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테 콜비츠의 생애
1867년 7월 8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 남. 아버지 칼 슈미트는 본래 법관이었지만 진보적인 생각을 지키기 위해 법관을 그만 두고 건축 기술자가 되었다. 직접 나무 토막들을 잘라 블록 놀이 장난감을 만들어 주기도 했던 칼은 건축 도면 위에 그림을 그리는 케테의 재능을 알아 보았고, 뮌헨 예술 학교에 보냈으며, 열여섯살만 넘으면 딸을 결혼시키던 시대에 딸이 결혼하지 않고 예술적 성취를 이루기를 누구보다 염원했던 사람이었다. 어머니 카타리나 슈미트는 자유 신앙 운동을 했던 케테의 외할아버지 율리우스 루프의 영향을 받아 온순하고 자상했지만 강인하고 진보적인 여성이었다.
1885년에 아내에게 휴식을 갖게 하고 딸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아버지의 배려로 (베를린 인접) 엥가딘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 곳에서 22살의 젊은 예술가 리하르트 하우프트만을 만났다. 리하르트 하우프트만은 훗날 독일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가 되어 191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케테는 하우프트만 클럽에 초대되어 당대의 과학자, 철학자,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베를린과 뭔헨을 오가며 미술관과 박물관을 둘러보며 견문을 쌓았다. 베를린 여자 미술 학교에서 칼 슈타우프 베른의 지도로 미술을 공부했다. 이 무렵 평생의 반려가 된 칼 콜비츠를 만났다.
1888년 뭔헨 예술학교 입학.
1891년 결혼.
1892년 첫째 한스 출생
1896년 둘째 페터 출생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자식들, 충실한 반려, 그리고 나의 일이다˝
하우프트만의 연극 《직조공》을 보고 판화로 제작하기를 열망함. 1893년부터 1897년까지 <직조공 봉기> 연작. 1903년부터 1908년까지 <농민전쟁>연작.
1914년 10월 제1차 대전에 참전한 아들 페터 전사 통보. 제 2차 대전에서는 손자 페터가 전사. 두번의 대전을 거치면서 케테는 반전 메시지를 담은 판화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2년까지 7편으로 된 <전쟁>연작을 만들었고 이후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비참한 전후 독일의 아이들의 모습과 어머니들을 담았다.
1945년 4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가 사라지는 모습도 독일이 다시 분단되는 모습도 보지 못 했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동프로이센은 폴란드와 소련에 양분되어 점령되었고 쾨니히스베르크는 소련령의 칼리닌그라드가 되었다.
📚당시 판화는 낮은 수준의 예술 작품으로 취급받았다. 케테 역시 그런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가장 적합한 수단으로 판화를 선택했다. 케테는 시민계급을 넘어 노동계급을 포함하여 보다 광범위한 대중에게 호소하고자 했다.
˝내 예술이 목적을 가졌다는 데 동의한다. 나는 인간이 이토록 어쩔 줄 모르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시대에 영향력을 미치고 싶다.˝
📚무엇보다 칼이 의료 활동을 하는 현장을 함께 경험하며 케테는 쾨니히스버르크에서 피상적으로만 접했던 노동자의 삶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바라 볼 수 있었다. 이들과 직접 대면하고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면서 케테는 이전까지 품었던 노동자 계급에 대한 낭만적인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특히, 노동자 계급 여성들이 처해있는 현실에 같은 여성으로서 분개했다. 노동자 계급의 아내는 몸이 아파 일 할 수 없게 되면 가족 모두에게 짐짝처럼 취급받았다.
˝노동자들의 결혼 생활은 남편과 아내가 모두 건강 할 때 유지될 수 있다. 종종 노동자의 아내는 ‘그녀가 일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척도로 판단되었다. 노동자들의 세계는 부르주아와는 완전히 별개의 세계이다. 그곳은 전혀 다른 가치 척도가 지배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무렵 독일의 여성들은 남편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운명이 크게 좌우되었다. ... ... (남편의)사회적 지위가 낮을수록 여성의 위치도 불안정했다. 노동자 계급의 여성들은 노동자이자 아내이며 어머니였지만 언제나 한 사람의 남성 노동자보다 훨씬 더 적은 임금을 받았다. 그나마도 건강하거나 임신하지 않았을 때만 일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당시 독일에서는 갓 태어난 아이를 살해하거나, 원치 않는 임신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법으로 임신중절수술을 받다가 건강을 해치는 여성들이 많았다.
📚세상은 다시 전쟁의 불구덩이에 빠져들고 있었다. 1939년 9월, 독일은 폴란드를 전격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전쟁이 일어난 이듬해 남편 칼 콜비츠가 죽었고, 1492년 9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아들의 이름을 이어받은 손자 페터가 동부 전선에서 전사했다. 오랫동안 죽음을 친숙한 친구처럼 여겨왔던 케테 콜비츠는 마지막 힘을 기울여 마치 유언과 같은 작품을 남겼다.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이제 이것은 나의 유산이다. 요즈음은 무척 우울하다. 나는 다시 한 번 똑같은 것을 파고 있다. 망아지처럼 바깥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베를린의 소년들을 한 여인이 저지한다. 이 늙은 여인은 자신의 외투 속에 소년들을 숨기고서 그 위로 팔을 힘 있게 뻗치고 있다.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이 요구는 <전쟁은 이제 그만!>에서처럼 막연한 소원이 아니라 명령이다. 요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