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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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자연스러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 바로 늙음이다. 시간이라는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고,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도 온전히 사람의 시각으로만 보는 것일 뿐, 사실 시간은 그대로다. 다만 인간이 태어나 성장하다 결국 정점을 찍고 다시 늙어가는 것. 그러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명백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지구상 최고의 어리석은 동물답게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니다. 사실 인간이 이토록 어리석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인류가 지구상에 한 켠에서 삶을 영위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여왔고, 늙음을 긍정해왔다. 특히 동양이 죽음에 대해 초연했다고들 하는데, 서구라도 다를 것은 없었다. 누구나 죽음이 온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초연히 맞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도대체 자신이 늙어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온갖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해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려, 덜 늙어 보이려 애쓴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추하게 늙고 죽는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에브리맨》은 한 평범한 남자의 삶을 다뤘다. 특이할 것도 없고, 위대할 것도 없는. 아니 조금은 불쌍하고 이기적인 삶을 살았던 남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짧은 이야기 속에 남자의 모든 것을 살펴볼 여지는 충분치 않다. 하지만 역시나 명백한 사실은 그도 늙어 죽었다는 사실이다.

태어나 사랑을 하고 치열하게 일했으며, 결국 늙고 병들어 죽어간 남자의 이야기. 짧은 이야기가 적지 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아마도 평범함을 무시하는 이 시대에 대한 조용한 경고의 목소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남자의 아버지는 평생 부인과 두 아들을 위해 최선의 삶을 살고 죽어갔다. 두 아들을 위해서 못할 일이 없었으며, 평생을 근면과 성실, 신용으로 타인에게 즐거움을 주고 살아갔다. 그리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남자 역시 열심히 일했다. 그가 죽기 얼마 전 옛 상사의 부고를 전해 듣고, 그의 부인과 옛 동료들에게 전화하는 장면은 짧지만 묵직한 감동을 전해준다. 젊은 날 치열하게 함께 했던 이들의 허망한 노년의 모습. 서로 격려하며 설사 내일 당장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친구와의 점심 약속. 그들의 삶이 결코 허망하지 않았음을 위로하는 모습은 눈물겹다.

남자는 결혼을 세 번, 이혼 역시 같은 수로 경험했다. 때론 사랑, 때론 남자의 본능적인 정욕으로 일어난 일들.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결국 자신마저 그 상처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아니 우주에 완전한 것은 없다. 그는 자신의 삶을 상처로 얼룩지게 만든 정욕을 죽는 그 순간까지 억제하지 못한다. 자신의 집 앞을 매일같이 지나가는 젊은 여인에게 수작을 거는 장면은 때문에 눈물겹고, 감동적이다. 땀으로 몸이 축축한 “완벽하게 균형이 잡힌 아주 작은 생물체”에 또 다시 정욕을 느낀 늙은이. 그의 수작이 거절당했을 때 느낀 당혹감과 안도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죄악 중 하나는 인간들이 생산하는 물건이 결국 인간을 지배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 또 하나 추가할 것이 바로 인간 자체가 상품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늙고 병들면 고장 난 기계 취급을 받는다. 노인 한 명의 죽음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말은 책 속에서나 존재한다. 노인은 그저 빨리 살라져야 할 구식 가전제품에 지나지 않는다. 내 말이 너무 매정하거나 싸가지 없다고 느끼는 분들은 그나마 다행이고, 감사하다. 하지만 오늘도 지하철 1호선 종로 3가역은 구식 제품들로 넘쳐나고, 그들은 갈 곳을 몰라 서성인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라 대학살”이라는 남자의 말은 바로 지금을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하는 말과 같다. 우리는 대학살의 주범이 되어가고 있고, 결국 그 피해자가 될 운명이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라고 우려의 목소리는 내는 것은 결국 아이를 많이 낳고 늙은 것들은 어서 어서 가라는 말과 다름이 없게 들린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들린다. 그들을 어떻게 포용하고 함께 나아갈 것인가 라는 절박함보다는 어떻게 치울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인다.

결국 늙어간다는 것이 미덕이 아닌 민폐가 되어버린 세상에 희망은 찾을 수 없다. 노인들은 더욱 고립되어 가고 결국 폭발할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우린 종로거리를 가득 메운 노인들의 피켓 시위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할 것이다.

여러모로 《에브리맨》은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짧은 분량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작가의 역량이다. 아울러 이 시대의 아픔이기도 하다. 늙어감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그것이 지혜가 되고 삶의 스승이 되며, 앞날을 비추는 등대가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 노인들은 늙어감을 저주하며, 미래를 비관하며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반문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어린 아이들의 철없는, 혹은 혈기왕성함으로 일어난 각종 사건 사고들은 매일 터지지만, 노인이 관련된 성적 사건들은 그야말로 특종감이다. 노인이라고 사랑을 할 수 없을까. 그들이라고 정욕을 느낄 수 없을까. 이기적이고 오만하고 게다가 가식적이기까지 한 지금의 사회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노인들의 성범죄가 문제화되지 않는 것이 신기한 일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만큼 우리 노인들은 절제하고 참아온 것일 수도 있지만, 이를 또 다른 배출구를 통해 풀어주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고 하지만, 역시나 동물이다. 동물이라는 점이 수치스러운 일은 아니다. 지극히 당연하고, 또 엄연한 사실이다. 이 사실을 망각한 채 우리를 고귀한 신성체나, 혹은 상품으로 전락시킨다면 일단 웃기지도 않은 일일뿐더러, 그 후과도 무시무시할 것이다. 모든 연령층의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처지에서 삶을, 사회를, 그리고 죽음을 바라보지 않은 사회는 다시 말하지만 희망이 없다.

짧지만 묵직한 책이다. 늙어감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읽지 말 것을 권한다. 하지만 늙어감의 소중함을 알고자 하는 이들은 또한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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