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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마돈나
자케스 음다 지음, 이명혜 옮김 / 검둥소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월드컵 때문이다. 월드컵이 과연 ‘전 세계인’의 축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2002년을 기점으로 우리도 월드컵에 대한 상당한 관심과 열광을 드러내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처음 열리는 월드컵이니만큼 남아공에 쏠리는 관심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벌써부터 치안상의 위험을 강조하는 언론들도 있고, 남아공이 어떤 나라인가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행복한 마돈나》는 1971년 당시 백인이 통치하고 있던 남아공의 프리 주 엑셀시오에서 시민 19명이 인종차별 정책의 일환인 백인과 흑인 간의 성행위를 금지하는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기소된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남아공의 그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에서 자유와 민주화를 향한 남아공 흑인들의 투쟁과 눈물이 담겨진 작품이다.
인종차별. 이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추악한 발명품 중 하나다. 백인이 여타 인종들에 비해 선천적으로, 생태학적으로 우월하다는 쓰레기 같은 이론을 내세워 유럽, 나아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인디언, 아프리카, 아시아 인종들을 탄압했으며 살육했고, 강간했다. 서구 열강의 자랑스러운 제국주의 역사가 타 민족에 대한 강간과 살육의 역사에 다름 아닌 이유다.
피부색이 다른 인종끼리는 성행위를 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로 남아공의 백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했으며, ‘고귀한 피’를 지키려 했다.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만을 서구가 저지른 인종 학살의 전부인양 매도하고 있는 유럽, 그리고 서구는 정작 자신들이 지금껏 저질러 온 더 추악한 만행에 대해선 침묵한다. 모든 죄를 독일과 히틀러에 돌리면서.
《행복한 마돈나》는 때문에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저자의 탁월한 문장력과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아프리카 전통 문화에 대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쓰라린 이유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극악한 범죄는 차별임을 이 책은 너무나 아름답고도 슬프게 담아낸다. 아름답다는 단어가 무참해지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서구 열강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채우기 위해 과학적, 종교적 외피를 만들어냈다. “신이 우리에게 인디언, 흑인들을 지배하라고 계시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은, 정작 그 시대에는 전혀 허무맹랑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흑인은 노예, 상품일 뿐이었으며, 인디언은 다만 쓸어버려야 할 귀찮은 것들에 불과했다.
문제는 지금 이 시대에, 흑인이 미국의 대통령이 된 지금 이 시대에는 이러한 차별이 사라졌느냐하는 점이다. 아울러 백인이 아닌 우리들의 인식 속에는 이러한 차별이 없느냐 하는 점이다. 다문화 가정이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이주 노동자들을 어려움 없이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바로 이 순간. 우리들의 마음속엔 또 다른 “백인 우월주의”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일본은 자신들이 아시아의 맹주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뼛속 깊이 서구를 동경하고 사랑했다. 여전히 거기엔 변함이 없다. 우리가 경계해야 한다고 하는, 그러나 이미 너무도 깊숙이 들어와 버린 왜색문화는 기실 일본식 서양문화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도 모르게, 혹은 알면서도 ‘한국식 서양문화’를 만들어 왔다. 그것도 매우 줄기차게.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그 수가 끝이 없다. 하지만 그 수많은 논리들 속에 진정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다. 인간은 인간 자체로 존엄성을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망각할 때 우리는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게 되고, 행복을 버리게 된다.
어쩌면 2010년 남아공을 바라보는 시선이 ‘축구공’만이어선 안 될 듯하다. 진정 월드컵이 세계인의 축제가 되려면 세계 모든 이들이 즐길 수 있는 마당을 만들어야 한다.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을 확인하는 순간. 인류는 비로소 한 단계 전진했다고 할 수 있다.
행복한 마돈나 니키의 삶이 더없이 큰 고통과 상처로 얼룩졌지만, 그의 혼혈 딸 포피의 투쟁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다. 우리는 모두가 인간으로 태어났다. 아이티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