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가파도에 가다 - 비움과 낮춤의 지혜를 배우는 노자 철학 소설 사계절 지식소설 18
김경윤 지음 / 사계절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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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 가파도에 가다 를 읽고-

천천히 읽어야 들리는 것들

 

이 소설에는 두 명의 노자가 등장한다. 하나는 수천 년 전 도덕경을 통해 무위자연의 길을 말한 철학자 노자이고, 다른 하나는 2025년을 살아가면서 노자와 같은 이름을 지닌 도서관장 백양이다. 백양은 인공지능과 디지털 교육이 일상이 된 시대에, 종이책의 자리가 점점 사라지는 현실을 체감한다. 자신이 지켜온 세계가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 속에서 그는 은퇴를 결심하고, 구시대의 사람으로서 조용히 퇴장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 대학 동창 미경의 연락 한 통이 백양을 이 아니라 다른 삶으로 이끈다. 그 초대의 목적지는 바로 제주 남쪽 작은 섬, 가파도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평소처럼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백양이 기록하는 시간의 결, 섬이 들려주는 느린 미학이 내 안에서 제대로 살아나지 않은 느낌이었다. 마치 꼭꼭 씹지 않고 삼켜 급체한 것처럼, 문장들이 체화되지 않았다. 문득 내가 요즘 속도에 너무 매몰되어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소리 내어 읽는 것처럼 천천히, 한 장 읽고 멈추고, 여유롭게 쉬다가, 다시 조금씩 읽었다. 보통 이 정도 분량의 책이라면 한 시간 남짓이면 끝내곤 했는데, 이 책은 그렇게 읽지 않으니 어느새 네 시간이 훌쩍 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제야 비로소 백양이 가파도에서 마주하는 시간의 미학이 조금씩 내 감각으로 옮겨오는 것 같았다.

 

내가 가장 부러웠던 것은 백양의 시간이었고, 동시에 가파도의 공간이었다. 최근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언제였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일을 하다 문득 창밖을 보면 계절이 성큼 바뀌어 있고, 하루하루는 너무 쉽게 소진되며 똑같은 일상을 갉아먹는다. 그런데 가파도의 세계는 전혀 다른 호흡으로 움직인다. 백양은 그곳에서 미니멀리즘과 환경 보호를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생활의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실천하게 된다. 고양이를 돌보고, 걷고, 쓰레기를 줍고, 작은 도서관을 꾸리며 책과 동물과 자연이 공존하는 법을 배운다. 좋아하는 것들, ‘책과 사람과 풍경이 질리지 않게 곁에 있는 삶. 그 하루가 참 부러웠다. 특히 가파도의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쌓아두는 공간이 아니라 삶을 다시 정렬하는 장소처럼 보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이 노자의 문장을 본문 곳곳에 배치하며 이야기를 이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도덕경의 문장들을 곳곳에 놓아 두되, 그것을 좋은 말로만 박제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같은 익숙한 문장이 백양의 일상 장면과 맞물리며 다시 묻는다. 우리는 이미 아는 말을 실제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알고만 지나치는가. 그래서 이 책의 철학은 설명이 아니라 체험에 가깝다.

 

문체와 구성은 전반적으로 담백하고 잔잔하다. 큰 반전으로 몰아치기보다는, 산책하듯 장면이 이어지며 사유가 스민다. 그래서 빠른 전개를 기대하면 심심할 수 있지만, 반대로 마음이 소란할 때 읽으면 문장과 풍경이 숨 고르는 자리를 마련해준다. 철학 소설이 어렵게 느껴지는 독자도, “이론을 공부한다기보다 생활을 다시 정돈한다는 느낌으로 접근하면 훨씬 편하게 읽힐 것이다.

 

결국 이 책은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과 더 빨리 증명하려는 습관, 더 크게 이기려는 경쟁을 잠시 내려놓게 만든다. 그리고 작은 공동체와 자연의 리듬 속에서 삶의 기준을 다시 세우게 한다. 인공지능과 기후 위기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이 소설은 정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백양이 살아내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 조용한 실천이야말로 도덕경이 지금도 읽히는 이유를, 소설로 설득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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