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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려는 말은 ㅣ 독고독락
낸시 풀다 지음, 백초윤 그림, 정소연 옮김 / 사계절 / 2025년 9월
평점 :
정상의 잣대가 아닌, 그들의 언어와 목소리로
-『내가 하려는 말은』 읽고-
『내가 하려는 말은』에는 두 편의 단편, 「움직임」과 「다시, 기억」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자폐와 알츠하이머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장애를 흥미의 소재나, 극적 반전의 장치로 소비하지 않는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등 드라마나 스릴러가 흔히 보여 주는 '연민' 또는 ‘비범함’의 틀을 비껴 서서, 자기결정의 권리라는 현실의 문제로 서사를 단단히 붙들어 맨다.
「움직임」의 한나는 자폐 스펙트럼을 지닌 청소년이다. 한나의 세계는 대답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고, 사고의 리듬이 다르다. 부모는 '정상적인 삶'을 위한 시술을 제안하지만, 그 시술의 뒷면에는 현재 한나만의 고유성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한나는 '새 신발은 싫다'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말하지만, 부모가 집착하는 ‘정상’의 기준은 한나가 갖고 있는 고유한 리듬을 쉽게 망가트린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지만,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12쪽), “말들은 생각 사이의 허공으로 흘러 사라진다”(16쪽)는 고백은 한나가 비장애인의 세계와 이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사회가 그 시간을 내어주지 않을 때 친절이 얼마나 쉽게 폭력으로 변하는지 보여 준다. 이 작품은 한나가 정상으로 ‘고쳐지는가’를 묻지 않는다. 한나의 목소리로 그저 자신의 속도로 살아갈 방식과 과정을 담담하게 드러낼 뿐이다.
「다시, 기억」의 엘리엇은 알츠하이머로 과거의 기억이 비어 있다. 가족은 ‘예전의 엘리엇’을 되찾고 싶어 하고, 엘리엇은 공책에 메모를 빽빽이 적어 대화에 맞춰 보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 낸 허구의 ‘연속성’에 엘리엇은 점점 지쳐간다. 이 책에서 상대방이 바라보는 '과거 그대로여만 하는 그 사람'을 향한 위로와 응원은 또 다른 폭력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결국 엘리엇이 내리는 결론은 단순하다. 과거를 흉내 내는 가짜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자신으로 살아가겠다는 선택이다.
두 이야기를 엮는 주제의 축은 분명하다. ‘정상’이라는 규격으로 타인의 삶을 교정하려는 시선이다. 비장애인의 자리에서 우리는 쉽게 상대의 감정을 짐작하고, 일방적인 돌봄의 우위에 선다. 나 또한 그들의 마음을 수없이 상상해 왔지만, 이 책을 읽으며 그 친절이 때로 상대의 목소리를 덮어버린다는 사실과 마주했다. 자폐의 돌발적인 감정 표현이나 기억 상실의 혼란 뒤에는 언제나 맥락이 있다. 다만 우리가 그들의 언어와 시간을 기다리지 않을 때, 그 연약한 맥락은 너무 쉽게 소실된다. 책은 바로 그 지점을 겨냥해 묻는다. 누가 정상의 속도를 정하는가?
형식의 선택도 신선하다. 「움직임」은 1인칭 시점의 독백으로, 「다시, 기억」은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진행된다. 독자는 두 인물과 각각 다른 호흡과 간격을 유지하며, 서로 다른 감각의 불편함을 간접경험한다. 독고독락 단편 시리즈로서 읽기 분량이 매우 짧지만, 내용은 다소 불친절하며 난해하여 여러번 읽게 된다. 그러나 그 ‘불친절’이야말로 우리가 비장애인의 세계에서 익숙한 속도와 언어만을 표준으로 삼아 왔음을 깨닫게해준다.
『내가 하려는 말은』은 장애를 ‘의사소통 불능’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방식과 시간이 다를 수 있음을, 그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관계가 시작됨을 보여 준다. 감정의 분노, 불안, 공포는 누구에게나 있다. 다른 것은 그것을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방법’과 ‘속도’다. 한나와 엘리엇은 기다림을 요청하고, 지금의 자신으로 살아가겠다는 작은 선택을 한다. 변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조용하게 시작된다. 책장을 덮고 나면 '누구의 목소리로 그들의 세계를 설명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선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