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 정색하고 살아 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만우절은 아니었다. 만우절이라 한들 그런 장난이나 유머가 오가는 집안이 아니었다. 유머라니. 우리 집안에서 유머는 금기였다. 그렇다고 유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가 봐도 유머일 수 밖에 없고 유머여야 하는 순간에도 내 부모는 혁명을 목전에 둔 혁명가처럼 진지했고, 그게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ㅡ7쪽˝

˝넘의 딸이 담배 피우먼 못된 년이고, 내 딸이 담배 피우면 호기심이여? 그거이 바로 소시민성의 본질이네! 소시민성 한나 극복 못헌 사램이 헥명을 하겄다는 것이여!˝
그때 어머니 나이 환갑을 넘었다. 환갑 넘은 빨갱이들이 자본주의 남한에서 무슨 혁명을 하겠다고 극복 운운하는 것인지, 이거야말로 블랙 코미디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자리를 떴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오직 담배를 태우기 위해 나는 동네 사람들이 절대 다니지 않을 산중턱까지 올랐다. 담배 세대를 다 태우는 동안 바라본 우리집은 성냥갑 같았다. ㅡ243˝

소설을 읽으면서 밤을 새워본게 얼마만인가 모르겠다. 밤 늦게 퇴근해서 한숨 돌리고 집은 책을 날이 밝도록 읽었다. 새벽녁에 앉은 채로 살짝 졸았으니 꼭 밤을 새웠다고 하긴 좀 민망하네^^;;

정지아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었다. 정지아 작가는 실제로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인 <빨치산의 딸>을 쓰면서 작가가 되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의 급한 죽음 뒤에 고향 구례에서 사흘간 장례를 치르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다. 딸이 기억하는 아버지 고상욱씨는 여순 사건 후에 입산하였다가 산을 내려 와 자수하고 전향도 했지만 평생을 유물론자이자 혁명가로 산 사람이다. 농민이지만 농사에는 소질이 없어 평생 가난을 면치 못 하고 아내를 고생시키면서도 동네 머슴이 되어 남의 집안일에는 물불 안가리고 나서는 한심한 위인이다. 아버지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고 해서 일가 친척의 원수가 되어 막내 동생에게 평생 원망을 듣는다. 아버지의 출신이 문제가 되어 결혼도 깨졌다. 딸의 혼사길을 막고 장조카의 출세길을 막고.

그런 아버지였는데 막상 조문을 받으면서 딸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아버지와 함께 싸웠다는 동지들 뿐이 아니라 평생을 우익으로 살았으나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박한우 선생, 딸보다 더 자주 더 가까이에서 부모를 돌봐 준 박동식과 학수. 그리고 가까이서 멀리서 아버지와 이런저런 인연을 쌓았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아버지는 일제 말기 배급을 못 탄 일본인 교장에게 쌀을 적선하기도 했고 평생 따라 다녔던 형사들과는 술친구로 지냈다. 본래 어려운 사람들을 지나치지 못 하고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동네 머슴으로 사는 것이 한심하다 여겼으나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었다며 조문을 오는 아버지가 사랑한 민중들. 어머니의 나라를 자랑스러워하라고 말해줬다며 찾아 온 아버지의 담배 친구라고 말하는 결혼 이주민의 딸인 노랑머리 소녀. 그렇게 얽히고 섥힌 인연들이 한꺼번에 모인 장례식장 풍경을 보며 딸은 현대사의 축소판같다고 느낀다.

마지막까지 진정한 사회주의자요 혁명가이며 유물론자였던 아버지는 자신이 묻힐 묏자리 하나 마련해두지 않았다. 죽으면 그뿐이니 제사도 필요없고 무덤도 필요없다.죽으면 화장하여 아무데나 뿌려버려라. 아버지를 똑 닮은 딸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화장하여 아버지의 평생의 고향 구례 이곳저곳에 뿌린다. 위장 자수든 뭐든 아버지는 산을 내려 올 때 사람 속에 살고 그 곳에서 진짜 혁명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딸은 비로소 아버지를 미워한 게 아니라 그리워했던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읽는 동안 웃다가 울었다. 울다가 웃었다. 막내 삼촌의 사연에 울다가 늙은 혁명가 부부의 어이없음에 웃다가. 아버지가 타고 있는 진지한 때에 엄마가 귓속말로 딸에게 털어놓는 부부간의 내밀한 얘기에 웃었다.

부모는 선택 할 수 없다. 읽으면서 내 부모를 생각하고 내 부모의 부모를 생각하고 그 분들이 살았던 기막힌 세월을 상상해 봤다. 누구라도 공감하며 읽을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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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10-23 23: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밤을 새게 만드는 책인가요?
오호~기대가 되는 책이네요!!^^

호우 2022-10-24 14:01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이야기의 힘이라 할지. 그런 걸 느꼈네요. 🙂

얄라알라 2022-10-24 0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오해할 뻔 했어요.
우선 ˝일지˝라는 단어 때문에 조금 가벼운 톤으로 상상한 점. 그런데 정지아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었네요?
그리고 지금 제가 읽고 있는 [가족을 구성할 권리]와 표지 느낌이 많이 비슷해서 얇은 소설책일거라 상상했는데 270쪽 쯤 되나봅니다.

중요한 건, 호우님 잠을 미루시게 할만큼 감동적이고 몰입력 최고라는 점!
추천 감사드립니다

호우 2022-10-24 14:06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약간 꽁트같은 느낌. 가볍게 술술 읽히긴 해요.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얘기하는 느낌. 그런 게 작가의 필력인 거 같아요.

서니데이 2022-10-24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출생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부모도, 시대도, 국가도, 그외의 많은 것들이 그렇겠지요.
요즘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있어서 지나가면서 본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호우님, 따뜻한 오후 보내세요.^^

호우 2022-10-24 21:07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해요. 편안한 밤 되세요

바람돌이 2022-10-24 1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진짜 재밌을 거 같아서 저도 사두었는데 빨리 읽어야겠어요. ^^

호우 2022-10-24 21:09   좋아요 1 | URL
아~~ 정말 재밌습니다. 바람돌이님, 편안한 밤 되세요^^

서니데이 2022-10-28 16: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우님, 편안한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이번주도 시간이 금방 지나서 금요일입니다.
많이 춥지 않아서 좋은데, 미세먼지가 조금 많아졌어요.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금요일 되세요.^^

호우 2022-10-28 16:39   좋아요 1 | URL
일주일이 금방이죠?^^ 다음 주면 달이 바뀌네요. 서니데이님도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2-10-28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핫한 책이로군요.

저희 독서모임에서도 이달에
읽고 만날 책이었는데,
두목님께서 코로나에 걸리시
는 바람에 연기되었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도 어렵
지 않나 싶네요.

호우 2022-10-28 17:01   좋아요 1 | URL
저도 아마 예약해서 읽은 거 같아요. 많이들 읽으시나 봐요. 독서모임하면 재미있으시겠어요. 저희 도서관에도 있는 거 같던데 모임을 낮 시간에 하더군요. 좀 아쉬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