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나로 살 뿐 1 - 원제 스님의 정면승부 세계 일주 다만 나로 살 뿐 1
원제 지음 / 수오서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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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얻은 깨달음과 삶의 의미들,

그렇게 여행은 나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시간이 된다!

 

 

 

   카투사 출신에 게임을 좋아하는 스님이라니. ‘카투사’와 ‘게임’ 중에 그 어느 쪽도 평소 생각해왔던 ‘스님’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것 하나 없어 보이지만 그래서 뭔가 남다르다는 건 확실하다.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살자, 최선을 다하지 말자, 적당히 건강하고 적당히 행복하자는 삶의 신조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두루마기에 삿갓을 쓰고 세계 일주를 다니는 모습 역시 예사롭지 않다. 바로 『다만 나로 살 뿐』의 저자, 원제 스님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묵은 경전 글귀가 아닌, 고요한 선원 좌복 위에서만이 아닌, 삶이라는 생생한 터전에서 자신을 내던져 보는 것. 그리하여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해보는 것. 절 밖에서, 기왕이면 세계라는 큰 무대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해봄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또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해나가는지 스스로를 시험해보고자 한 결심도 보통의 것은 아니었을 테다. 때문에 『다만 나로 살 뿐』은 스님이 쓴 여행기 혹은 수행기라 했을 때 떠올릴 만한 느낌과는 사뭇 다른 데가 있다. 격을 낮추되 가볍지 않고, 거리낌이 없으나 흐트러지지 않는 스님의 모습과 꼭 닮아서 픽, 하고 웃음이 나다가도 어느 새 마음을 탁 치고 올라오는 깨달음이 그곳에 있다.

 

 

 

앎보다 삶이 훨씬 중요하고, 배움보다 익힘이 더 값지다는 깨달음

 

 

 

   스님에게 있어서 불교란 모든 만남과 소통의 시작이며 중심이다. 불교 신자나 불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생각하는 불교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어떤 자연 풍광이나 체험보다 사람과의 교류 속에서 얻은 깨달음을 기록한 글들이 유독 마음을 끈다. 특히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시도한 카우치서핑을 통해 만난 사람들, 우연히 여행지에서 대화를 나누다 닿은 인연들과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그중에서도 미국에서 검안사로 일하다 은퇴한 뒤 세계 일주 중인 피에르와의 만남이 인상 깊다. 미국인이지만 불교인이고 나름의 방식대로 선 수행을 하고 있었으며, 카우치서핑 멤버로 커피를 무척 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보다 나이, 국적, 살아온 과정, 하는 일 모두 떠나 마음으로 가깝게 느끼고 각별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훗날 위암 선고를 받았노라 자신의 근황을 전하는 피에르에게 애써 담담히 소중한 친구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대목을 읽다보니, 삶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명제 앞에서 때로는 단순해질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스스로 돌이켜보는 하나의 수행으로 받아들이겠다는 피에르와 몸뚱어리는 비록 죽음으로 인해 단절되었을지언정 끝없는 흐름으로 살아갈 우리에게 죽음은 곧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는 스님의 말씀은 죽음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지닐 것인가 대해 얼마간 생각하게 만든다.

 

 

 

“스님,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요. ‘내가 풍경 그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풍경이 되기도 한다’라는 말이요.”

문득 놀랐습니다. 속담이지만 마치 수행의 과정이나 결과를 묘사한 말처럼 들리기도 했던 탓입니다. 내가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풍경을 그리는 나 자신마저도 풍경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허공이 나를 보아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허공으로서의 안목을 얻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집착이 사라져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 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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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샹그릴라에서 만난 독일인과의 이야기는 더욱 긴 여운을 남긴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그 독일인은 사람들에게 세계 곳곳의 독일 대사관 위치를 알려주는 것을 참 좋아했는데, 애석하게도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호스텔에 머무는 사람들은 그를 기피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워하던 그는 때마침 스님이 긴 시간 동안 대화에 응해주자 무척이나 행복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스님은 그때 그의 맑아 보이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며 어떻게 사람이 저리도 맑은 빛을 내보일 수 있을까 궁금했단다.

 

 

 

   그런데 다음 날, 누군가가 그 독일인이 새벽에 돌아갔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러면서 “페이라이쓰까지 와서 메이리설산의 일출도 보지 않고 돌아간 바보”라고, 그런 바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행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이를 바라보며 스님은 일반 상식 수준에서 그 독일인은 제대로 여행을 계획할 줄도 모르고, 여행의 묘미를 즐기지도 못하는 바보로 비쳐졌을지 모르겠으나 ‘인간이 불행한 것은 정상이라고 규정하는 그런 관념과 기준이 있어서’가 아닐까 하고 넌지시 생각한다. 체면이라는 상식이 없기에, 효용이라는 분별이 없기에 설혹 메이리설산의 일출을 보지 않고 다시 고된 길을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아쉬울 게 없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어쩌면 정작 바보는 이 분별심을 그토록 소중하게 껴안고 살아가는 우리일지도 모른다고. 덕분에 나는 내가 정해놓은 관념과 기준에 따라 타인을 구분하고 성격을 지은 것은 아닌지 스님의 말씀을 통해 반성해보게 된다.

 

 

 

끓는 데 필요한 열량보다 공기 중으로 완전히 녹아들어가는 데에 더 많은 열량이 필요하듯, 새로운 앎을 얻는 것보다도 그 앎이 삶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학습, 곧 배움과 익힘입니다. 배움의 결과는 앎이지만, 익힘의 결과는 삶입니다. 그 앎이 삶으로서 온전해지기까지는 배움보다 훨씬 많은 익힘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앎보다 삶이 훨씬 중요한 것이고, 그렇기에 배움보다 익힘이 더 값지고도 긴요한 노력이라고 말입니다. / 180p

 

 

삶이 자신의 책임이듯 그 사람을 바라보는 안목도 온전히 자신의 책임입니다. 서른이란 그러한 나이입니다. 자신의 안목을 다시금 돌이켜보아야 하는 것이지, 더 이상 남 탓만을 할 수는 없는 나이입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삶과 사람을 보는 안목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만 하는 나이라는 것입니다. / 1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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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외에도 유럽 여행 중에 가방과 지갑을 도둑맞은 일화, 세계 일주 중에 찾아온 여행 매너리즘, 그라나다에서 피자 주인 가게가 내민 신문에 실린 스님의 모습(이것이 스님 플렉스) 같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도 수록되어 있다. 스님이 쓴 여행기라 하면 고루한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냐는 편견이 있을 수도 있는데, 여행에세이처럼 가볍게 접근하기에도 충분히 좋을 만한 책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여행을 가기 쉽지 않은 요즘, 나에게 있어 여행은 어떤 의미인지 이 기회에 생각해볼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다음 2권에서는 또 어떤 여행기와 깨달음이 담겨 있을까. 편안하게 따라가는 마음으로 2권으로 이어가보려 한다.

 

 

 

이 도서는 ‘수오서재’로부터 협찬을 받았으나 본인의 주관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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