 잃으시는 치매를 앓고 계신 엄마,
이제 스무살이 되어 한발한발 독자적인 삶을 살아나가는
아이를 이 글을 읽으며 무수히 생각했고
특히 내가 19년동안 키운 아이의 변화와
아이를 키우면서의 보람과 공허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읽는 나를 자신의 글 속에만
묶어 둔것이 아니라 나를 있게하고, 내가 만들어 낸 존재들을 계속 생각하게 하고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페터 한트케는 자신이 속한 독일 민족이 저지른
엄청난 일에 대해 계속 경악했고 심지어 이 민족을
싫어하기까지 한다.
어쩌면 이러한 반성적인 글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또 하나의 이유일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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