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나라, 가난한 시민 - 진정한 풍요란 무엇인가
데루오카 이츠코 지음, 홍성태 옮김 / 궁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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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짧게 일본을 다녀온 적이 있다. 도쿄만 다녀왔으니 일본을 온전히 여행했다고 하기에는 부끄럽지만, 나름대로 생각하고 느낀 것은 많았다.

일단 도쿄는 화려했다. 그리고 정신이 없었다. 어디를 그렇게 바쁘게들 가시는지, 모두들 분주한 모습이었다. 물론 잠시 동안의 관찰이었기에 단정할 순 없지만, 서울과 아주 비슷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뭐 사실 서울이 도쿄를 본떠 만든 도시이긴 하지만 말이다.

일본은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이다. 물론 미국이 있지만, 경제력만 따지고 본다면 일본 역시 만만치 않다. 중국의 부상이나 러시아, 인도 등 새롭게 경제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국가들도 많지만 여전히 일본의 경제적 위상은 높다.

그런데 일본인 중에는 한국을 부러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혐한류라 해서 재일 동포를 비롯해 조선인(북한), 한국인에 대한 거부와 증오를 가지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그런 약간은 과격한 이들을 제외한다면 대체적으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단 기본적으로 그네들이 깔고 있는 ‘무시’라는 감정은 분명 존재한다.

이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바로 역동성이다.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과거 김대중 정부의 캐치프레이즈도 있었지만, 한마디로 뜨거운 가슴을 안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부럽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 스스로 우리의 역동성을 절감하며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그네들이 보기엔 그런 측면이 다분히 있다고 한다.

말이 좋아 역동성이지 부정적으로 본다면 냄비 근성, 쏠림 현상, 이성적 판단이 아닌 감정적 행동, 극단주의와도 통할 수 있다. 우리가 일본인보다 다혈질이라고 하는 데 사실 과학적인 증거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일본인들은, 그리고 일부 한국인들은 분명 한국과 일본은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일본이 섬나라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섬나라기에 온순하다? 글쎄, 우리도 사실상 반세기동안 섬나라로 살아오지 않았나? 우리는 다른 나라를 여행하면 해외여행이라 하지 않나. 땅으로는 어디든 갈 수가 없다. 섬나라 맞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일본인들은 과연 온순할까. 아니 일본인들의 심성을 온순하다고 표현해도 되는 것일까. 세계 2차 대전의 악역 중 하나로 우리를 비롯해 세계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던 가미카제의 후손들이 온순하다고?

일본 역사에 대해 해박하지 못하다. 그들의 정신세계, 가치관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한 적도 없다. 《국화와 칼》등의 몇 권의 일본 관련 책만 읽었을 뿐, 단정하기엔 지식의 폭이 너무 짧다. 하지만 《부자나라, 가난한 시민》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있었다. 그들의 온순함이란 것이 사실은 온순함이 아니라 체념이 아닐까 하는. 혹은 스스로 자신의 삶이 아무 문제없다고 세뇌시키며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일본은 그냥 딱 봐도 풍요로운 국가다. 돈이 엄청 시리 많은데다 최첨단의 유행을 선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항상 맞춰 살고 있으며, 각종 경제 지표상으로도 언제나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오죽 돈이 많으면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에 항상 경제 지원을 할 정도다. 물론 목적은 다른 데 있지만 말이다. 미국의 은근한 아프간 파병 요청에 병력을 보내자니 촛불이 다시 광화문을 덮을 것 같고, 그렇다고 돈으로 때우자니 없고, 고민에 고민을 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으로서는 하토야마 정권이 엄청 부러울 정도다.

하지만 정작 일본 국민들의 삶을 보면 이건 뭔가 아니다 싶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연립 주택에 다다미 몇 장 깔고 산다. 최소한의 주거 공간에서 머리를 짜내고 짜낸 효율적 배치 등으로 그나마 다리 뻗고 잔다. 캡슐방 등의 기상천외한 업소들이 호황일 만큼 사는 환경은 척박하다.

이걸 우리 언론이나 정부에서는 그동안 검소한 삶이라 칭송하며 우리도 과소비를 줄이고 근면하게 살아야 일본 같은 경제 대국이 될 수 있다고 외쳐왔다. 하지만 그게 과연 정확한 평가일까. 검소한 게 아니라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잘 사는 나라가 말이다.

이젠 우리가 일본보다 능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한 때 세계 과로사의 1위가 일본이었다. 자살률 역시 상위에 랭크되어 왔고, 노인 복지도 형편없었다. 물론 지금의 우리와 비교할 대상은 아니다. 우리는 노인 복지, 아니 복지라는 말을 쓸 자격도 없을 정도로 열악하니까.

암튼 일본은 국가적으로는 돈이 많은데 국민들은 정작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왔다. ‘돈 많은 가난한 나라’였다는 말씀이다. 토끼장 같은 집에서 살며, 만원전차에 장시간 시달리며 도착한 직장에서는 또 다시 야근을 밥 먹듯 하고,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쓰러져 자기 바쁜 일상. 왠지 지금의 우리 모습과 비슷한 것 같아 우울하긴 하지만 이미 일본은 20~30년 전부터 이러한 삶에 적응해 살아왔다.

책은 1989년에 출판된 것이다. 딱 20년 전이다. 저자는 말한다. “정말 풍요로운 것은 무엇인가?”“지금의 일본이 과연 풍요로운 선진국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일본의 한 잡지사가 1988년 일본의 주부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질문은 “일본 풍요의 상징은?”이었다. 주부들의 답변은 일본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길지만 잠깐 인용해 보자면.

“해외 부동산 구입” “고흐의 〈해바라기〉구입”“40그램 정도에 5만 엔도 넘는 화장크림”“커다란 쓰레기장”“아이들의 시험과 진학에 드는 부모의 열의와 돈과 시간”“부동산 광고에 억 단위의 숫자가 늘어서는 것”“차기 주력 전투기를 몇 대나 사려고 하는 것”“상품의 과잉포장”

그렇담 “일본의 가난을 상징하는 것은?”이란 질문에 주부들은 어떻게 말했을까.

“획일화되고 개성 없는 교육”“적은 국민연금”“높은 세금, 주입식 교육”“길가에서 골프 연습에 열중하는 아버지. 러시아워에 부대끼는 아버지. 단신부임하는 아버지. 가라오케에서 초라하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아버지.”“농약투성이 야채, 약투성이 고기, 가공식품”“부엌 창에서 옆집 화장실 창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집”“주택대출의 파산 급증”“사채업자의 고금리금융 광고, 간판이 크게 늘어난 것”“인구당 적은 공원면적”“병자를 밀어 넣고 밀어 넣는 노인병원”“많은 돈을 내지 않는 한 들어갈 수 없는 노인홈”“특별양호노인홈 입주희망자의 순번대기”“연수입이 8백만 엔이어도 집을 살 수 없다”

지금 우리의 모습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소름이 끼칠 정도다. 항상 우리가 일본에 10~15년 정도 뒤처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딴 것은 좀 뒤처지면 안 될까하는 생각이 든다. 나쁜 것까지 다 따라갈 필요는 없지 않나. 물론 지금까지는 온갖 나쁜 것은 제일 빨리 받아들이곤 했다. 원조교제부터 왕따까지….

저자는 진정 풍요롭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일본을 독일 등 선진국과 비교하며 차분히 말하고 있다. 돈은 넘치지만 정작 국민들은 불행한 국가. 과연 선진국이라 부를 수 있을지 자문하고 있다. 오늘의 우리 현실과 너무나 닮은 모습이기에 많은 반성과 고민을 요구하는 책이다.

이제 오랜 시간동안 썩을 대로 썩어버린 자민당이 물러가고 하토야마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지만 아직 일본은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온전히 정상적인 국가, 역사와 국민에게 부끄럽지 않은 국가로 거듭날지는 아직 미지수다.

책을 옮긴 홍성태 교수는 “개발과 투기 문제, 저열한 사회자본 문제, 위험한 연금개악 문제, 그리고 이기적이고 무능력한 노동운동 문제에 대한 데루오카 교수의 설명은 마치 한국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다. 지금 한국은 ‘돈 많은 못 사는 나라’다. 한국은 분명히 ‘기형국가’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형국가 한국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4대 악마라고 단언한다. 4대 강도 그렇고 암튼 4자가 영 재수 없긴 하다.  


홍 교수가 말하는 4대 악마는 무엇일까. 바로 “엄청난 재정을 탕진하고 국토를 파괴하는 토건국가”“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무소불위의 재벌권력”“모든 시민의 시간과 소득을 가차 없이 빼앗고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투기사회와 학벌사회”가 그것이다. 그는 복지사회의 정착을 위해서는 이러한 ‘4대 악마’와 싸워 이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당한 말씀이다.

이렇게 말하면 또 ‘노빠’라고 비아냥거릴 인간들이 있겠지만,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바로 이런 4대 악마와 싸우기 위해 나름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알만 한 사람들은 그 노력을 안다. 물론 알보다 작은 인간들은 모른다. 그 결실이 아직 확연히 드러나진 않았지만, 분명 복지 사회로 가기 위한 초석을 다지기 위해 나름 많은 노력을 했다. 겁 없이 부동산 재벌들에 맞서 부동산 개혁을 시도했고, 무리를 해서라도 서울의 과다집중 현상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모두가 보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을 전부 온전히 뒤로 되돌리고 있는 현 정권을 말이다. 전국 어디를 돌아다녀도 공사판 아닌 곳이 없다. 이미 상반기에 올 하반기에 집행할 예산을 모조리 공사판에 쏟아 부었다. 물론 일용직 건설 노동자들은 그나마 일감이 생겨 다행이지만, 그 후폭풍이 어떨지는 보수 경제학자들도 예상할 수 있을 정도다.

4대강을 시작한 지 벌써 조금 되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해버린다. 왜 그럴까. 이명박 대통령은, 그리고 한나라당은, 조중동은 토건 세력들의 지지로 인해 지금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4대 악마와의 동거를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대로 악마의 저주에 포위당한 채 살다 죽어야 할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이 빌어먹을 세상 다 없어져 버려라. 저주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억울하다. 무언가 제대로 된 세상에서 하루만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오기가 생긴다. 바보 노무현과 절름발이 김대중이 자신의 능력이 허락하는 것만큼 노력한 바로 그것이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결실로 우리 국민들, 인민들에게 다가와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엔 너무 암담하고 우울한 세상이긴 하지만, 진보 단체의 창립 행사에 보수 단체들이 난입해 깽판을 치는, 마치 해방 후 전쟁 전까지의 상황을 보는 것 같이 엿 같은 지금이지만, 미군이 우리나라를 떠날까 두려워 “We want US Army”를 외치며 여전히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미친 세상이지만….

희망을 믿고 싶다. 그리고 그 희망을 위해 조금이나마 노력하고 싶다.
그게 다다.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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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묻다 - 5人5色 한국 현대사특강 철수와영희 강연집 모음 6
서중석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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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대사는 그 굴곡 많은 과정에 대한 솔직한 기록이어야 한다. 기쁜 것은 기쁘게, 슬픈 것은 슬프게, 아픈 것은 아프게, 있는 그대로를 정직하게 기록해야 한다. 이 특강은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고 익히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보다 정직하게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살아온 경험을 전수하려는 작은 노력의 일부분이다.”

지난 2008년을 돌이켜보면 기억나는 단어들이 몇 있다. 뉴라이트, 건국절, 정통성, 국부 등이다. 책에 담긴 강연의 한 꼭지를 맡고 있는 한홍구 교수도 지적한 바와 같이 지난해는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가 하나가 되어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에 온 힘을 모은 해였다. 

근현대사 수정에 있어 주무 부서인 교육과학기술부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일단 그렇다 치더라도, 전혀 상관없는 국방부 장관이나 국토해양부 장관들도 충성 경쟁하듯 역사교과서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다 결국 국무총리가 시비를 걸더니 급기야 대통령께서 직접 특정 출판사를 협박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출판사는 정부가 두렵지 않은가!”라고. 우습다.

뿐만 아니다. 서울시교육위원회라는 곳은 이른 바 ‘좌편향’인 근현대사 교육을 바로 잡겠다며 자칭 각계 전문가 140여 명을 강사로 위촉하여 시내 각 고등학교에서 근현대사 특강을 개최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웃긴 것은 자칭 전문가라는 사람들 중에 정작 근현대사 전문가는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예비군 훈련장의 안보 강사, 안기부에서 공작 정치를 하던 퇴물, 레크리에이션 강사들을 전문가랍시고 불러들였다. 우습다. 
 

 

진중권 교수였나? 이런 작태를 “가뜩이나 입시 공부 때문에 피곤한 학생들을 억지로 모아다 헛소리를 픽픽 해대는 것도 엄연한 인권 탄압이다. 아이들을 굳이 그 장소에 가서 졸 필요는 없지 않나.”라고 비판했던 것이 기억난다. 정확한 인용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암튼 그 비슷한 표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동안 우리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나 중국의 동북공정 등 주변 국가의 역사 말살에 대해 분노해 왔다. 정당한 분노였다. 그들의 모습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이었지만 그들의 손바닥이 점점 커지는 모습이어서 불안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을 비난할 수 없게 되었다. 정부가 뉴라이트라는 전혀 새롭지 않은 오른쪽이들을 앞세워 근현대사를 왜곡하고 있는데,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독립운동의 성과를 무시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제창하고, 이승만과 박정희를 우상화하기 위해 국가의 정통성까지 말살하려는 작태를 벌이고 있는데 어떻게 일본과 중국을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미 같은 족속이 되어버린 것이다. 염치 없는 족속이.

책은 이처럼 역사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전문성이 훼손당하는 현실에서 ‘전국역사교사모임’‘한국역사연구회’‘포럼 진실과 정의’‘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가 준비한 한국 현대사 특강의 내용을 담았다. 주로 중고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지만 딱딱하고 어렵다기 보다는 옛 이야기하듯 재미있고 이해하기 쉽다.

물론 내용이 쉽다고 그 중요성이 덜하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거짓을 참이라고 우기는 사회에서는 이들의 강연은 소금과 같다. 정부가 하는 행태들이 너무나 무참하고 천박한 것이기에 강사들의 뜨거운 외침은 더욱 소중하다.

이명박 정부는 앞으로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과 관련해 이승만 정권이 친일 청산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기술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제헌헌법에 근거해 만들어진 반민특위가 어떤 과정을 통해 누구에 묵인 하에 와해되었는지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홍구 교수는 “이승만이 살아온다 해도 몹시 낯 뜨거워했을 것”이라 말한다. 그 정도다. 지금 정부와 뉴라이트라는 집단의 천박함이.

한 교수는 뉴라이트와 정부는 자기들의 편의에 따라 ‘이랬으면 좋았을 것을’하는 내용을 역사라고 가르치려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부가 자행한 근현대사 교과서 탄압은 연산군이 무오사화를 저지른 이래 최대의 사화(史禍)로 기록될 것이라고 개탄했다. 그 정도다. 이 정부의 오만함이란 것이.

해방 직후 우리는 식민지 국가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당연히 친일잔재의 청산이었다. 오히려 친일파를 청산 못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 애국 세력을 역 청산해 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처절한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친일파들의 후손이 어떻게 사는 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입이 더러워질까 두렵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짧은 시간에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성공했다는 찬사를 받는다. 스스로도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그 성공은 절반의 성공이요, 미완의 작업일 뿐이다. 우리는 정부 수립 이후 국가 권력이 친일파들에게 장악되면서 제헌헌법이 아닌 국가보안법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렇게 반세기 동안을 눈치 보며, 불안해하며, 시키면 시키는 대로 살아온 것이다.

물론 자랑스러운, 눈물겹게 고맙고 애틋한 역사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제주 4.3 항쟁, 4․19 혁명, 5.18 광주항쟁, 6월 항쟁 그리고 촛불이 있었다. 이는 우리들의 소중한 자산이자 미래를 위한 깨지지 않는 거울이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 준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우친 값진 경험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피 흘려 쟁취한 눈물겨운 꽃이었다.

책은 현재 정부와 뉴라이트가 시비를 거는, 아니 심대하게 왜곡하고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참 역사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말해주고 있다. 정부 쪽이 140여 명의 정체불명의 전문가들을 이른 바 쪽수로 밀어붙였다면, 책의 강사들은 역사학계의 원로부터 신진 학자까지 그야말로 “드림팀”이다.

개인적으로 정말 반가운 것이 강연을 하신 분 중 몇 분을 알고, 또 뵌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만열 교수님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하실 때 찾아뵙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꽝꽝 얼어버린 나에게 “몸이 완전히 얼었는데, 뜨거운 차 한 잔 마시고 천천히 하시라”했던 인자함이 기억된다. 한 눈에 봐도 “천상 학자시구나”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른 바 ‘자체 발광’이 인상적이 분이었다. 역사편찬위원회라는 직책에 정말 어울리는 분이었다.

한홍구 선생님도 인터뷰 한 적이 있다. 그때는 후배 기자가 인터뷰를 했고 나는 그냥 따라가서 책에 사인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선생은 “노무현 정부 때 그렇게 싸웠는데, 이제 생각해 보면 그 땐 차라리 행복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다. 그럴 만도 하다. 암튼 선생은 평화박물관 건립에 함께 하자는 사인을 해주셨다. 얼핏 보면 도인 분위기도 나고 또 얼핏 보면 동네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이시다.

책에서 북한의 역사를 맡았던 정영철 박사님은 현재 내가 일하고 있는 잡지사의 편집기획위원으로 계신다. 상당히 개그감각이 뛰어나신데, 주로 허무개그다. 이야기 듣고 집에 오다 웃는 적이 많다. 하지만 왠지 어수룩해 보이는 외형 속에 상당한 내공을 갖추고 계신 분이다. 나는 학자입네 하면서 거드름 피우는 족속들보다 딱 100배 멋진 분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사무실 어느 구석에서 열심히 타이핑을 하고 계신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아주 가끔이다. 대부분은 수다 떨고 계신다.

우리 역사는 자랑스러운 것도 있고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수치스러운 부분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물론 객관성을 완전히 담보할 수 있는 역사 기록은 없다. 하지만 찰나의 이익을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범죄를 저질러서는 절대로 안 된다. 부끄럽지만 기억해야 할 역사, 수치스럽지만 안고 가야 할 역사마저 엄연한 우리의 삶이었음을 부정해선 안 된다.

어제를 왜곡하면 오늘이 뒤틀리고 내일이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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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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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월든》이라는 단 한 권의 책으로 소로우는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월든》을 읽어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운 문학작품이자, 참다운 삶의 길을 제시한 《월든》은 분명 소로우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시민의 불복종》역시 소로우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책 속에는 그가 생을 마감한 지 13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펄펄 살아 숨 쉬는 보편적인 진리가 있다. “시민이 한 순간만이라도, 혹은 아주 적은 정도라도 자신의 양심을 입법자에게 맡겨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양심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그의 질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분명 유효한 물음이다. 그는 “법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 적은 없다. 오히려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매일매일 불의의 하수인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소로우는 도시의 번잡한 삶을 버리고 콩코드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자연과 함께 생활한 체험을 《월든》에 담았다. 또한 미국 정부가 흑인노예제도를 계속 용납하는 것과 영토 확장을 위해 멕시코 전쟁을 일으킨 것에 항의하기 위해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다 감옥에 수감되기도 한다. 그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시민의 불복종》이라는 작품을 세상에 내보내게 된다. 마하트마 간디가 자신의 불복종 무저항 운동을 소로우의 사상에서 빌려온 개념이라 말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소로우는 말한다.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기라. 당신의 생명으로 하여금 그 기계(정부)를 멈추는 역마찰이 되도록 하라.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극력 비난하는 해악에게 나 자신을 빌려주는 일은 어쨌든 간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담담하게 이렇게 말한다.

“사람 하나라도 부당하게 가두는 정부 밑에서 의로운 사람이 진정 있을 곳은 역시 감옥이다. 매사추세츠 주가 자기에게 동조하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두는 곳, 노예의 나라에서 자유인이 명예롭게 기거할 수 있는 유일한 집이 감옥인 것이다.”

불복종, 저항이라는 이름이 가져오는 금기의 유혹과 열정. 광복과 분단, 전쟁 이후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라는 또 다른 전쟁을 치러왔던 우리. 우리처럼 저항과 불복종이란 단어가 현실과 일체화되었던 역사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가열차게 살아왔다.
도대체 ‘근대’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타자에 의한 강제적인 근대화로 인해 우리는 무작정 달려갔고, 여기까지 왔다.

근대화와 민주화가 전혀 상반되지 않음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이 땅의 독재자들은 근대화를 위한 민주주의의 희생을 강요했고, 그로 인해 잠시 나타난 가시적 성과를 마치 근대화의 상징인양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적인 민주주의라는, 사실 신라의 화백제도를 모방한, 어처구니없는 체육관 선거를 치르면서까지 이루려 했던 근대화, 발전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원했던 문명화, 선진화는 무엇이었을까.

소로우는 단 한 명의 부당한 억압도 용납되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왜 그랬을까. 그 한 명이 곧 전체 인민들의 억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우리가 이 땅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농민의 부당한 억압에 저항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땅의 소수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힘을 보태야 하는 이유가. 비정규직의 고통을 풀기 위해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래서이다. 당장 남의 일로 보이겠지만, 세계화 시대라고 떠들어대는 지금 이 순간, 이미 남의 일은 없는 것이다.

소로우가 살던 당시의 환경파괴가 지금의 재앙에 비하면 과연 얼마나 컸을지 궁금하긴 하지만, 소로우는 자연을 파괴하는 그 어떤 시도라도 결코 진보와 발전으로 이어질 수 없다고 단언한다. 스스로 재앙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그는 보았다. 그의 생각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면 크게 틀린 것 같지 않다. 어쩌면 아주 정확히 미래를 예언한 것일 수도 있다.  


이미 전기나 그 밖의 동력을 이용하여 실용화된 자동차들이 많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기술발전이 훨씬 더 비약적으로 이뤄졌고, 당장 생산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석유 자원을 사용하지 않고도 우리는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는 시대에 진작 접어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한없이 더디게만 보인다. 왜 그럴까.

기존의 자동차 기업들과 석유 산업 관련 재벌들, 그리고 무력한 정부 때문이다. 석유를 연료로 사용하지 않는 자동차가 나오면 기존의 자동차는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또한 친환경 자동차는 지금과 같이 잔고장이 많지도 않다. 한 번 구입해 사용하면 기존의 자동차보다 유지비가 대폭 절감된다. 소비자의 입장, 환경적인 측면을 봐도 획기적인 일이다. 하지만 자본의 논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처럼 석유를 팔아야 하고, 고장인 많이 나야 되는 것이다. 친환경 자동차는 기술의 문제가 아닌 시장논리의 문제인 것이다.

이 정도로 썩어버린 세상에서 소로우가 살았다면 그는 월든 호숫가가 아닌 더 깊은 그 어디엔가 숨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돈에 미쳐 환장한 세상은 소로우에겐 지옥과 다름없을 테니 말이다. 그럼 지금 우리에겐 이 시대가 천국일까. 과연.

소로우의 철학과 사상이 아직까지는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월든》이 소개된 지도 비교적 최근이고, 이 책 역시 올해야 나올 수 있었다. 평화와 자치, 자연과 연대를 강조했던 그의 삶은 백년을 훌쩍 넘긴 지금에도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종말을 향해 거침없이, 지붕 뚫고 달려가는 우리 모습을 되돌아볼 시점이다. 이미 늦은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소로우의 말처럼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우리 마음속의 선전포고가 필요한 때다.

“불의의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

나는 조용히, 내 고유의 방식으로 정부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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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팅컬처 - 거짓과 편법을 부추기는 문화
데이비드 캘러헌 지음, 강미경 옮김 / 서돌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미드를 즐겨보는 편이다. 본방사수는 어차피 불가능하기에 가끔씩 한두 편씩, 때로는 그 이상을 한꺼번에 보곤 한다. 예전 맥가이버의 추억부터 엑스파일의 광팬이었던 전력이 있어서, 미스터리나 범죄 수사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이다. 물론 휴먼도 좋지만 왠지 미국식의 휴먼은 나에게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한다. 정서상 차이인지, 내가 감정이 메마른 것인지.

애증의 드라마가 있다. 뭐 대부분의 범죄 드라마가 그런 것 같기는 한데, CSI를 즐겨보는 편이지만 볼 때마다 짜증 혹은 분노를 느끼곤 한다. 그러면서 왜 보냐고? 그러게 말이다.  

가끔씩 드러나는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인식이 황당할 때가 있다. 쿠바나 중국, 북한을 등장시킬 때가 있는데 그때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논리가 그대로 나타난다. 뭐 어차피 미국 드라마에서 거대한 휴머니티나 국경을 초월한 인도주의, 혹은 정치적 신념을 떠난 정의 따위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끔씩 “정말 미국인 모두가 저렇게 생각할까?”하고 궁금할 때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단언하건대 미국은 싸이코 패스 집단이다.

동유럽 어느 국가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매춘에 이용되다가 정의로운 호레이쇼 반장(CSI 마이애미의 주인공)에 의해 구출된다. 좋다. 그렇다 치자. 그런데 꼭 어느 특정 국가를 지칭해야 할까? 이라크 전쟁이 한창일 때, 잘못은 이라크가 한 것! 이라고 강조하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이라크 장군의 아들이 미국에서 살인을 저질러도 국제적 관계 때문에 처벌하지 못하는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룬다. 오호라. 이라크는 악마로구나.

코리아타운을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에서는 북한의 노래가 흘러나오고(걔들에게 남과 북은 큰 차이가 없다), 한국 여성은 창녀에다가 그 아들까지 의학 실험의 대상으로 팔아넘긴다. 자신의 에이즈 감염으로 아들 역시 에이즈 환자였던 것이다. 이쯤 되면 뭐 “니들 맘대로 떠드세요”정도다. 이러면서 보는 나는 또 뭔가. 변태? 싸이코 패스? 비난하신다면 할 말 없다.  

 

 

 

말이 길었다. 책과 관련해 내가 CSI에서 짜증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용의자 혹은 범인들의 태도이다. 이건 도저히 내 정서상, 짐작컨대 대부분 아시아인들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다. 뭐냐고? 바로 양심이다. 머 최근 나영이 사건 등에서 나타나듯 그 양심이란 것이 도대체 어느 선까지 믿어야 하는지 회의가 들 때가 많지만, 아무튼 아직까지는 난 그런 게 있다고 믿고 살아왔다.

하지만 드라마에 등장하는 것들은 그야말로 양심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예를 들자. 부모를 살해했다. 혹은 아내, 남편, 자식들을 살해했다고 치자. 수사관들 앞에서 용의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혐의를 절대 부인한다.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한다. 어떻게 나를 용의자로 몰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정확히 30초 후 그렇게 부인하던 용의자는 얼굴색 하나 안변하고 말한다. “오케이, 말하겠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라고. 무슨 일이 벌어졌지? 수사관이 과학적 증거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지문이나 체액, 정액 등이다. 흔히 DNA검사를 하면 대부분 부인하지 못한다.

왜 화가 나냐고? 이해가 안 되시나? 증거를 들이대든 말든 일단 난 살인이라는, 그것도 가족을 살해한 사람이 그렇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뻔뻔할 수 있음에 치가 떨리는 것이다. 그러다 증거를 들이대면 바로 수긍해버리는 모습까지. “난 그 장소에 간 적이 없어요. 절대. 맹세할 수 있어요.”이러다가 증거를 들이대면 대부분 “변호사를 불러주세요”아니면 “좋아요. 말하죠. 사실은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절대 죽이지는 않았어요.”

좋아요. 말하죠 라니? 그 전에 한 말은 말이 아니고 소인가? 이건 어떻게 설명이 안 된다.심하게는 살인의 충동마저 느낀다. 물론 배우가 뭔 죄가 있을까마는. 정말 뻔뻔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래도 난 생각했다. 이건 드라마니까. 재미있게 하려고 오버하는 것이겠지. 설마 저렇게 쓰레기들이 많겠어?

하지만 책은 진단한다. 미국이란 사회가 점점 부당한 방법이라도 부를 얻고 명예를 얻을 수 있다면 흔쾌히 부정을 저지르는 사회가 되었다고. 남보다 앞서고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부정과 속임수는 정당하다고 믿고 있는 미국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그러한 치팅 컬처 즉 속임수의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만만치 않은 분량을 통해 저자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부정과 속임수를 소개한다. 부패로 가득 차 있는 상류 계급, 소비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보통 시민들,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 기업, 하다못해 명문대 진학을 위해 컨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학생들까지. 미국은 온통 속임수와 부정으로 가득 찬 국가로 보일 정도다.

저자는 “오늘날 미국에서 급증하는 속임수는 부자들 사이의 오만과 보통 사람들 사이의 냉소주의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깊은 불안과 절망을 반영한다”고 진단한다. 정직하고 바르게 살면 오히려 바보가 되고 도태되는 사회. 그 사회에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 잠시 동안의 부정으로 인생을 역전할 수 있다거나, 하다못해 공돈 천 불이라도 생긴다고 유혹한다면. 보통의 미국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우리들은?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미국의 갖가지 부정 사례들은 소름이 돋을 만큼 충격적이다. 왜? 바로 우리가 그 모습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위층의 부정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사소한 부정은 철저히 처벌받는 사회풍조. 타자에 대한 배려와 인정 대신 오직 나만 잘 살고 보자는 이기주의, 물질로서 상대를 평가하는 천박한 황금만능주의, 가족과 이웃 간의 유대가 사라진 나홀로 사회. 이 모든 것이 놀랍게도 지금 우리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나마 미국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강력한 법 제정 등으로 최소한의 제동을 걸고 있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은 브레이크 고장 난 대형버스다. 전멸이 분명하다. 

일단 사회지도계층이랄까, 암튼 높은 곳에서 국가 운영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는 인사들의 면면을 보라. 우리가 보기에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현재 우리 정부 인사들을 보자. 여성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을 제외하고 국방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 그나마 두 명은 확실하네 하고 안도해야 하나. 일단 대통령이 군대를 안 갔다. 총리도 마찬가지. 참 보기 좋은 모습들이다. 위장전입도 같이 하셨으니 공통점이 많은 분들이다.

현재 국회의원 중 자신이나 자신의 아들이 군 복무에서 면제된 비율을 따져볼까. 몇 년 전 자료를 본 것 같기는 한데,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반면 그들의 재산을 보자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의원들을 제외하고 모두 “먹고 살만” 하다. 아니 매우 잘 먹고 살만 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 푼이라도 먹은 놈은, 아니 지가 안 먹고 지 새끼가 먹었더라도, 그건 잘못한 거고 죽어 마땅한 죄”라고 하니까 죽어야 하는 줄 알고 그렇게 가셨다. 부끄러워서, 자신을 믿어준 이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렇게 가셨다.

그런데 지금 국가를 운영하고 사회의 지도층이란 인간 중에 과연 부끄러움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있기는 한 것일까. 이 때문이다. 위에서 모범은커녕 온갖 부정과 부패, 속임수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데, 일반 국민들의 허탈감과 분노는 어떨까. “아 그래도 나는 양심을 지키며 떳떳하게,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야지”라며 다짐하는 분들이 얼마나 될 것이냔 말이다.

물론 이 더러운 세상에도 꿋꿋하게 정말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분들이 많은 것을 안다. 그런 분들까지 도매금으로 함께 넘길 순 없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또 불가피하게 그렇게 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미국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천성관 검사가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될 때, 검찰 내부에서는 능력은 그만하면 무난하고 청렴도는 중간 정도라고 판단하고, 추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간이란다. 중간!  


재산이 20억이 넘는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 한나라당의 뇌 구조가 참 궁금한 어떤 의원은 “검사로 그 정도 일했으면 20억 원 정도는 벌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정말 재미있는 세상이지 않은가. 20억으로 우리 강아지 이름을 지을까.

저자는 말한다. “내가 그리는 사회는 특별히 근사하지 않다. 사람들이 규칙이 공정하고 규칙을 지키면 잘살 수 있다고 믿는 사회, 사람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재산을 모으느라 안달하지 않는 사회, 기업이 법 조항과 법 정신을 충실하게 따르는 그런 사회를 나는 그린다.”라고.  


나 역시 그린다. 그런 사회. 상식적으로 살아도 살 수 있는 사회. 잘 사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살 수 있는 사회. 하루에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도 되는 사회. 어머니가 애들 학원 때문에 노래방 도우미가 되지 않아도 되는 사회. 동물처럼,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동물 대접을 받지 않아도 되는 그런 최소한의 사회를 그린다.

치팅 컬처는 미국이야기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이야기다. 우리의 현재와, 어쩌면 현실이 될 수 있는 미래의 이야기다. 판단은 항상 우리에게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판단의 과정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일 것이다. 난 바란다. 우리가 더 이상 짐승이 되지 않기를. 그리고 바란다. 증오가 넘쳐 터져버리지 않기를. 선택은 결국 우리가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지는 말자.  

 

** 이 리뷰는 온북리뷰에르로 작성한 글입니다. http://www.onbooktv.c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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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롯 - 2007년 제3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신경진 지음 / 문이당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서울에 살면서 아직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대한민국의 전복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를 미쳤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오히려 카지노에서 대박을 꿈꾸는 것보다 현실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인식에 머무르는 한 변하는 것은 없다. 지루한 반복만 있을 뿐이다.”

- 290p

‘인식에 머무르는 한 변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 가슴에 박힌다.

제대 후 복학을 앞두고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막막하던 시절. 아버님 친구 분의 소개로 경륜장에서 잠시 일한 경험이 있다. 경륜장을 모르시는 분은 없을 듯. 말 대신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냅다 달리는 경주다. 물론 돈을 거는 도박이라는 것은 경마와 동일하다.

그곳에서 내가 하는 일이란 솔직히 하루 종일 서있는 것이 다였다. 배팅 마감이 다가와 사람들이 줄을 서고 마감 종료와 함께 시작된 게임이 끝난 뒤 사람들의 탄식을 들으면 그만이었다. 어쩌다 술주정이나 귀여운 수준의 난동을 부리는 이들을 끌어내는 것이 원래 임무이긴 했지만, 그런 것은 건장한 다른 친구들이 대신해 주었다. 난 그냥 모니터를 통해 달리는 자전거를 보고 그 자전거에 자신의 돈을, 꿈을,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만한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난 천성적으로 도박을 할 만한 깜냥이 없다는 결론을 그 곳에서 얻었다. 도박을 하자면 어느 정도 배포도 두둑해야 하고, 이른 바 눈치도 빨라야 한다. 그날 선수들의 컨디션, 그 선수가 언제 상을 당했는지, 언제 결혼을 했는지 등의 정보에도 민감해야 했다. 한마디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도박이란 말씀.

오. 통재라. 학교 공부도 지긋 곱하기 둘이었던 내게 도박마저 공부를 강요하다니, 저는 고맙지만 사양합지요. 그런 생각이었다. 어떤 이는 오늘 하루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을 땄다고 하기도 하고, 그 반대는 수두룩하고. 수많은 전설들이 내 곁을 스쳐가도, 한마디로 도박은 내겐 너무 먼 그대였다.

하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다. 그곳에서 나는 어렴풋이 이 사회를 다시 보게 되었고, 인간의 나약함, 사악함, 두려움, 무모함, 부질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의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돈을 빌려 도박을 하는 사람, 부모의 부고를 도박장의 스피커를 통해 듣는 사람, 하루 종일 구걸한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또 다시 도박에 퍼붓는 사람. 그들에게서 나는 인간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신경진의 소설은 내겐 사뭇 진지한 접근을 요구했다. 도박과 여자에 대한 소설이라니, 바짝! 까지는 아니더라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살짝 긴장한 채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슬롯』은 세계문학상 당선작이다. 물론 전 세계의 문학 작품 중 심사해 주는 상이 아니고 세계일보가 주최해 주는 상이다. 당최 이름은 잘 지었다. 암튼 심사위원들의 평가와 같이 일단 그의 소설은 잘 읽힌다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 내가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예전에도 밝힌 바 있지만 잔인하게 재미없는 세상에 부러 돈과 시간을 들여 읽는 책마저 재미없다면 저자에 대한 증오로 시작해 출판사에 대한 테러까지 구상할지 모른다. 물론 재미는 읽는 이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다를 것이지만.

주인공은 헤어진 옛 애인에게서 갑자기 연락을 받는다. 그녀는 자신과 함께 카지노에 가서 10억 원이란 돈을 탕진해 버리는데 동참해 줄 것을 부탁한다. 처음 주인공은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음이 바뀐다. 사실 그것이 지금 그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둘은 참으로 이상한 여행을 떠나게 되고, 강원에 있는 무슨 무슨 랜드에 도착한다. 그리고는 그야말로 의미 없이 도박에 돈을 쏟아버리기 시작한다.

소설에는 다양한 종류의 도박이 등장한다. 저자가 아무래도 일생에 어느 한 부분은 도박에 몰두한 경험이 있는 듯, 여러 가지 게임들이 소개된다. 일단 간접경험의 즐거움을 주고 있다. 슬롯머신을 비롯하여 룰렛, 빅휠, 다이사이, 비디오 포커, 블랙잭, 바카라 등 어느 정도 익숙한 이름부터 생전 처음 듣는 것까지. 물론 아쉽게도 이 중 어느 것 하나 해본 경험은 없다. 소심남이다.

박완서는 이 소설에 대한 평에서 돈을 딸 확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주인공이 카지노에 간 것은 일확천금을 노릴 만큼 궁지에 몰려서도 왕창 잃어보고 싶게 돈이 넘쳐서도 아니라고 말한다. “애써 모든 행동에 이유를 붙여야 한다면 권태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분석하고 관찰할 뿐 몰입하지 못한다. 권태는 열정이 아니니까.”라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잘 그려냈다는 심사위원들의 평가에 부분 동감하면서도 난 도박이란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도 적지 않은 소득이었다고 생각한다.

경륜장은 국민체육진흥공단이 운영하는 것이다. 국가기관이다. 나는 지금도 경마와 경륜, 경정 등이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레저라는 정부의 사탕발림을 증오한다. 도박이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건전한 레저라니. 레이저로 쏴 죽여야 한다. 한 번이라도 경마장이나 경륜장에 가본 이들은 알 것이다. 애들 데리고 오기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도박을 국가가 장려하는 사회. 신나게 돈을 쏟아 붓고 결국엔 자신의 신체와 영혼까지 저당 잡히는 사람들이 넘치는 곳. 스릴과 긴장감이 도가 지나쳐 죽음까지 인도하는 세계. 그 곳이 바로 도박장이었던 것이다. 물론 카지노와 같은 곳과 비교할 때는 그나마 나을지 모른다. 적어도 시계는 붙어있고, 밖이 보이니까.

하지만 이미 정당한 방법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믿게 된 사회에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박은, 복권은, 자기 존재에 대한 최후의 확인이자 국가에, 사회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니들이 내 푼돈까지 가져가시겠다? 어림없지. 절대 그럴 수 없지. 내가 너희 도둑놈들의 돈을 딸 거야. 그까짓 돈이 너희들에겐 하찮은 것이잖아. 나도 그 정도는 가질 권리가 있잖아.

도박이 사행심을 부추긴다. 로또가 문제다 떠들다가 금세 조용해진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나마 로또와 관련돼 기억에 남는 건 300억인가에 당첨된 어느 공무원이 사표를 쓰고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렸다는 뉴스. 부디 그가 아직까지 행복하기를, 아니 살아있기를 바랄 뿐이지만. 

어딜 가나 경품이요, 이벤트요, 사은품이요. 공짜 증정이요, 그리고 대박찬스다. 온 사회가  요행을 바라는 마음, 그것을 이용하는 상술로 가득 차 있다. 1등 상품으로 자동차를 준다는, 여행권을 준다는 이벤트에 응모 한 번 안 해본 이들이 있을까. 어차피 안 될 것 알지만 응모함에 신상정보를 적어 넣은 적은 없는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본디 복권은 노인들의 삶의 의욕을 살리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들었다. 다음 주의 당첨될지 모른다는 기대와 희망이 삶의 의지를 더욱 북돋아 준다는 얘기다. 즐거움을 가지고 한 주를 버틴다는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디어를 개발한 사람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생각도 든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다.

책은 현대인들의 무력함 속에 나타나는 아련한 슬픔을 덤덤히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다 나와 같이 다른 교훈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 절대 도박은 하지 말아야지. 이기지 못할 것은 아예 덤비지 말자 뭐 이런 것들. 그리고 온통 도박판인 사회에 대한 새삼스러운 놀라움도 느끼게 된다면 더욱 감사하다.

역대 세계문학상 수상작 중 이른 바 가장 뜨지 못했다는 『슬롯』. 그러나 너무 슬퍼 마시라. 적어도 한 명의 독자에겐 반짝 빛났으니 말이다. 도박에 대해 궁금한 분. 카지노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일독하길 바란다. 단, 실습은 자제하시길. 

** 이 리뷰는 온북리뷰에르로 작성한 글입니다. http://www.onbooktv.c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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