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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묻다 - 5人5色 한국 현대사특강 ㅣ 철수와영희 강연집 모음 6
서중석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우리의 현대사는 그 굴곡 많은 과정에 대한 솔직한 기록이어야 한다. 기쁜 것은 기쁘게, 슬픈 것은 슬프게, 아픈 것은 아프게, 있는 그대로를 정직하게 기록해야 한다. 이 특강은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고 익히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보다 정직하게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살아온 경험을 전수하려는 작은 노력의 일부분이다.”
지난 2008년을 돌이켜보면 기억나는 단어들이 몇 있다. 뉴라이트, 건국절, 정통성, 국부 등이다. 책에 담긴 강연의 한 꼭지를 맡고 있는 한홍구 교수도 지적한 바와 같이 지난해는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가 하나가 되어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에 온 힘을 모은 해였다.
근현대사 수정에 있어 주무 부서인 교육과학기술부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일단 그렇다 치더라도, 전혀 상관없는 국방부 장관이나 국토해양부 장관들도 충성 경쟁하듯 역사교과서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다 결국 국무총리가 시비를 걸더니 급기야 대통령께서 직접 특정 출판사를 협박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출판사는 정부가 두렵지 않은가!”라고. 우습다.
뿐만 아니다. 서울시교육위원회라는 곳은 이른 바 ‘좌편향’인 근현대사 교육을 바로 잡겠다며 자칭 각계 전문가 140여 명을 강사로 위촉하여 시내 각 고등학교에서 근현대사 특강을 개최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웃긴 것은 자칭 전문가라는 사람들 중에 정작 근현대사 전문가는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예비군 훈련장의 안보 강사, 안기부에서 공작 정치를 하던 퇴물, 레크리에이션 강사들을 전문가랍시고 불러들였다. 우습다.
진중권 교수였나? 이런 작태를 “가뜩이나 입시 공부 때문에 피곤한 학생들을 억지로 모아다 헛소리를 픽픽 해대는 것도 엄연한 인권 탄압이다. 아이들을 굳이 그 장소에 가서 졸 필요는 없지 않나.”라고 비판했던 것이 기억난다. 정확한 인용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암튼 그 비슷한 표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동안 우리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나 중국의 동북공정 등 주변 국가의 역사 말살에 대해 분노해 왔다. 정당한 분노였다. 그들의 모습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이었지만 그들의 손바닥이 점점 커지는 모습이어서 불안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을 비난할 수 없게 되었다. 정부가 뉴라이트라는 전혀 새롭지 않은 오른쪽이들을 앞세워 근현대사를 왜곡하고 있는데,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독립운동의 성과를 무시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제창하고, 이승만과 박정희를 우상화하기 위해 국가의 정통성까지 말살하려는 작태를 벌이고 있는데 어떻게 일본과 중국을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미 같은 족속이 되어버린 것이다. 염치 없는 족속이.
책은 이처럼 역사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전문성이 훼손당하는 현실에서 ‘전국역사교사모임’‘한국역사연구회’‘포럼 진실과 정의’‘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가 준비한 한국 현대사 특강의 내용을 담았다. 주로 중고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지만 딱딱하고 어렵다기 보다는 옛 이야기하듯 재미있고 이해하기 쉽다.
물론 내용이 쉽다고 그 중요성이 덜하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거짓을 참이라고 우기는 사회에서는 이들의 강연은 소금과 같다. 정부가 하는 행태들이 너무나 무참하고 천박한 것이기에 강사들의 뜨거운 외침은 더욱 소중하다.
이명박 정부는 앞으로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과 관련해 이승만 정권이 친일 청산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기술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제헌헌법에 근거해 만들어진 반민특위가 어떤 과정을 통해 누구에 묵인 하에 와해되었는지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홍구 교수는 “이승만이 살아온다 해도 몹시 낯 뜨거워했을 것”이라 말한다. 그 정도다. 지금 정부와 뉴라이트라는 집단의 천박함이.
한 교수는 뉴라이트와 정부는 자기들의 편의에 따라 ‘이랬으면 좋았을 것을’하는 내용을 역사라고 가르치려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부가 자행한 근현대사 교과서 탄압은 연산군이 무오사화를 저지른 이래 최대의 사화(史禍)로 기록될 것이라고 개탄했다. 그 정도다. 이 정부의 오만함이란 것이.
해방 직후 우리는 식민지 국가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당연히 친일잔재의 청산이었다. 오히려 친일파를 청산 못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 애국 세력을 역 청산해 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처절한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친일파들의 후손이 어떻게 사는 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입이 더러워질까 두렵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짧은 시간에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성공했다는 찬사를 받는다. 스스로도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그 성공은 절반의 성공이요, 미완의 작업일 뿐이다. 우리는 정부 수립 이후 국가 권력이 친일파들에게 장악되면서 제헌헌법이 아닌 국가보안법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렇게 반세기 동안을 눈치 보며, 불안해하며, 시키면 시키는 대로 살아온 것이다.
물론 자랑스러운, 눈물겹게 고맙고 애틋한 역사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제주 4.3 항쟁, 4․19 혁명, 5.18 광주항쟁, 6월 항쟁 그리고 촛불이 있었다. 이는 우리들의 소중한 자산이자 미래를 위한 깨지지 않는 거울이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 준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우친 값진 경험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피 흘려 쟁취한 눈물겨운 꽃이었다.
책은 현재 정부와 뉴라이트가 시비를 거는, 아니 심대하게 왜곡하고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참 역사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말해주고 있다. 정부 쪽이 140여 명의 정체불명의 전문가들을 이른 바 쪽수로 밀어붙였다면, 책의 강사들은 역사학계의 원로부터 신진 학자까지 그야말로 “드림팀”이다.
개인적으로 정말 반가운 것이 강연을 하신 분 중 몇 분을 알고, 또 뵌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만열 교수님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하실 때 찾아뵙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꽝꽝 얼어버린 나에게 “몸이 완전히 얼었는데, 뜨거운 차 한 잔 마시고 천천히 하시라”했던 인자함이 기억된다. 한 눈에 봐도 “천상 학자시구나”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른 바 ‘자체 발광’이 인상적이 분이었다. 역사편찬위원회라는 직책에 정말 어울리는 분이었다.
한홍구 선생님도 인터뷰 한 적이 있다. 그때는 후배 기자가 인터뷰를 했고 나는 그냥 따라가서 책에 사인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선생은 “노무현 정부 때 그렇게 싸웠는데, 이제 생각해 보면 그 땐 차라리 행복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다. 그럴 만도 하다. 암튼 선생은 평화박물관 건립에 함께 하자는 사인을 해주셨다. 얼핏 보면 도인 분위기도 나고 또 얼핏 보면 동네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이시다.
책에서 북한의 역사를 맡았던 정영철 박사님은 현재 내가 일하고 있는 잡지사의 편집기획위원으로 계신다. 상당히 개그감각이 뛰어나신데, 주로 허무개그다. 이야기 듣고 집에 오다 웃는 적이 많다. 하지만 왠지 어수룩해 보이는 외형 속에 상당한 내공을 갖추고 계신 분이다. 나는 학자입네 하면서 거드름 피우는 족속들보다 딱 100배 멋진 분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사무실 어느 구석에서 열심히 타이핑을 하고 계신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아주 가끔이다. 대부분은 수다 떨고 계신다.
우리 역사는 자랑스러운 것도 있고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수치스러운 부분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물론 객관성을 완전히 담보할 수 있는 역사 기록은 없다. 하지만 찰나의 이익을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범죄를 저질러서는 절대로 안 된다. 부끄럽지만 기억해야 할 역사, 수치스럽지만 안고 가야 할 역사마저 엄연한 우리의 삶이었음을 부정해선 안 된다.
어제를 왜곡하면 오늘이 뒤틀리고 내일이 어두워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