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컬처 - 거짓과 편법을 부추기는 문화
데이비드 캘러헌 지음, 강미경 옮김 / 서돌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미드를 즐겨보는 편이다. 본방사수는 어차피 불가능하기에 가끔씩 한두 편씩, 때로는 그 이상을 한꺼번에 보곤 한다. 예전 맥가이버의 추억부터 엑스파일의 광팬이었던 전력이 있어서, 미스터리나 범죄 수사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이다. 물론 휴먼도 좋지만 왠지 미국식의 휴먼은 나에게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한다. 정서상 차이인지, 내가 감정이 메마른 것인지.

애증의 드라마가 있다. 뭐 대부분의 범죄 드라마가 그런 것 같기는 한데, CSI를 즐겨보는 편이지만 볼 때마다 짜증 혹은 분노를 느끼곤 한다. 그러면서 왜 보냐고? 그러게 말이다.  

가끔씩 드러나는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인식이 황당할 때가 있다. 쿠바나 중국, 북한을 등장시킬 때가 있는데 그때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논리가 그대로 나타난다. 뭐 어차피 미국 드라마에서 거대한 휴머니티나 국경을 초월한 인도주의, 혹은 정치적 신념을 떠난 정의 따위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끔씩 “정말 미국인 모두가 저렇게 생각할까?”하고 궁금할 때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단언하건대 미국은 싸이코 패스 집단이다.

동유럽 어느 국가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매춘에 이용되다가 정의로운 호레이쇼 반장(CSI 마이애미의 주인공)에 의해 구출된다. 좋다. 그렇다 치자. 그런데 꼭 어느 특정 국가를 지칭해야 할까? 이라크 전쟁이 한창일 때, 잘못은 이라크가 한 것! 이라고 강조하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이라크 장군의 아들이 미국에서 살인을 저질러도 국제적 관계 때문에 처벌하지 못하는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룬다. 오호라. 이라크는 악마로구나.

코리아타운을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에서는 북한의 노래가 흘러나오고(걔들에게 남과 북은 큰 차이가 없다), 한국 여성은 창녀에다가 그 아들까지 의학 실험의 대상으로 팔아넘긴다. 자신의 에이즈 감염으로 아들 역시 에이즈 환자였던 것이다. 이쯤 되면 뭐 “니들 맘대로 떠드세요”정도다. 이러면서 보는 나는 또 뭔가. 변태? 싸이코 패스? 비난하신다면 할 말 없다.  

 

 

 

말이 길었다. 책과 관련해 내가 CSI에서 짜증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용의자 혹은 범인들의 태도이다. 이건 도저히 내 정서상, 짐작컨대 대부분 아시아인들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다. 뭐냐고? 바로 양심이다. 머 최근 나영이 사건 등에서 나타나듯 그 양심이란 것이 도대체 어느 선까지 믿어야 하는지 회의가 들 때가 많지만, 아무튼 아직까지는 난 그런 게 있다고 믿고 살아왔다.

하지만 드라마에 등장하는 것들은 그야말로 양심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예를 들자. 부모를 살해했다. 혹은 아내, 남편, 자식들을 살해했다고 치자. 수사관들 앞에서 용의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혐의를 절대 부인한다.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한다. 어떻게 나를 용의자로 몰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정확히 30초 후 그렇게 부인하던 용의자는 얼굴색 하나 안변하고 말한다. “오케이, 말하겠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라고. 무슨 일이 벌어졌지? 수사관이 과학적 증거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지문이나 체액, 정액 등이다. 흔히 DNA검사를 하면 대부분 부인하지 못한다.

왜 화가 나냐고? 이해가 안 되시나? 증거를 들이대든 말든 일단 난 살인이라는, 그것도 가족을 살해한 사람이 그렇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뻔뻔할 수 있음에 치가 떨리는 것이다. 그러다 증거를 들이대면 바로 수긍해버리는 모습까지. “난 그 장소에 간 적이 없어요. 절대. 맹세할 수 있어요.”이러다가 증거를 들이대면 대부분 “변호사를 불러주세요”아니면 “좋아요. 말하죠. 사실은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절대 죽이지는 않았어요.”

좋아요. 말하죠 라니? 그 전에 한 말은 말이 아니고 소인가? 이건 어떻게 설명이 안 된다.심하게는 살인의 충동마저 느낀다. 물론 배우가 뭔 죄가 있을까마는. 정말 뻔뻔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래도 난 생각했다. 이건 드라마니까. 재미있게 하려고 오버하는 것이겠지. 설마 저렇게 쓰레기들이 많겠어?

하지만 책은 진단한다. 미국이란 사회가 점점 부당한 방법이라도 부를 얻고 명예를 얻을 수 있다면 흔쾌히 부정을 저지르는 사회가 되었다고. 남보다 앞서고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부정과 속임수는 정당하다고 믿고 있는 미국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그러한 치팅 컬처 즉 속임수의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만만치 않은 분량을 통해 저자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부정과 속임수를 소개한다. 부패로 가득 차 있는 상류 계급, 소비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보통 시민들,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 기업, 하다못해 명문대 진학을 위해 컨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학생들까지. 미국은 온통 속임수와 부정으로 가득 찬 국가로 보일 정도다.

저자는 “오늘날 미국에서 급증하는 속임수는 부자들 사이의 오만과 보통 사람들 사이의 냉소주의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깊은 불안과 절망을 반영한다”고 진단한다. 정직하고 바르게 살면 오히려 바보가 되고 도태되는 사회. 그 사회에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 잠시 동안의 부정으로 인생을 역전할 수 있다거나, 하다못해 공돈 천 불이라도 생긴다고 유혹한다면. 보통의 미국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우리들은?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미국의 갖가지 부정 사례들은 소름이 돋을 만큼 충격적이다. 왜? 바로 우리가 그 모습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위층의 부정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사소한 부정은 철저히 처벌받는 사회풍조. 타자에 대한 배려와 인정 대신 오직 나만 잘 살고 보자는 이기주의, 물질로서 상대를 평가하는 천박한 황금만능주의, 가족과 이웃 간의 유대가 사라진 나홀로 사회. 이 모든 것이 놀랍게도 지금 우리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나마 미국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강력한 법 제정 등으로 최소한의 제동을 걸고 있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은 브레이크 고장 난 대형버스다. 전멸이 분명하다. 

일단 사회지도계층이랄까, 암튼 높은 곳에서 국가 운영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는 인사들의 면면을 보라. 우리가 보기에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현재 우리 정부 인사들을 보자. 여성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을 제외하고 국방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 그나마 두 명은 확실하네 하고 안도해야 하나. 일단 대통령이 군대를 안 갔다. 총리도 마찬가지. 참 보기 좋은 모습들이다. 위장전입도 같이 하셨으니 공통점이 많은 분들이다.

현재 국회의원 중 자신이나 자신의 아들이 군 복무에서 면제된 비율을 따져볼까. 몇 년 전 자료를 본 것 같기는 한데,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반면 그들의 재산을 보자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의원들을 제외하고 모두 “먹고 살만” 하다. 아니 매우 잘 먹고 살만 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 푼이라도 먹은 놈은, 아니 지가 안 먹고 지 새끼가 먹었더라도, 그건 잘못한 거고 죽어 마땅한 죄”라고 하니까 죽어야 하는 줄 알고 그렇게 가셨다. 부끄러워서, 자신을 믿어준 이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렇게 가셨다.

그런데 지금 국가를 운영하고 사회의 지도층이란 인간 중에 과연 부끄러움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있기는 한 것일까. 이 때문이다. 위에서 모범은커녕 온갖 부정과 부패, 속임수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데, 일반 국민들의 허탈감과 분노는 어떨까. “아 그래도 나는 양심을 지키며 떳떳하게,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야지”라며 다짐하는 분들이 얼마나 될 것이냔 말이다.

물론 이 더러운 세상에도 꿋꿋하게 정말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분들이 많은 것을 안다. 그런 분들까지 도매금으로 함께 넘길 순 없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또 불가피하게 그렇게 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미국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천성관 검사가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될 때, 검찰 내부에서는 능력은 그만하면 무난하고 청렴도는 중간 정도라고 판단하고, 추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간이란다. 중간!  


재산이 20억이 넘는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 한나라당의 뇌 구조가 참 궁금한 어떤 의원은 “검사로 그 정도 일했으면 20억 원 정도는 벌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정말 재미있는 세상이지 않은가. 20억으로 우리 강아지 이름을 지을까.

저자는 말한다. “내가 그리는 사회는 특별히 근사하지 않다. 사람들이 규칙이 공정하고 규칙을 지키면 잘살 수 있다고 믿는 사회, 사람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재산을 모으느라 안달하지 않는 사회, 기업이 법 조항과 법 정신을 충실하게 따르는 그런 사회를 나는 그린다.”라고.  


나 역시 그린다. 그런 사회. 상식적으로 살아도 살 수 있는 사회. 잘 사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살 수 있는 사회. 하루에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도 되는 사회. 어머니가 애들 학원 때문에 노래방 도우미가 되지 않아도 되는 사회. 동물처럼,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동물 대접을 받지 않아도 되는 그런 최소한의 사회를 그린다.

치팅 컬처는 미국이야기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이야기다. 우리의 현재와, 어쩌면 현실이 될 수 있는 미래의 이야기다. 판단은 항상 우리에게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판단의 과정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일 것이다. 난 바란다. 우리가 더 이상 짐승이 되지 않기를. 그리고 바란다. 증오가 넘쳐 터져버리지 않기를. 선택은 결국 우리가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지는 말자.  

 

** 이 리뷰는 온북리뷰에르로 작성한 글입니다. http://www.onbooktv.c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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