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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틈새 ㅣ 여성 디아스포라 3부작
이금이 지음 / 사계절 / 2025년 8월
평점 :
# 단옥, 타마코, 올가를 기리며
'디아스포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국어사전에는 '흩어진 사람들'이라 정의된다. 과거에는 주로 유대인을 가리키는 한정적 용어였으나, 오늘날에는 전쟁과 난민, 이민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뜻한다.
이금이 작가의 『슬픔의 틈새』는 디아스포라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1940년대부터 해방 전후를 지나 오늘날까지의 시간을 담아낸 역사 소설이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가 중국을, 『알로하, 나의 엄마들』이 하와이로 향한 이주의 역사를 그렸다면, 이번 작품은 사할린 한인들의 삶을 조명한다.
『슬픔의 틈새』는 절망적인 시대 속에서도 치열하게 살아낸 여성들의 이야기를 중심에 둔다. 그 시대 남녀노소 모두의 삶이 기구했지만, 독자는 자연스럽게 단옥, 타마코, 올가라는 세 개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그녀의 서사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이 책은 마치 단옥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헌정사처럼 읽힌다.
이 소설이 특별히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영웅이나 역사적 위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 모두가 각자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며 저마다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치요, 유키에, 덕춘, 정만, 시갑, 진수 등은 마치 실존 인물처럼 생생하게 다가와 독자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다. 작가는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의 경계를 영리하게 넘나들며 1940년대 사할린을 완벽하게 재현해낸다. 그들은 조국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때로는 원망하며, 결국 사할린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국의 정체성을 지켜내며 단단히 뿌리를 내린다. 고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황에서도 끝내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놓지 않았던 그들의 마음을 차마 헤아릴 수 있을까. 그저 대가 없는 무한한 사랑의 무게 앞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처음 책을 펼쳤을 때는 방대한 역사적 사실이 작품의 무게를 짓누르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역사'는 배경에 머물렀고, 가장 중요하게 다가온 것은 그들이 살아낸 인생의 의미였다. 8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고스란히 투영되며, 어느새 나는 단옥이 되고, 타마코가 되고, 올가가 되어 그들과 함께 웃고 울며 긴 생애를 함께했다.
"이상하게 고생스러웠던 기억보다 치요가 꽂아놓았던 들꽃, 부엌의 지저분한 창틀을 덮었던 수놓은 작은 보, 덕춘에게 내주던 차의 향기 같은 것들이 마음에 남았다. 전부, 먹고살기 바쁜데 쓸데없는 짓 한다고 못마땅해하던 일들이었다. 덕춘은 삼베처럼 거칠고 소나무 등걸처럼 갈라진 자신의 삶을 어루만져준 건 바로 그런 것들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 구절을 읽으며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마음 깊이 다가왔다. 결국 삶이란 고통과 슬픔의 틈새에서도 스며 나오는 작은 기쁨과 위안으로 지탱되는 것이 아닐까. 생존조차 버거운 가혹한 시간, 그 시간을 버티게 해준 것은 결국 누군가의 온기와 위로였음을, 그 작은 돌봄과 연대가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음을 마음으로 배웠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사할린 동포'는 내게 죽은 단어나 다름없었다. 역사책 한 귀퉁이에 단편적으로 실린 몇 줄,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난 후 죽은 단어는 살과 뼈를 얻어 생생한 의미를 갖게 되었고,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