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꽃 당신 - 도종환 시인님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을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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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5-14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애님, 이 시를 읽는데 왜 눈물이 나죠? 너무 좋으네요....정말.

후애(厚愛) 2010-05-15 05:28   좋아요 0 | URL
전에 이 시를 읽고 많이 울었습니다.
접시꽃을 올리면서 이 시가 떠올랐어요.
그래서 한번 올려봤습니다.^^

마녀고양이 2010-05-14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종환 시인께는 묘한 편견이 먼저 들어서.. ㅠㅠ.. 떨치지를 못 하네요.
너무 아름다운 아내에게 바치는 시로 처음 접해서 그런지
그런 그분이 다른 분을 만났다는 얘기를 들을 때 뭔가 환상이 깨진 느낌을.
그러면 안 되는데도,,, 떨치지를 못 해요. 제 속이 너무 좁아요. ㅠ

후애(厚愛) 2010-05-15 05:35   좋아요 0 | URL
아 몰랐어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꿈꾸는섬 2010-05-16 23:20   좋아요 0 | URL
아이들때문에 재혼하신거 아니었나요?
그저 그럴 수 있단 생각도 들더라구요.^^

카스피 2010-05-14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척분이 오래전에 접시꽃 당신이란 영화의 시나리오로 백상 예술대상을 타셨어요.으쓱 으쓱

후애(厚愛) 2010-05-15 05:36   좋아요 0 | URL
좋으시겠어요. 자랑하실 만 한데요.^^

같은하늘 2010-05-15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에 사진보고 <접시꽃 당신>이 생각났는데 이렇게 올려 주시니 좋네요. ㅜㅜ

후애(厚愛) 2010-05-16 04:11   좋아요 0 | URL
접시꽃을 올리면서 저도 생각이 나서 올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