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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1999년 8월
평점 :
절판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월든》이라는 단 한 권의 책으로 소로우는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월든》을 읽어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운 문학작품이자, 참다운 삶의 길을 제시한 《월든》은 분명 소로우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시민의 불복종》역시 소로우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책 속에는 그가 생을 마감한 지 13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펄펄 살아 숨 쉬는 보편적인 진리가 있다. “시민이 한 순간만이라도, 혹은 아주 적은 정도라도 자신의 양심을 입법자에게 맡겨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양심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그의 질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분명 유효한 물음이다. 그는 “법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 적은 없다. 오히려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매일매일 불의의 하수인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소로우는 도시의 번잡한 삶을 버리고 콩코드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자연과 함께 생활한 체험을 《월든》에 담았다. 또한 미국 정부가 흑인노예제도를 계속 용납하는 것과 영토 확장을 위해 멕시코 전쟁을 일으킨 것에 항의하기 위해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다 감옥에 수감되기도 한다. 그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시민의 불복종》이라는 작품을 세상에 내보내게 된다. 마하트마 간디가 자신의 불복종 무저항 운동을 소로우의 사상에서 빌려온 개념이라 말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소로우는 말한다.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기라. 당신의 생명으로 하여금 그 기계(정부)를 멈추는 역마찰이 되도록 하라.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극력 비난하는 해악에게 나 자신을 빌려주는 일은 어쨌든 간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담담하게 이렇게 말한다.
“사람 하나라도 부당하게 가두는 정부 밑에서 의로운 사람이 진정 있을 곳은 역시 감옥이다. 매사추세츠 주가 자기에게 동조하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두는 곳, 노예의 나라에서 자유인이 명예롭게 기거할 수 있는 유일한 집이 감옥인 것이다.”
불복종, 저항이라는 이름이 가져오는 금기의 유혹과 열정. 광복과 분단, 전쟁 이후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라는 또 다른 전쟁을 치러왔던 우리. 우리처럼 저항과 불복종이란 단어가 현실과 일체화되었던 역사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가열차게 살아왔다.
도대체 ‘근대’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타자에 의한 강제적인 근대화로 인해 우리는 무작정 달려갔고, 여기까지 왔다.
근대화와 민주화가 전혀 상반되지 않음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이 땅의 독재자들은 근대화를 위한 민주주의의 희생을 강요했고, 그로 인해 잠시 나타난 가시적 성과를 마치 근대화의 상징인양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적인 민주주의라는, 사실 신라의 화백제도를 모방한, 어처구니없는 체육관 선거를 치르면서까지 이루려 했던 근대화, 발전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원했던 문명화, 선진화는 무엇이었을까.
소로우는 단 한 명의 부당한 억압도 용납되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왜 그랬을까. 그 한 명이 곧 전체 인민들의 억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우리가 이 땅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농민의 부당한 억압에 저항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땅의 소수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힘을 보태야 하는 이유가. 비정규직의 고통을 풀기 위해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래서이다. 당장 남의 일로 보이겠지만, 세계화 시대라고 떠들어대는 지금 이 순간, 이미 남의 일은 없는 것이다.
소로우가 살던 당시의 환경파괴가 지금의 재앙에 비하면 과연 얼마나 컸을지 궁금하긴 하지만, 소로우는 자연을 파괴하는 그 어떤 시도라도 결코 진보와 발전으로 이어질 수 없다고 단언한다. 스스로 재앙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그는 보았다. 그의 생각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면 크게 틀린 것 같지 않다. 어쩌면 아주 정확히 미래를 예언한 것일 수도 있다.
이미 전기나 그 밖의 동력을 이용하여 실용화된 자동차들이 많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기술발전이 훨씬 더 비약적으로 이뤄졌고, 당장 생산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석유 자원을 사용하지 않고도 우리는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는 시대에 진작 접어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한없이 더디게만 보인다. 왜 그럴까.
기존의 자동차 기업들과 석유 산업 관련 재벌들, 그리고 무력한 정부 때문이다. 석유를 연료로 사용하지 않는 자동차가 나오면 기존의 자동차는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또한 친환경 자동차는 지금과 같이 잔고장이 많지도 않다. 한 번 구입해 사용하면 기존의 자동차보다 유지비가 대폭 절감된다. 소비자의 입장, 환경적인 측면을 봐도 획기적인 일이다. 하지만 자본의 논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처럼 석유를 팔아야 하고, 고장인 많이 나야 되는 것이다. 친환경 자동차는 기술의 문제가 아닌 시장논리의 문제인 것이다.
이 정도로 썩어버린 세상에서 소로우가 살았다면 그는 월든 호숫가가 아닌 더 깊은 그 어디엔가 숨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돈에 미쳐 환장한 세상은 소로우에겐 지옥과 다름없을 테니 말이다. 그럼 지금 우리에겐 이 시대가 천국일까. 과연.
소로우의 철학과 사상이 아직까지는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월든》이 소개된 지도 비교적 최근이고, 이 책 역시 올해야 나올 수 있었다. 평화와 자치, 자연과 연대를 강조했던 그의 삶은 백년을 훌쩍 넘긴 지금에도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종말을 향해 거침없이, 지붕 뚫고 달려가는 우리 모습을 되돌아볼 시점이다. 이미 늦은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소로우의 말처럼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우리 마음속의 선전포고가 필요한 때다.
“불의의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
나는 조용히, 내 고유의 방식으로 정부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