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슬롯 - 2007년 제3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신경진 지음 / 문이당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서울에 살면서 아직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대한민국의 전복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를 미쳤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오히려 카지노에서 대박을 꿈꾸는 것보다 현실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인식에 머무르는 한 변하는 것은 없다. 지루한 반복만 있을 뿐이다.”
- 290p
‘인식에 머무르는 한 변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 가슴에 박힌다.
제대 후 복학을 앞두고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막막하던 시절. 아버님 친구 분의 소개로 경륜장에서 잠시 일한 경험이 있다. 경륜장을 모르시는 분은 없을 듯. 말 대신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냅다 달리는 경주다. 물론 돈을 거는 도박이라는 것은 경마와 동일하다.
그곳에서 내가 하는 일이란 솔직히 하루 종일 서있는 것이 다였다. 배팅 마감이 다가와 사람들이 줄을 서고 마감 종료와 함께 시작된 게임이 끝난 뒤 사람들의 탄식을 들으면 그만이었다. 어쩌다 술주정이나 귀여운 수준의 난동을 부리는 이들을 끌어내는 것이 원래 임무이긴 했지만, 그런 것은 건장한 다른 친구들이 대신해 주었다. 난 그냥 모니터를 통해 달리는 자전거를 보고 그 자전거에 자신의 돈을, 꿈을,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만한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난 천성적으로 도박을 할 만한 깜냥이 없다는 결론을 그 곳에서 얻었다. 도박을 하자면 어느 정도 배포도 두둑해야 하고, 이른 바 눈치도 빨라야 한다. 그날 선수들의 컨디션, 그 선수가 언제 상을 당했는지, 언제 결혼을 했는지 등의 정보에도 민감해야 했다. 한마디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도박이란 말씀.
오. 통재라. 학교 공부도 지긋 곱하기 둘이었던 내게 도박마저 공부를 강요하다니, 저는 고맙지만 사양합지요. 그런 생각이었다. 어떤 이는 오늘 하루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을 땄다고 하기도 하고, 그 반대는 수두룩하고. 수많은 전설들이 내 곁을 스쳐가도, 한마디로 도박은 내겐 너무 먼 그대였다.
하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다. 그곳에서 나는 어렴풋이 이 사회를 다시 보게 되었고, 인간의 나약함, 사악함, 두려움, 무모함, 부질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의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돈을 빌려 도박을 하는 사람, 부모의 부고를 도박장의 스피커를 통해 듣는 사람, 하루 종일 구걸한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또 다시 도박에 퍼붓는 사람. 그들에게서 나는 인간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신경진의 소설은 내겐 사뭇 진지한 접근을 요구했다. 도박과 여자에 대한 소설이라니, 바짝! 까지는 아니더라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살짝 긴장한 채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슬롯』은 세계문학상 당선작이다. 물론 전 세계의 문학 작품 중 심사해 주는 상이 아니고 세계일보가 주최해 주는 상이다. 당최 이름은 잘 지었다. 암튼 심사위원들의 평가와 같이 일단 그의 소설은 잘 읽힌다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 내가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예전에도 밝힌 바 있지만 잔인하게 재미없는 세상에 부러 돈과 시간을 들여 읽는 책마저 재미없다면 저자에 대한 증오로 시작해 출판사에 대한 테러까지 구상할지 모른다. 물론 재미는 읽는 이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다를 것이지만.
주인공은 헤어진 옛 애인에게서 갑자기 연락을 받는다. 그녀는 자신과 함께 카지노에 가서 10억 원이란 돈을 탕진해 버리는데 동참해 줄 것을 부탁한다. 처음 주인공은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음이 바뀐다. 사실 그것이 지금 그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둘은 참으로 이상한 여행을 떠나게 되고, 강원에 있는 무슨 무슨 랜드에 도착한다. 그리고는 그야말로 의미 없이 도박에 돈을 쏟아버리기 시작한다.
소설에는 다양한 종류의 도박이 등장한다. 저자가 아무래도 일생에 어느 한 부분은 도박에 몰두한 경험이 있는 듯, 여러 가지 게임들이 소개된다. 일단 간접경험의 즐거움을 주고 있다. 슬롯머신을 비롯하여 룰렛, 빅휠, 다이사이, 비디오 포커, 블랙잭, 바카라 등 어느 정도 익숙한 이름부터 생전 처음 듣는 것까지. 물론 아쉽게도 이 중 어느 것 하나 해본 경험은 없다. 소심남이다.
박완서는 이 소설에 대한 평에서 돈을 딸 확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주인공이 카지노에 간 것은 일확천금을 노릴 만큼 궁지에 몰려서도 왕창 잃어보고 싶게 돈이 넘쳐서도 아니라고 말한다. “애써 모든 행동에 이유를 붙여야 한다면 권태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분석하고 관찰할 뿐 몰입하지 못한다. 권태는 열정이 아니니까.”라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잘 그려냈다는 심사위원들의 평가에 부분 동감하면서도 난 도박이란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도 적지 않은 소득이었다고 생각한다.
경륜장은 국민체육진흥공단이 운영하는 것이다. 국가기관이다. 나는 지금도 경마와 경륜, 경정 등이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레저라는 정부의 사탕발림을 증오한다. 도박이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건전한 레저라니. 레이저로 쏴 죽여야 한다. 한 번이라도 경마장이나 경륜장에 가본 이들은 알 것이다. 애들 데리고 오기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도박을 국가가 장려하는 사회. 신나게 돈을 쏟아 붓고 결국엔 자신의 신체와 영혼까지 저당 잡히는 사람들이 넘치는 곳. 스릴과 긴장감이 도가 지나쳐 죽음까지 인도하는 세계. 그 곳이 바로 도박장이었던 것이다. 물론 카지노와 같은 곳과 비교할 때는 그나마 나을지 모른다. 적어도 시계는 붙어있고, 밖이 보이니까.
하지만 이미 정당한 방법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믿게 된 사회에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박은, 복권은, 자기 존재에 대한 최후의 확인이자 국가에, 사회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니들이 내 푼돈까지 가져가시겠다? 어림없지. 절대 그럴 수 없지. 내가 너희 도둑놈들의 돈을 딸 거야. 그까짓 돈이 너희들에겐 하찮은 것이잖아. 나도 그 정도는 가질 권리가 있잖아.
도박이 사행심을 부추긴다. 로또가 문제다 떠들다가 금세 조용해진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나마 로또와 관련돼 기억에 남는 건 300억인가에 당첨된 어느 공무원이 사표를 쓰고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렸다는 뉴스. 부디 그가 아직까지 행복하기를, 아니 살아있기를 바랄 뿐이지만.
어딜 가나 경품이요, 이벤트요, 사은품이요. 공짜 증정이요, 그리고 대박찬스다. 온 사회가 요행을 바라는 마음, 그것을 이용하는 상술로 가득 차 있다. 1등 상품으로 자동차를 준다는, 여행권을 준다는 이벤트에 응모 한 번 안 해본 이들이 있을까. 어차피 안 될 것 알지만 응모함에 신상정보를 적어 넣은 적은 없는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본디 복권은 노인들의 삶의 의욕을 살리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들었다. 다음 주의 당첨될지 모른다는 기대와 희망이 삶의 의지를 더욱 북돋아 준다는 얘기다. 즐거움을 가지고 한 주를 버틴다는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디어를 개발한 사람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생각도 든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다.
책은 현대인들의 무력함 속에 나타나는 아련한 슬픔을 덤덤히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다 나와 같이 다른 교훈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 절대 도박은 하지 말아야지. 이기지 못할 것은 아예 덤비지 말자 뭐 이런 것들. 그리고 온통 도박판인 사회에 대한 새삼스러운 놀라움도 느끼게 된다면 더욱 감사하다.
역대 세계문학상 수상작 중 이른 바 가장 뜨지 못했다는 『슬롯』. 그러나 너무 슬퍼 마시라. 적어도 한 명의 독자에겐 반짝 빛났으니 말이다. 도박에 대해 궁금한 분. 카지노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일독하길 바란다. 단, 실습은 자제하시길.
** 이 리뷰는 온북리뷰에르로 작성한 글입니다. http://www.onbooktv.co.k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