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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 가게 ㅣ 마음이 자라는 나무 12
데보라 엘리스 지음, 곽영미 옮김, 김정진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말라위의 큰 도시 블랜타이어에 사는 열세 살 빈티는 자신이 특별하다는 느낌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존심 강한 소녀다. 언니인 주니와 성 베드로 여학교라고 하는 수업료가 비싼 학교를 다니며 거기에서도 반장을 맡아 하고, 라디오 방송국의 드라마에서 성우로 활약하며, 신문에서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올 정도로 꽤 유명하다.
꼬마 손님의 애완동물을 위해 공짜로 관을 만들어주는 마음 좋은 아버지는 관 가게(이 가게의 이름이 책 제목인 ‘하늘나라 가게’이다.)를 하고, 오빠인 크와시는 영혼이 천국으로 더 빨리 날아올라갈 수 있게 관에 작은 새를 그려 넣어 주는 다감한 성품의 화가 지망생이다. 부러울 것 없는 이 가족에게 조그만 아픔이라면 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신 것. 그리고 아버지가 자꾸만 말라가는 것이다. 결국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마저 ‘마름병’으로 밝혀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립병원의 마룻바닥에서 생을 마감하고, 세 남매의 운명은 급물살을 탄다.
마름병이란 다름 아닌 에이즈다. 마침 요사이 TV 드라마에서도 다루고 있어 조금은 더 관심이 모아지는 때에 이 책이 나왔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여러 모로 시의적절하다 싶었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독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에이즈는 무엇 때문에 걸리는 병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극히 적고, 혹시 내게도 에이즈에 걸릴 확률이 존재하는 건가 등등 이 병에 대한 편견이 극심하므로.
아직도 우리 뇌리에는 잘못 된 생활을 하는 극소수에게 걸리는 천형과도 같은 병. 그 사람과 가까이 있기만 해도 잘못도 없는 내게 천형이 옮아올 수 있다고 믿어 꺼리는 병. 그것이 에이즈다. 그러나 운동가이기도 한 작가가 서문에서, 책 말미의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이 책은 그런 편견에 맞서고 있다. 그럴 것이,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지금까지 천삼백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것이 어떻게 잘못 된 삶의 결과일 수 있겠는가. 먹고살 방도가 없어 거리로 나가 매춘을 할 수밖에 없는 어린 엄마들, 콘돔을 사용하지 않아야 조금이라도 돈을 더 주기 때문에 뻔한 죽음의 길로 내몰리는 그들을 누가 욕할 수 있겠는가.
책을 읽으며 가슴 아프고, 아름다워서 두어 차례 울었다. 많은 자식을 두었고, 그 중 많은 이들이 에이즈로 목숨을 잃은 빈티의 할머니. 할머니는 아픈 아이들을 거두어 생활을 함께 하는 진정한 나눔의 실천자로 나온다. 그녀가 빈티 아버지의 장례식에 와서 한 말은 이렇다.
“사람들은 에이즈가 무엇인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에이즈가 가 버릴 거라 생각하지만, 천만에요. 에이즈는 가지 않습니다. 사자가 마을로 내려오던 시절이 있었죠. 그때 사자가 마을로 내려와 우리 아이들을 데려가면 우리는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침묵하면 사자가 우리 아이들을 계속 잡아먹을 테니까요..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내 아들이 에이즈로 죽었다고, 난 정말 아들을 사랑했노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할머니의 말은 결국 삼촌들의 집으로 가게 된 빈티 남매의 삶을 더 힘들게 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지만, 그 의미야말로 자못 깊다. 에이즈는 아픈 사람들의 힘만으로 이 세상에서 퇴치되지 않으며, 우리 모두가 눈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할 인류 공동의 적이다. 에이즈를 피해 다른 곳으로 달아나겠다는 안이한 생각은 핵폭탄을 피해 숨겠다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다. 다른 소수자들처럼 에이즈환자들도 우리와 이웃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동반자인 것이다. 다만 좀 더 아플 뿐, 좀 더 배려가 필요할 뿐. 실제로 에이즈환자인 부모에게서 에이즈를 물려받은 아이들의 많은 수가 부모의 죽음 이후 뒤를 따른다고 한다.
다시 할머니의 말. “아이들도 어른들처럼 마음이 아파서 죽을 수 있단다.” 에이즈로 숨진 많은 어린 생명 중 마음이 아파서 죽은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다. 어느 정도 알고 있듯이 에이즈 환자와 성관계를 맺거나 피를 교환하는 일만 하지 않으면 위험하지 않다. 그들과 함께 책을 보거나 한 자리에서 점심을 먹고, 함께 달리기를 하는 일은 위험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어쩔 수 없이 에이즈를 숨기고 살아가야 하는 환자들의 슬픔은 곧 에이즈의 무서움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운동이란 과격함을 동반해야 한다는 생각을 깨주는 부드러운 언어의 책. 많은 부분이 호수처럼 맑게 다가오며, 가난하지만 나누며 사는 사람들에 대해 가까움이 느껴지는 책. 눈물 속에서 스스로에게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책이다. 그 누구보다 내 자신에게 들려주는 양심의 소리 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