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마돈나
자케스 음다 지음, 이명혜 옮김 / 검둥소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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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월드컵 때문이다. 월드컵이 과연 ‘전 세계인’의 축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2002년을 기점으로 우리도 월드컵에 대한 상당한 관심과 열광을 드러내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처음 열리는 월드컵이니만큼 남아공에 쏠리는 관심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벌써부터 치안상의 위험을 강조하는 언론들도 있고, 남아공이 어떤 나라인가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행복한 마돈나》는 1971년 당시 백인이 통치하고 있던 남아공의 프리 주 엑셀시오에서 시민 19명이 인종차별 정책의 일환인 백인과 흑인 간의 성행위를 금지하는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기소된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남아공의 그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에서 자유와 민주화를 향한 남아공 흑인들의 투쟁과 눈물이 담겨진 작품이다.

인종차별. 이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추악한 발명품 중 하나다. 백인이 여타 인종들에 비해 선천적으로, 생태학적으로 우월하다는 쓰레기 같은 이론을 내세워 유럽, 나아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인디언, 아프리카, 아시아 인종들을 탄압했으며 살육했고, 강간했다. 서구 열강의 자랑스러운 제국주의 역사가 타 민족에 대한 강간과 살육의 역사에 다름 아닌 이유다.

피부색이 다른 인종끼리는 성행위를 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로 남아공의 백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했으며, ‘고귀한 피’를 지키려 했다.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만을 서구가 저지른 인종 학살의 전부인양 매도하고 있는 유럽, 그리고 서구는 정작 자신들이 지금껏 저질러 온 더 추악한 만행에 대해선 침묵한다. 모든 죄를 독일과 히틀러에 돌리면서.

《행복한 마돈나》는 때문에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저자의 탁월한 문장력과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아프리카 전통 문화에 대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쓰라린 이유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극악한 범죄는 차별임을 이 책은 너무나 아름답고도 슬프게 담아낸다. 아름답다는 단어가 무참해지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서구 열강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채우기 위해 과학적, 종교적 외피를 만들어냈다. “신이 우리에게 인디언, 흑인들을 지배하라고 계시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은, 정작 그 시대에는 전혀 허무맹랑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흑인은 노예, 상품일 뿐이었으며, 인디언은 다만 쓸어버려야 할 귀찮은 것들에 불과했다.

문제는 지금 이 시대에, 흑인이 미국의 대통령이 된 지금 이 시대에는 이러한 차별이 사라졌느냐하는 점이다. 아울러 백인이 아닌 우리들의 인식 속에는 이러한 차별이 없느냐 하는 점이다. 다문화 가정이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이주 노동자들을 어려움 없이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바로 이 순간. 우리들의 마음속엔 또 다른 “백인 우월주의”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일본은 자신들이 아시아의 맹주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뼛속 깊이 서구를 동경하고 사랑했다. 여전히 거기엔 변함이 없다. 우리가 경계해야 한다고 하는, 그러나 이미 너무도 깊숙이 들어와 버린 왜색문화는 기실 일본식 서양문화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도 모르게, 혹은 알면서도 ‘한국식 서양문화’를 만들어 왔다. 그것도 매우 줄기차게.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그 수가 끝이 없다. 하지만 그 수많은 논리들 속에 진정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다. 인간은 인간 자체로 존엄성을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망각할 때 우리는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게 되고, 행복을 버리게 된다.

어쩌면 2010년 남아공을 바라보는 시선이 ‘축구공’만이어선 안 될 듯하다. 진정 월드컵이 세계인의 축제가 되려면 세계 모든 이들이 즐길 수 있는 마당을 만들어야 한다.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을 확인하는 순간. 인류는 비로소 한 단계 전진했다고 할 수 있다.

행복한 마돈나 니키의 삶이 더없이 큰 고통과 상처로 얼룩졌지만, 그의 혼혈 딸 포피의 투쟁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다. 우리는 모두가 인간으로 태어났다. 아이티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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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사진
이치카와 다쿠지 지음, 양윤옥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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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카와 다쿠지의 소설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고 하기엔 약간 부족한 점이 있다. 부러 찾아서 읽는 편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읽고, 또 영화를 몇 번이나 보며 눈물을 쏟곤 했다. 찌질이라 해도 할 말 없다. 정말 그의 작품들을 접할 때면 난 찌질이가 된다.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완전 창피하다. 그래도 정말 할 수 없다.

흔해 빠진 것이 연애소설이고, 사랑이야기다. 하지만 왜 그것이 흔할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보면, 결국 사람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고, 또 사랑받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통속적인 사랑이야기라고 궁시렁 거리는 인간일수록 정말 가슴 쓰린 사랑의 기억이 있거나, 아님 정말 사랑이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이치카와의 소설엔 특징이 있다. 일단 뚜렷한 악역이 없다. 주인공을 비롯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모두 평범하고, 또한 착하다. 순수하다고 말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들이다. 요즘처럼 흉악무도한 악역들이 난무하는 TV드라마나 영화, 소설들에 비해 그의 소설이 편안한 이유다.

물론 단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다분하기도 하다. 갈등을 일으키는 악역 없이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자칫 아무런 감동도, 감정의 동요도 불어오지 못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디에서나 악역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된다.

때문이다. 이치카와의 소설이 여타 소설들에 비해 한층 빛을 발하는 이유가. 그의 소설엔 악한 캐릭터들이 문제가 아니다. 정말 가능할 것인가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순백의 사랑 이야기 속에, 또는 그 사랑의 가슴 아픈 맺음 속에 이미 독자들은 빠져든다. 때문에 굳이 악역이 등장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물론 실재 등장하지 않고, 언급만 되는 인물 중에는 악역이 있다. 예를 들어 여주인공 시즈루의 계모 정도? 하지만 큰 영향은 미치지 못한다. 이치카와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신뢰가 깔려있다. 그 신뢰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이기에 더욱 애련하고 또한 아름답다.

특이한 피부병으로 인해 항상 야릇한 냄새를 풍기는 연고를 발라야 하는 마코토. 때문에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항상 거리를 둬야 하는 남자. 짝사랑은 그야말로 프로급이지만 아직 여자의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남자. 그리고 시즈루.

성장이 느려 아이처럼 보이고, 또 아이 취급을 받는, 하지만 너무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여자 시즈루. 이들이 만들어가는 어설프고 순수한 사랑은 읽는 이로 하여금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함과 애틋함을 전해준다.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되는 비밀을 간직한 시즈루가, 사랑하는 마코토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모습은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과 먹먹함을 전해준다.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물론 지당한 말이다. 정말 어지럽고 더럽고 슬프고 맥 빠지고 짜증나고 열 받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지극히 지당한 말이다. 세상엔 사랑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사랑해야 할 이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소중히 아끼고 지켜줘야 할 것들이 존재한다.

이미 지나간 후에 우리는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아쉬움과 미안함, 그리고 후회가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되어 준다. 추억이 있기에 사람은 사람이 될 수 있고, 또 살아갈 수 있다.

한 문장도 그냥 버리기 아까운 이치카와의 문체와 ‘이치카와’ 전문 번역가가 되어버린 역자의 세심함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냐 라고 겁만 주는 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소설이다. 물론 세상은 만만치 않다.

하지만 사랑은, 그리움은 그리고 바로 우리 사람들은 더더욱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책을 쥔 순간부터 너무나 예쁜, 그리고 가슴 아픈 사랑에 빠지게 해 준 소설. 새해 첫 책으로 손색이 없다.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단순하고도 가슴 벅찬 깨달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책이다.

유치하지만 눈물 나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권한다. 난 유치한 게 너무 좋다.

「너를 만날 날을 기다리며 나는 하루하루 힘껏 노력 할꺼야. 그리고 또 편지할게. 그러니까 그때까지, 조금만, 안녕이야.

이 세상 누구보다 마코토를 좋아하는

시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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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아워 웨이 On Our Way -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지음, 조원영 옮김 / 에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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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는 분명 미국 역사상 매우 뛰어난 대통령이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민주당은 물론 경배하는 대상이고, 공화당마저 루스벨트의 업적에 대해선 대놓고 부인하지 못한다. 공개적으로 루스벨트를 비난하는 것은 약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할 정도다.

책은 오바마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선물해 화제를 낳은 바 있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 해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가던 대공황의 소용돌이에서 어떻게 국정을 운영했는지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는 책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는 오바마가 이 책을 선물한 이유가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과 이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다는 녹색 뉴딜 정책의 유사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백악관 역시 비슷한 뉘앙스로 말했던 것 같다.

모르겠다. 오바마가 어떤 생각으로 책을 선물했는지는 사실 본인만이 알 터. 하지만 역시나 해몽은 좋았다. 정치라는 것이 항상 자기 편한 대로만 생각하는 이들의 행위 아닌가. 뭐 얼추 오바마가 그런 의도로 주었겠지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크게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어쩌면 오바마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 노하우 따위를 전수하려는 것이 아닌, 진정 국가를 운영하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오바마 대통령 본인부터 생각해야 할 덕목이긴 하다.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쟁 중 노벨평화상을 받은 인물이 아닌가.

이명박 대통령이 오바마가 생각했을 바로 그 부분을 생각하며 책을 읽었을지는 알 수 없다. 솔직히 그 책을 제대로 안 읽었을 것이다에 만 원 건다. 그나마 성의가 있었다면 아래 시켜 요약본을 가져오라고 했을 것이다. 너무나 바쁘신 분이 책을 온전히 읽기는 힘들었을 것 아닌가.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백악관은 헛수고를 한 듯하다. 도덕적 리더십을 말하기엔 이명박 대통령도, 그 측근들도 이미 너무 많이 나갔기 때문이다. 해외 토픽감이 되고도 남을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사태가 벌어진 것은 이미 모두 알고 있다. 범법자에게 “평창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서”라는 해괴한 명분을 주며 사면시킨 이가 바로 이 대통령이다. 거기에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용산참사 유가족들에게 보상해 준다는 절묘한 타이밍. 뭔가 느껴지지 않나. 이건희를 사면시키기 위해 감히 용산 참사 희생자들을 이용한 것이다. 이 절묘하고도 파렴치한 작태를 벌이는 인간들에게 도덕적 리더십을 말하기엔 솔직히 너무 늦지 않았나.

루스벨트는 단순히 대규모 삽질공사를 통해 무너진 미국의 경제를 살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확고한 믿음이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가난한 이들, 힘없는 이들부터 국가가 먼저 돕는다는 원칙이었다. 또한 철저한 법 집행과 도덕적 명분으로 전체 국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다. 이는 4대강, 세종시 등으로 국론을 분열시킨 누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는 어느 한 산업의 발전을 위해 다른 산업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고, 정부의 행동이 옳지 못하다면 언제든지 국민들이 나서서 이를 바꿀 수 있음을 말했다. 국민의 뜻과 상이한 정책을 펼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우리의 정책 변화는 미국 시민의 태도의 변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 민주주의의 성숙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 헌법의 입안자들을 인도했던 기본 원칙들을 충실하게 따랐다는 점이다. 아울러 미 국민 대다수의 전반적인 동의라는 형식을 밟았으며 마지막으로 만약 한순간이라도 그들이 우리가 폐기해버린 과거의 방식으로 되돌아가고자 원할 경우 무기명 투표라는 단순한 방법을 통해 어느 때고 되돌릴 수 있다는 항구적인 약속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인의 “창조한 힘이 아닌 설득의 승리”라는 설파는 시공을 초월해서 옳은 지적이다.」

「저는 언제나 이 나라 국민들에게 정직하게 임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국민들로 하여금 지금의 성장을 또 다른 투기 열풍으로 되돌리는 어리석은 과정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에 기초한, 과잉생산과 높은 가격으로 거래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기대에 국민들이 현혹되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습니다. 그러한 과정은 우리를 잘못된 번영으로 이끌거나, 또 다른 경제적 혼란으로 이끌지도 모릅니다.」

그는 무너진 경제를 살리려 애썼지만, 그렇다고 도덕적 정당성,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박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삶보다 오로지 이익만을 앞세우는 기업 경영자, 경쟁자와 직원들을 일터에서 내몰기 위해 부당한 음모를 꾸미는 경영자, 내부 정보를 동원해서 투기하는 경영자, 허위 정보로 대중을 속여 이들을 보는 경영자”들을 비난했다. 그는 “훌륭한 통치자는 인류를 위해 더 나은 무언가를 꾸준히 찾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한반도에 사는 나의 입장에서는 마냥 경배할 수 있는 이는 아니다. 우리의 분단과 전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연구와 독서가 요구된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있다. 그는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느끼며 국정을 수행한 썩 훌륭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이다. 부인하기 어려운 점이다.

그의 위기 극복 사례는 경제적 위기에 처한 많은 국가 지도자들에게 많은 영감과 적절한 교훈을 준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는 경제 전문가도 대기업 CEO 출신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많은 이들의 소중한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고 절충하여 위기를 이겨나갔다. 돈이 먼저가 아닌 미국 국민들을 우선순위에 두고 정책을 집행해 나갔다. 자신 스스로 도덕적 정당성과 명분을 단단히 한 채 국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했다. 동참을 호소했다.

이게 정말 다른 점이다.

원전을 수주했다고 호들갑이고, 선진국에 당당히 들어섰다고 신났다. 삼성은 정말 염치 없이도 김연아를 앞세워 정초부터 제로 제로 주절거린다. 이건희가 국민들에게, 이명박이 국민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가능성이 제로다. 이 상황에서 루스벨트의 말이 새삼 대단한 것이었다고 느낀다. 이런 마인드를 갖춘 이들이 정말 희박한 우리에겐 그렇다.

「저는 우리가 이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점을 부인하고 싶진 않습니다. 저는 타석에 설 때마다 매번 안타를 기록할 것이라 기대하진 않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다만 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팀 전체를 위해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하는 일입니다.」

다음 대선 때는 어떤 이를 뽑을까 고민하시는 분들. 한 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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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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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작품은 처음이지만, 익히 명성은 알고 있었다. 깐깐하게 남을 잘 칭찬하지 않는 비평가들도 유독 이 작가에 대해서만은 후한 평을 했던 기억이 난다. 도대체 어떤 작가일까 궁금했다.

우리는 모두 외롭다. 그 외로움을 이겨낼 수는 없지만, 저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비껴가거나 혹은 아닌 척 한다. 하지만 결국 모두 외롭고 애처롭다. 그게 사람인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외로움을 겪는 이가 자신의 고통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느냐 이다. 또한 그의 외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다른 이들이 어떤 노력과 접근을 하느냐 이다.

인생에 있어 어떤 커다란 변화, 혹은 충격을 겪은 이들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게 어떤 일이든, 어떤 강도이든. 사람들은 영향을 받게 되고, 그 영향에서 살아가게 된다. 책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그리고 주변의 인물들은 그러한 변화와 충격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눈물겹게 대처한다.

이해한다는 말. 정말 많이 자주 쓰지만, 정작 이해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이해했다고 하는 것일까. 책을 읽으며 내내 느낀 감정이다. “네 맘 이해해”하지만 정작 자신은 타인의 무엇을 이해했다고 하는지 모를 경우가 많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씁쓸한 외로움을 주는 이야기들이 있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기억할 만한 지나침〉,〈모두에게 복된 새해〉,〈내겐 휴가가 필요해〉그리고 〈달로 간 코미디언〉등. 읽는 내내 외로움을 느끼며, 함께 감정의 산을 오르내렸다. 하지만 정작 난 이들의 삶을 이해한 것일까. 이들의 외로움과 아픔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일까. 알 수 없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아련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누군가를 잊어버려야만 기억할 수 있는 시대, 우린 얼마나 간절하게 기억하고 또 기억되려 애쓰며 살까. 사랑받는 다는 기만적인 생각 속에 혼자 얼마나 안도하며 살고 있을까. 사실 자신조차 불안한 그 확신 속에 말이다.

젊은 시절의 추억, 순수했던 사랑 혹은 증오. 이 모든 것들이 아련해지는 시간. 갑자기 수업이 끝난 교실에서 홀로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의 당혹감과 이해할 수 없는 안도감. 그리고 불안함. 어쩌면 삶은 끝나지 않는 종소리를 기다리거나, 혹은 그 반대일지 모른다.

어떤 중압감을 느끼며 소설을 읽을 때가 많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을 나름대로 열심히 찾고 느끼기 위해 애쓰는 편이다. 때문에 때론 좋을 때도 혹은 나쁠 때도 있는 듯하다.  


때론 혼자 마치 큰 보물이라도 찾은 듯 의기양양해지고, 때론 한없이 절망하고 우울해한다. 하지만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들조차 기실 불확실성 속에서 뜬금없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별 의미 없는 일에 정성을 기울인 것은 아닌지.

책 전체에서 느껴지는 외로움과 긍정의 마음. 비껴가지 않고 맞서겠다는 생각 뒤로 전해지는 묵직한 불안감. 혹은 불신. 그것마저 없으면 사실 사람은, 삶은 너무나 재미없는 꼴이 될 것이다. 때문에 유쾌했고, 씁쓸했으며, 눈물겨웠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으니, 작가로서는 어리석은 독자를 하나 더 만든 셈이다. 하지만 끝끝내 어리석지만은 아닐 것이니, 조금은 더 나은 글들을 기대해본다. 뭐 감히 건방지게 주문하는 건 아니다. 다만 더 외롭고 더 힘들더라도 힘을 놓지 않기 위함이다. 끈을 쥐고 끝내 울고 싶기 때문이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는 이자크 디네센의 말이 절실히 다가오는 작품이다. 만족하며, 조심스럽게 읽어나간 책이다.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가 오래도록 살아 노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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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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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자연스러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 바로 늙음이다. 시간이라는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고,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도 온전히 사람의 시각으로만 보는 것일 뿐, 사실 시간은 그대로다. 다만 인간이 태어나 성장하다 결국 정점을 찍고 다시 늙어가는 것. 그러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명백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지구상 최고의 어리석은 동물답게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니다. 사실 인간이 이토록 어리석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인류가 지구상에 한 켠에서 삶을 영위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여왔고, 늙음을 긍정해왔다. 특히 동양이 죽음에 대해 초연했다고들 하는데, 서구라도 다를 것은 없었다. 누구나 죽음이 온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초연히 맞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도대체 자신이 늙어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온갖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해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려, 덜 늙어 보이려 애쓴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추하게 늙고 죽는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에브리맨》은 한 평범한 남자의 삶을 다뤘다. 특이할 것도 없고, 위대할 것도 없는. 아니 조금은 불쌍하고 이기적인 삶을 살았던 남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짧은 이야기 속에 남자의 모든 것을 살펴볼 여지는 충분치 않다. 하지만 역시나 명백한 사실은 그도 늙어 죽었다는 사실이다.

태어나 사랑을 하고 치열하게 일했으며, 결국 늙고 병들어 죽어간 남자의 이야기. 짧은 이야기가 적지 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아마도 평범함을 무시하는 이 시대에 대한 조용한 경고의 목소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남자의 아버지는 평생 부인과 두 아들을 위해 최선의 삶을 살고 죽어갔다. 두 아들을 위해서 못할 일이 없었으며, 평생을 근면과 성실, 신용으로 타인에게 즐거움을 주고 살아갔다. 그리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남자 역시 열심히 일했다. 그가 죽기 얼마 전 옛 상사의 부고를 전해 듣고, 그의 부인과 옛 동료들에게 전화하는 장면은 짧지만 묵직한 감동을 전해준다. 젊은 날 치열하게 함께 했던 이들의 허망한 노년의 모습. 서로 격려하며 설사 내일 당장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친구와의 점심 약속. 그들의 삶이 결코 허망하지 않았음을 위로하는 모습은 눈물겹다.

남자는 결혼을 세 번, 이혼 역시 같은 수로 경험했다. 때론 사랑, 때론 남자의 본능적인 정욕으로 일어난 일들.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결국 자신마저 그 상처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아니 우주에 완전한 것은 없다. 그는 자신의 삶을 상처로 얼룩지게 만든 정욕을 죽는 그 순간까지 억제하지 못한다. 자신의 집 앞을 매일같이 지나가는 젊은 여인에게 수작을 거는 장면은 때문에 눈물겹고, 감동적이다. 땀으로 몸이 축축한 “완벽하게 균형이 잡힌 아주 작은 생물체”에 또 다시 정욕을 느낀 늙은이. 그의 수작이 거절당했을 때 느낀 당혹감과 안도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죄악 중 하나는 인간들이 생산하는 물건이 결국 인간을 지배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 또 하나 추가할 것이 바로 인간 자체가 상품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늙고 병들면 고장 난 기계 취급을 받는다. 노인 한 명의 죽음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말은 책 속에서나 존재한다. 노인은 그저 빨리 살라져야 할 구식 가전제품에 지나지 않는다. 내 말이 너무 매정하거나 싸가지 없다고 느끼는 분들은 그나마 다행이고, 감사하다. 하지만 오늘도 지하철 1호선 종로 3가역은 구식 제품들로 넘쳐나고, 그들은 갈 곳을 몰라 서성인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라 대학살”이라는 남자의 말은 바로 지금을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하는 말과 같다. 우리는 대학살의 주범이 되어가고 있고, 결국 그 피해자가 될 운명이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라고 우려의 목소리는 내는 것은 결국 아이를 많이 낳고 늙은 것들은 어서 어서 가라는 말과 다름이 없게 들린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들린다. 그들을 어떻게 포용하고 함께 나아갈 것인가 라는 절박함보다는 어떻게 치울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인다.

결국 늙어간다는 것이 미덕이 아닌 민폐가 되어버린 세상에 희망은 찾을 수 없다. 노인들은 더욱 고립되어 가고 결국 폭발할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우린 종로거리를 가득 메운 노인들의 피켓 시위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할 것이다.

여러모로 《에브리맨》은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짧은 분량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작가의 역량이다. 아울러 이 시대의 아픔이기도 하다. 늙어감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그것이 지혜가 되고 삶의 스승이 되며, 앞날을 비추는 등대가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 노인들은 늙어감을 저주하며, 미래를 비관하며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반문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어린 아이들의 철없는, 혹은 혈기왕성함으로 일어난 각종 사건 사고들은 매일 터지지만, 노인이 관련된 성적 사건들은 그야말로 특종감이다. 노인이라고 사랑을 할 수 없을까. 그들이라고 정욕을 느낄 수 없을까. 이기적이고 오만하고 게다가 가식적이기까지 한 지금의 사회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노인들의 성범죄가 문제화되지 않는 것이 신기한 일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만큼 우리 노인들은 절제하고 참아온 것일 수도 있지만, 이를 또 다른 배출구를 통해 풀어주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고 하지만, 역시나 동물이다. 동물이라는 점이 수치스러운 일은 아니다. 지극히 당연하고, 또 엄연한 사실이다. 이 사실을 망각한 채 우리를 고귀한 신성체나, 혹은 상품으로 전락시킨다면 일단 웃기지도 않은 일일뿐더러, 그 후과도 무시무시할 것이다. 모든 연령층의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처지에서 삶을, 사회를, 그리고 죽음을 바라보지 않은 사회는 다시 말하지만 희망이 없다.

짧지만 묵직한 책이다. 늙어감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읽지 말 것을 권한다. 하지만 늙어감의 소중함을 알고자 하는 이들은 또한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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