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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혼자 아파하지 마세요 - 국내 최초 단원고 스쿨 닥터 김은지 원장의 마음 토닥토닥
김은지 지음 / 마음의숲 / 2020년 12월
평점 :
함께여서 위로가 되는 이야기!
단원고 스쿨 닥터 김은지 원장이 세상에 전하는 연대의 가치와 힘!
2주 전,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의 알림장을 읽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적이 있다. 한 원생의 아버지가 다니는 운동 동호회 모임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결과는 다행히 음성으로 나왔지만 이제껏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이 이토록 가깝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혹시나 양성으로 판정되면 당장 어린이집 운영이 중단되는 건 아닌지, 남편의 일에도 지장을 주는 건 아닌지,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은 또 어찌해야 하는지. 그 순간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드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원생의 가족들 역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원망 섞인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나의 부주의로 인해 양성 판정을 받게 된다면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끼칠 피해와 미안함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평소 그런 생각을 곧잘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면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에도 이 같은 국가적 재난은 종종 있어 왔다. 대구 지하철, 세월호, 포항 지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평범한 일상에 위협을 느꼈으며, 더 이상 나를 둘러싼 세상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재난이 우리를 망가뜨릴 수 없음을 증명하는 따뜻한 연대의 힘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주변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그들을 잠시나마 원망하기도 했던 마음 때문인지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임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누군가로부터 원망을 듣고 죄책감을 느껴야 했을지도 모를 그날, 그 고통 속에 있었던 사람들은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지금은 모두 그 날의 상처를 극복했을까.
이런 이유로 국내 최초 단원고 스쿨 닥터이자 마음 건강 센터의 센터장인 김은지 원장의 책에 마음이 이끌린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 역시 단원고 스쿨 닥터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난 뒤에 많은 이들로부터 이와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세월호 생존자 학생들은 이제 회복되었나요? 아니면 아직도 힘든가요?” 그녀는 말한다. 재난 피해자들이 회복된다는 것은 증상이 모두 없어지는 상태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고. 어떤 사건이 트라우마로 남는 이상, 0으로 영원히 없어지는 게 아니라 다만 증상을 견디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말이다. 피해자라는 낙인,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받아야 할 원망과 그로 인한 자책… 또 다시 맞은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국가적 재난 앞에서 확진자를 비난하고, 특정 집단이나 지역에 대한 비난과 편 가르기로 우리는 지금 그들에게 더 큰 트라우마를 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문제다.
연대라는 놀라운 힘에 대하여
『이제 혼자 아파하지 마세요』는 소아 청소년 정신과 전문의인 김은지 원장이 단원고 스쿨 닥터로 재직하면서 아이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마음 건강을 돌보는 데 애써왔던 지난 과정과, 청소년을 비롯해 지금도 어딘가에서 저마다의 상처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이들을 위로하고 응원하고자 쓰인 책이다. 책에는 처참하고 잔인한 재난의 경험 속에서 만났던 보석 같은 순간과 연대라는 기적 같은 희망, 서로를 보듬으며 치유하고 성장하는 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서로 부여잡고 울면서 힘을 북돋던 날들, 세월호 참사 이후 새롭게 단원고의 문을 열기 위해 모았던 마음들, 운동장 가득 빛나던 촛불들. 단원고 사람들과 사회 전체가 연대를 통해 서로를 얼마나 지지하고 함께했는지를 기억한다.
가끔 저는 제가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 생각하곤 합니다. 사실 단원고에서 의사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구성원들의 정신 건강을 살피는 일을 했지만, 학교란 늘 교육이 최우선인 곳이니까요. 저는 단지 마음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제공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굉장히 수동적이고 한가로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지요. 의사는 항상 판단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의 도움만 주며 지켜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맡은 ‘스쿨 닥터’ 역할의 가장 큰 비중은 기다림에 있었습니다. 늘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어요. / 31p
재난 피해자들의 회복은 사회의 분열, 재난 피해자들을 향한 부정적인 인식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때문에 사회적 지지를 통해 그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이해와 존중을 받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일은 환멸기에서 회복기로 넘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회와 세상에 대한 신뢰는 재난을 겪은 사람들이 환멸기를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니까요. / 127p
스톡데일 패러독스라는 말이 있다. 현실을 냉철하게 받아들이되 포기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승리하고 말 것이라는 신념의 합리적 낙관주의 이론이다. 여기서 스톡데일은 베트남 전쟁 당시 포로로 갇혀 있다가 살아남은 미군 장교의 이름이다. 당시 스톡데일은 갇혀 있는 포로들끼리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탭 코드’라는 것을 만들었다고 한다. 베트남 군인들 모르게 포로들만 알고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신호를 만들어 낸 것이다. 수용소의 포로들은 모두 독방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서로 직접적인 소통을 할 수 없었는데, 스톡데일이 탭 코드를 만든 후에는 옆 사람에게 자신의 상태와 어려움을 표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불안감을 덜어내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들은 함께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하는 메시지도 끊임없이 보냈다. “The man next door(옆에 있는 사람 덕분이었습니다).” 훗날 수용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스톡데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서로가 함께하고 있다는 믿음, 격려와 소통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의 몇 년을 견딜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김은지 원장은 이 이야기를 통해 ‘함께하는 힘’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동시대에 어려움을 함께 겪고 살아내는 이웃들이 곁에 있다는 것, 그것이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탭 코드는 아닐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bless you”라는 따뜻한 말을 유산처럼 남겼습니다. 공포와 고통으로 온 사회가 마비된 순간에도 서로의 안녕과 평화를 빌어주는 말을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말이 아직도 우리 곁에 문화로 남아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있습니다. 단순한 재채기임에도 불구하고 신의 축복까지 빌어주면서 말이지요. 고난을 함께 겪고 이겨낸 온 ‘인류 동지’로서 할 수 있는 최선 아닐까요? / 63p
때로는 어려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방향성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포기하지 않고 관심을 가진 채 목표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빛이 날 때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우리가 우리 사회의 아픈 부분을 외면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 73p
책에서는 연대를 비롯해 트라우마로부터 자기를 지켜내고 이겨낼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소개한다. 그 중에서도 ‘돌봄’을 통한 치료 극복은 매우 특별한 방법인 듯하다. 실제 단원고에서는 ‘단이’ ‘원이’라 이름을 지은 두 마리의 골든 리트리버를 1년 동안 길렀는데, 이는 동물들을 돌보는 행위를 통해 심리 치유를 시도한 한 방법이라고 한다. 김은지 원장은 동물을 기름으로써 책임을 분담하고 함께 견디는 시간을 통해 돌봄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면, 스스로가 어떤 생명을 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이 생긴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어떤 존재를 돌보기 위해서 스스로의 감정과 욕구를 조절하고 인내하며 난관을 헤쳐 나갈 때 우리 역시 성장한다는 것이다. 혼자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누군가를 돌보게 되면 흔쾌히 하게 되기 때문이다.
김은지 원장은 과거의 어딘가에 계속 머무른 채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이들에게 현재를 자각하는 방법을 소개하기도 한다. 이는 오감에 신경을 집중하는 방법으로, 음식을 먹을 때는 그 맛과 색깔, 냄새를 더 잘 느껴보려고 하고 가방을 들 때면 뻗는 팔이 늘어나는 감각, 가방을 손에 쥐었을 때의 느낌, 가방의 무게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샤워를 할 때는 어제의 일, 오늘 할 일 등을 생각하기보다 물의 따스함, 물이 닿는 피부의 느낌, 샴푸 향기 등에 집중하려고 노력해보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때는 그 사람이 곁에 다가올 때 느껴지는 감정, 행복, 눈빛에 집중해보라고 말이다. 그렇게 현재를 살아가는 감각, 지금 이 순간을 선명하게 느끼는 연습을 하다보면 힘든 트라우마의 시간 속이 아니라 현실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곳곳에 숨어 있던 지금의 행복에 보다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부모가 아이의 심리적인 충격을 잘 해결하지 못한 채 무엇이든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거나, 지나치게 감시하고 제한하는 일들이 종종 벌어집니다. 어른들이 자신의 감정(트라우마에 대한 분노, 어른으로서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아이에 대한 연민 등)에 몰두해 아이들의 발달 과정에 대한 고려 없이 물질적, 감정적 공세를 펼칠 때 아이들은 오히려 퇴행하게 됩니다. 지나친 걱정과 감시가 끝내 아이를 망치는 결과를 불러오는 것이지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공감과 끊임없는 지지, 그러면서도 한결같은 훈육입니다. 물질적 공세, 무조건적 허용이나 감시가 아닙니다. 트라우마로 요동치는 아이에게 끊임없는지지, 공감, 일관된 훈육을 제공하려면 부모가 안정되고 건강해야 합니다. / 99p
가끔씩 튀어나오는 자신의 당황스러운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그 모습을 ‘잘 살려고 애쓰는 모습’이라 여기고 너그러이 봐주세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과 자책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수용과 이해입니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잘 지내온 당신에게 말해주세요. 잘 견뎌주어서 고마웠다고. 지금도 이렇게 노력해줘서 고맙다고요. / 153p
흥미롭게도 트라우마로부터 성장한 아이들은 믿을 수 없고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스스로 안전기지 역할을 하려 했다고 한다. 세월호 생존 학생들은 트라우마를 겪은 후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도움을 받는 것이 이렇게 좋고, 또 중요하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사회복지학과, 간호학과, 물리치료학과 등 누군가를 돕는 일을 배우는 학과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불안정한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방식으로 세상의 안정성을 회복하고, 세상을 바꿔나가는 모습으로 성장해나가려고 했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 있어 코로나라는 재난도 더 나은 나,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계기가 되어주지 않을까. 감염병 재난이 만들어 낸 지치고 힘든 순간에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자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지는 않을까. 김은지 원장은 아침마다 코로나 확진자의 숫자를 들여다보며 불안해하기보다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플레이리스트를 확인하고, 엉망이 된 여행 계획에 분노하기보다 남은 여유와 자유로움에 관심을 둬보는 것은 어떨까하고 제안한다. 이렇게 작은 자원들에게로 극이동하면서 우리의 삶을 채워나가다 보면,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채워진 지난 시간들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무엇보다 표지의 그림처럼 내 곁에는 당신이 있고 당신 곁에는 내가 있다는 믿음으로 서로 포옹하면서 연대하는 사회, 이것이야말로 코로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아닐까.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