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녹색평론》을 통해 국내에도 익히 알려진 저자의 책이다. 경제성장, 민주주의, 평화, 지속가능한 문명, 미국의 패권주의 등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은 대부분 매우 중요하면서도 당연시되어 온 개념들이다. 때문에 그의 주장이 낯설거나 조금은 거부감이 들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사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모든 것을 세뇌 받아 온 측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시기에 특히 많이 들린 이야기가 ‘지속가능한 발전’이었다. 말 그대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할 게 없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거기에 경제를 넣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니 적어도 난 거기부터 뭔가 막힌다고 느껴왔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루어왔던 경제성장 방식으로, 그 형태로 발전이 가능하다? 난 재앙을 떠올렸다. 지금까지의 방법으로 경제성장이 추구된다면, 그것이 지속가능하도록 만들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끔찍한 재앙이 일어날 것인가. 상상만 해도 어둡다.

고도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온 일본, 그리고 그러한 일본을 그대로 따라해 온 한국. 우리는 고도경제성장 시기를 밟아오며 엄청난 생산과 소비의 증대를 통해 엄청난 물량적 풍요와 낭비에 근거한 소비주의 문화를 만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인간다움은 사라지고, 존엄성은 훼손당했으며, 재앙과도 같은 생태적 붕괴를 가져왔다.

책을 옮긴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은 “우리는 경제성장을 통해서, 가난에서 벗어나고, 고용문제를 해결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문명된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을 의심해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가슴 쓰린 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오직 경제가 성장할 수만 있다면, 솔직히 말해 돈이 된다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아왔다.

베트남 전쟁에 34만 명을 파병한 한국. 명분은 자유주의를 수호한다는 것이었지만, 기실 한국의 배를 찌우기 위함이었다. “한국군이 지나간 자리엔 풀도 자라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베트콩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던 주월 한국군. 우리는 “우리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같은 분단국가의 전쟁에 뛰어들어 살육을 자행했다. 
 

 

이라크에도 우리는 군대를 파견했다. 역시 자유주의 수호,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석유, 폐허가 된 이라크 재건을 위한 경제 복구 동참이 주 목표였다. 미국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뤄진 것이라 변명해도 구차할 뿐이다.

언론은, 말 좀 한다는 이들은 국민들의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하곤 한다. 천박한 자본주의의 노예라고 욕한다. 하지만 정작 국민들을 그렇게 만들어온, 그 길로 밀다시피 끌어온 주체가 누구였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언론은 그야말로 파렴치하게도 모든 탓을 국민들에게 돌린다. 펜을 들되 정신으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풍요롭다는 단어는 분명 이 땅에서는 잘못 이해되고 있다. 물질적 측면, 물질생활의 풍족이 전부인양 받아들여진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다. OECD에 가입하고, G20에 들어가도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양극화는 심화되고, 대학을 나와도 할 일 없이 빈둥거려야 하는 잉여인간들은 늘어간다. 그들을 잉여의 상태로 만들어버린 세력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충분히 경쟁할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선, 사회에선 노무현도, 이명박도 다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고, 돈으로 환산하는 사회에서 건강한 개혁, 건강한 사회 변화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엔, 경제적 가치로 환산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어쩌면 그 부분들이 있기에 우리가 인간이라고,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인간을 인간이 아닌 상품 생산기계나 소비기계로 전락시킨다. 그렇다고 예전 영국 아저씨들처럼 기계를 부숴버릴 수도 없는 일이다. 당장 구속감이다.

돈 많은 노예가 되어가는 우리. 점점 더 정신적 빈곤과 물질적 풍요를 맞바꾸고 있는 우리. 해답은 의외로 간단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번 찌든 생각과 편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길들여진 우리는 쉽사리 늪을 빠져나올 수 없다.

저자는 지금의 경제성장, 경제성장을 바라보는 이들의 인식을 “타이타닉 현실주의”라고 말한다. 앞에 거대한 빙하가 있음에도 그대로 달려가고 있다. 그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이미 중독된 자본주의의 습성은 쉽사리 깨지지 않는다.

‘가난’과 ‘부유함’‘잘 사는 것’과 ‘못 사는 것’에 대한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 우리가 보기엔 한 없이 가난한 불행한 나라일 뿐인 라오스의 국민들은 그러나 가장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미국, 일본 등 잘 산다고 떠드는 나라의 국민들이 과연 얼마나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경제 11위인 한국에 사는 당신은 과연 세계에서 11번째로 행복한가?

길지 않은 분량에 충실한 자료와 객관성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은 한 번쯤 나의 인식과 습성을 돌아보게 만든다. 단 보름만 전기 공급이 멈추어도, 결국 농촌을 약탈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도시에 살고 있는 나. 그 잘난 빌딩숲 사이에서 항상 갈 곳 몰라 서성이는 나.

반성하고 성찰하고 느껴야 할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식 E Season 1 - EBS 지식채널e가 전해주던 5분의 감동을 이제 음악으로 만난다!
여러 아티스트 (Various Artists) 노래 / 소니뮤직(SonyMusic)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역시나 느린 녀석이다. 지금껏 5권까지 나온 책을 이제야 펼쳤다. 그동안 TV로만 봐왔던 ‘e’를 활자로, 그림으로 보는 것 역시 큰 감동을 준다. 짧은 시간 동안 결코 짧지 않은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것. 대단한 노력의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생각을 하는 동물이다. 그 생각이 온전히 생존만을 위함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느낄 수 있음에 행복해야 하지만 때로는 느낄 수 있어 한 없이 고통스럽고 외롭기도 하다.

모두 40가지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1권은 ‘e’의 시작이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 혹은 알고는 있었지만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잔잔히 담아낸다. 그 사이 우리의 앎은 성찰로 바뀌게 되고 타인을 바라보는 눈과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도 바뀌게 됨을 알 수 있다.

화려함 뒤로 감춰져 있는 지독한 착취의 굴레, 인간이 만들어낸 지독한 차별과 편견으로 인해 고통받아온 또 다른 인간.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어루만져주려는 또 다른 인간의 몸짓.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진정 필요한 것은 관심과 사랑임을 새삼스럽게 말해주는 책이다.

지금 우리는 영락없이 미친 세상에 살고 있다. 내가 미친 세상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겉과 속이 다른 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라고 떠벌이는 이들 중, 진정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이웃을 아끼며 주변을 돌아보는 이들은 찾기 힘들다. 겉모습에 치중한 이들은, 정작 우리 안의 고통은 외면해버리기 일쑤다. 그들에게 화려함과 즐거움은 한정적이다.

내가 봐도 순진한 구석이 있다. 아무래도 그런 듯하다. 누가 봐도 잘못된 것을 끝까지 잘된 것이라 우기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이지 이해가 안 된다. 그들도 상식이 있고, 어느 정도 배웠다고 자부하는 이들일 텐데. 왜 저렇게 살까 생각하면 이해가 되질 않는다. 아무리 기득권이요, 부와 명예요 해도 도대체 양심이라는 것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한다면, 끝까지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고 싸워온 인간들은 처자식 생각 안하는 철면피요, 철없는 군상인가. 일제 시기 독립운동 했던 이들은 죄다 어리석은 바보들에 불과한 것일까. 끝까지 시청을 지켜 죽음으로 민주주의를 외친 광주 시민들은 죄다 바보들이었을까.

여전히 난 어리석은 구석이 있다. 누가 봐도 다수에게 해로운 일들을 여지없이 정의요 경쟁력이요 국익이요 떠들며 관철시키려 하는 인간들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찰나의 명예, 부를 위해 저렇게 큰 죄악을 저지른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정녕 그들은 일신의 부귀와 안녕을 위해 이웃들에게 고통과 눈물을 강요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녕 자신이 저지르는 일들이 애국이요, 이웃사랑이라고 느끼기 때문일까.

무관심이 가장 큰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한나라당을 찍던 독재자를 찍던 투표하는 것이 적어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북한에 대해 극단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적어도 아예 무관심한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성찰하고 울어야 한다. 눈물이 창피해서, 아픈 게 두려워서 머뭇거릴 때가 아니다. 그 역시 무관심이다.

라인홀트 니부어는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을, 바꿔야 하는 일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더불어 이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달라고 신에게 간청했다. 비록 신을 믿지 않는다 해도 함께 간청한다. 오직 이 세 가지만 인간에게 허락하셔도 인간은 적어도 온전히 인간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전쟁을 하고 살육을 하고 강간을 저질러온 인간이다. 인류 역사 이래 평화로웠던 시간은 단 8%. 5000년의 역사 속에서 단 8%였다. 하지만 우리는 1941년 크리스마스이브의 기적을 가지고 있다. 평화는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어찌 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강요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영원한 베트남의 ‘호 아저씨’ 호치민은 “민중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혁명적인 이론이 될 수 없다.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제대로 된 혁명을 해왔으며, 꿈꿔왔을까.

생각하게 만들고 깨우치게 만들고 눈물을 떨구게 만드는 것이 책의 힘이자 임무이다. ‘지식채널e’는 때문에 정당한 책이다. 때문에 책다운 책이다. 브라운관을 통해 느낀 감동과 뼈저린 성찰. 그리고 분노와 어찔할 줄 모르게 되는 부끄러움.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적어도 이 정권이 지 잘났다고 떠드는 이 시간 동안만큼은 ‘지식채널e’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이 프로그램을 그렇게 싫어한다고 하는 이들이 난감하게 말이다. 훌륭한 프로그램을 위해 그야말로 하루 23시간 55분을 헌신하는 프로듀서와 작가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철로 된 책들 - 장석주의 책읽기 1, 반양장본
장석주 지음 / 바움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시인이자 장서가로 잘 알려져 있는 저자의 책읽기 첫 번째 책이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면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곤 한다. 한 자 한 자 한 페이지씩 정성을 기울여 읽었을 그의 책들을 몰래 훔쳐본다는 느낌이랄까. 온전한 그의 생각에 도달할 수는 없어도 덕분에 많은 책들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감사한 책이다. 
 

 

재작년이었나. 한 학생이 일 년에 무려 천 권이라는 책을 읽고, 그것을 책으로 낸 바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책을 슬쩍 살펴보고 씁쓸하게 웃는 기억이 있다. 읽은 책들도 그 깊이가 만만치 않은 책들이 많았고, 저자가 써내려간 평가랄까. 서평이랄까. 아무튼 영 볼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쉽지 않은 책들을 일 년이란 짧은 시간에 천 권이나 읽었다니. 과연 책 한 권 한 권을 곰곰이 제대로 읽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왜 꼭 일 년에 천 권이라는 기준이랄까. 목표를 정하고 쫓기듯 책을 읽어야만 했을까.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책은 그야말로 정성을 다해, 온 힘을 다해 읽어나가야 한다. 내 기준은 그렇다. 만화책을 우습게 보는 건 절대 아니지만, 만화책이라 할지라도 정독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때문에 천 권을 일 년에 읽는다는 것은 내 기준에서는 적어도 불가능이거나 책을 온전히 읽은 것이 아니다.

《강철로 된 책들》의 저자 역시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는다고 알려져 있다. 책 속에 소개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저자는 한 해에 책값으로 오백만 원 정도를 지출하고, 시집과 정기간행물을 제외하고 삼백여 종의 책을 한 해에 읽는다. 한 해에 대략 칠백 권에서 천 권 정도가 새로 그의 서가를 채운다고 한다. 어마어마하다. 나 같은 어설픈 독서가가 보기엔 경이로울 정도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책을 대충 읽지 않는 듯하다. 물론 모든 책을 같은 기준으로 읽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는 책에 대한 일정한 ‘예의’를 지키는 것 같다. 때문에 안심이 되고 믿음직스럽다. 그가 써내려간 서평들은 결코 쉽지 않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고, 허투루 쓴 글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진정한 독서가만이 가능한 모습이다.

책을 통해 다양한 책들을 접한다. 책 한 권을 읽으면 그 책과 더불어 읽고 싶은 책들이 반드시 생겨난다. 이 과정 또한 책 읽는 사람의 빼놓을 수 없는 기쁨 중 하나다. 《강철로 된 책들》처럼 책을 소개하는 책이면 그 수고랄까, 기쁨을 덜어주기도 한다. 저자는 책 한 권을 소개한 후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을 소개한다. 또 다른 책을 찾아나가는 기쁨을 빼앗은 것 같아 아쉽기도 하지만, 사실 편하기도 하다.

매일 매일 엄청난 수의 책이 태어난다. 그러다 채 알려지지도 못한 채 사라지는 ‘좋은 책’들도 얼마나 많을까. 홍보의 부족, 역으로 생각하면 일부 대형출판사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 홍보하는 책들에 묻혀 사라지는 책들. 하지만 눈이 밝은 독서가들은 반드시 그런 책을 찾아내고야 만다. 내 눈이 어서 밝아져 숨어있는 보물을 더 잘 찾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여전히 책을 읽는다. 하지만 책을 읽고 싶지 않다. 책을 느끼고 싶다. 그 안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며 숨 쉬고 싶다. 여전히 짧은 생각과 일천한 지식, 턱없이 부족한 상식과 치우친 아집으로 책을 읽어나가는데 일방적이고, 또 편협하다. 솔직히 인정하는 내 지금의 모습이다.

하지만 저자와 같은 고수들이 친절히 소개하는 이런 책들을 통해, 또 내 스스로의 부단한 탐험과 노력을 통해 점차 눈이 깨어져 가리라 믿어본다. 희망은 가지고 살아야 하니까.

소중한 책들을 즐거운 문장으로 소개해 준 저자에게 감사한다. 저자가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밝혀도 하나도 밉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누누이 말하지만 저자 같은 보수주의자는 언제나 환영이다.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든다. 내 삶에 있어 적지 않은 기쁨과 감동을 전해주는 세상에서 가장 편리하고 저렴한 쾌락. 난 책 읽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저자에게 감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2007년에 책이 나왔으니 어느 새 시간이 꽤 흘렀다. 그 사이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88만원 세대’라는 단어가 일종의 고유어가 되었고, 적어도 지금 10대, 20대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전보다는 그나마 많은 이들이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책은 현재 진행형이다. 책이 담고 있는 고민과 절망은 여전히 젊음을 희미하게 만들고 있다. 최근 등록금 상환제를 정부에서 실시했지만, 3천만 원 빌려 9천만 원으로 갚아야 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니, 왠지 정부가 악덕 고리대금업자로 보인다. 대학생을 상대로 돈 놀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온갖 생색은 다 내면서 말이다.

저자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버린 이 책을 꽤 많은 이들이 읽었으리라 생각한다. 때문에 여기에 그 내용을 보탤 필요는 없어 보인다. 간단히 말해 기성세대들에게 제 몫을 모두 빼앗겨 버린 지금의 10대, 20대들이 과연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 책이다.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고작 4년이 흘렀을 뿐이다. 여전히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몫은커녕 뒤 세대의 몫까지 땡겨 쓰고 있으면서도 토해내지 않는다. 거기다 이들에 보다 나은 삶과 ‘꿈 꿀 수 있는’여지마저 신나게 없애고 있는 중이다. 그들에겐 그들 나름대로의 논리와 명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삶의 막다른 벽에서 신음하고 있는 세대들에겐 배부른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4년제 대학을 나와도 결국 대부분 비정규직이 되어야 하고, 평균 88만원의 돈으로 살아가야 하는 젊은이들. 이들에게 보다 큰 꿈을, 비전을, 야망을 요구하는 이들은 도둑이다. 아니 강탈자이다. 최소한의 판을 만들어주지 않고 일방적인 경쟁만을 강요하는 현 사회의 적나라한 몰염치를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페어플레이를 요구하는 것은 코미디다.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결국 먼저 개미지옥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협동과 연대, 이웃과 타인에 대한 관심, 배려는 실종된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결국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타인을 밟고, 죽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협동은 카르텔로 변질되고, 배려는 일 년에 한 번 씩 적선하듯 던지는 불우이웃 돕기 성금이면 된다. 사실 그것도 아깝다.

이 책의 씁쓸한 성공 이후 많은 관련 서적들이 출간되었고, 비판과 찬사가 교차했다. 젊은이들을 위한 새로운 판짜기를 주장하는 이들부터, 여전히 ‘개인’의 노력과 경쟁에 중요성을 강조하는 따위의 책들도 줄을 이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충분치 않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청년실업이 극에 달하고, 실업급여를 수령 받는 이들이 백만을 넘는 지금, 새로운 변화의 절박성을 인식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정작 기득권을 쥔 세력들의 인식은 확고하게 멈춰있는 현실. 과연 20대는 지금의 상황에서 토플 책을 던져 버리고 바리케이드를 칠 수 있을까. 짱돌을 쥘 힘이나마 남아있을까.

연대와 협동의 가치를 분쇄시켜버리는 것이 기득권이 목숨 걸고 해온 일이고, 지금도 목숨 걸고 하고 있는 일이다. 그들의 그런 노력 끝에 지금의 젊은이들은 힘겨운 각개전투를 진행 중이다. 옆에서 전우들이 픽픽 나자빠져 나가도 돌아볼 겨를 없이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힘을 모아라!’‘연대만이 살길이다’라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그들에겐 한낱 개소리일 뿐이다. 판을 만들어주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당장 비정상적인 사회 구조를 뒤엎겠다는 생각이 충만해야 한다. 당장 없앨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불가능은 유감스럽지만 존재한다. 하지만 희망은 다른 문제다. 그것이 한낱 위로와 격려의 자위수단이 아닌, 한 발씩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도록 형태를 갖추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거기에 힘을 실어야 하고, 그런 형태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 짱돌을 던지라고만 할 수는 없다. 대신 잡혀갈 건가? 음. 이건 좀 유치하다.

중요한 것은 판을 짜주고, 바리케이드가 어디에 있는지, 짱돌을 어떻게 쥐어야 하는지, 어느 순간 어디에 대고 던져야 하는지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바보냐고? 그런 걸 일일이 가르쳐줘야 하냐고? 일단 닥치시라. 당신은 앞서 말한 것들의 정답을 알고 있는가? 정확히 인식하며 살고 있는가?

특정 대학의 특정 과, 특정 고교의 특정 지역 출신이 사회를 장악하고, 기득권을 쥐고 있으며, 대를 이어 부와 명예를 세습한다. 북한 욕할 것 하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야말로 몸뚱어리 하나로 버텨야 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체적 이야기다. 현실적 가능성이다. 그리고 포기할 수 없는 꿈. 정상적인, 상식적인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에 대한 믿음이다.

그 믿음을 주는 작업은 아무리 서둘러도 이르지 않다. 되돌릴 수 없는 파국을 막기 위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아니, 움직여야 할 시점이다.

《88만원 세대》는 때문에 시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늑대 - 제6회 채만식문학상, 제10회 무영문학상 수상작
전성태 지음 / 창비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어느 새 글을 쓰며 생계를 유지한지 10년이 되어 간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시작한 글쓰기는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른 채 시간만 잡아먹었다. 늘어나는 건 염치없음과 부적절한 배짱뿐이니 여전히 제대로 사람 구실하지 못하며 살고 있다.

때문에 글을 잘 쓰는 이들은 영원한 동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직업상 작가보다는 학자들을 많이 만나게 되지만, 정작 존경의 대상은 거의 작가들이다. 그들의 글을 읽으며 때로는 감탄, 때로는 부러움, 때로는 시기를 반복하곤 한다.

전성태의 《늑대》는 오랜 만에 만난 친구와 걸쭉하게 한 잔 걸친 뒤, 풀려진 눈으로 대로를 활보하다 눈에 들어온 서점에 무작정 들어가, 무작위로 고른 책이었다. 작가에겐 참으로 미안한 소리가 아닐 수 없는데, 사실 전에는 작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알코올에 축축이 젖은 내 혼미한 정신이 집어든 《늑대》. 내 안에 또 다른 늑대가 살고 있었을까. 순전히 제목을 보고 집어 들었을 책. 난 그렇게 쑥스러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저자는 이미 “완벽에 가까운 문장과 구성을 추구하고 사회적 현실에 깊게 뿌리를 내리면서 독특한 작품세계를 일궈온”이로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매향》《국경을 넘는 일》등의 작품으로 주목받는 작가를 넘어 새로운 소설 세계를 일구고 있는 이였다.

그가 6개월여의 몽골 체험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작품이 책이 절반을 넘고 있다. 10편의 소설 중 6편이 몽골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온전히 몽골의 것만은 아니다. 울란바토르의 한 북한 식당을 통해 분단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기도 하고, 〈강을 건너는 사람들〉에서는 탈북자들의 처절한 삶이 날 것 그대로 보여 진다. 물론 이 작품은 몽골을 배경으로 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동안 작품들이 통해 ‘경계 넘기’에 대한 고뇌를 보여줬다고 한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국경을 넘어야 하는 사람들, 기존의 정체성을 벗어버려야 하는 이들이 겪는 혼란과 고통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물리적 국경이 아닌 정체성에 천착한 그의 소설들을 때문에 읽는 이에게 적지 않은 인식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었다고 한다.

《늑대》 역시 단순한 몽골 체험기, 혹은 북한 이해하기에 차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삶이라지만 그의 소설 속에 펼쳐지는 웃지 못 할 일들이 엄연한 현실임을 자각하는 순간, 독자는 이미 또 다른 인식의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웃기지도 않는 것이 우리의 삶임을, 저자는 특유의 문장과 탁월한 묘사로 그려낸다.

〈목란식당〉은 북의 식당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 편의 코미디다. 멀리 몽골까지 찾아온 한국 교회의 목사 일행은 식당의 종업원들을 마치 ‘악마’대하듯 행동한다. 고작 냉면 한 그릇에 담겨진 이데올로기의 폭력성. 단순한 식당을 이념 투쟁의 장으로 인식하는 목사의 행동 앞에서 독자들은 실소와 함께 묵직한 쓰라림을 경험하게 된다. 기실 그것은 목사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폭력성과 경직성에 다름 아니었다. 식당은 그냥 식당을 뿐이다.

〈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가장 큰 울림을 준 작품이다. 아픔도 제일 컸다고 할 수 있다. 살기 위해 강을 건너려는 북한의 인민들. 배가 고파 아기 무덤을 파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을 전하는 청년에게 남자는 이렇게 외친다.

“죽은 아이를 이웃끼리 바꿔먹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자식, 그만두지 못해!”

갑자기 안경잡이 사내가 청년의 뺨을 후려쳤다. 청년은 나뭇가지를 쏟으며 주춤 물러났다.

“보지 않은 건 믿지 말랬잖아. 그런 일은 없어. 산짐승들 짓이야.”

사내가 쏟아 붓듯 소리쳤다. 그래놓고 그는 멍하니 서 있었다.

청년이 힘없이 몸을 돌렸다. 사내는 땅바닥에서 나뭇가지를 주워 품에 안았다. - 195p

강을 건너게 도와주는 중국 교포 여자의 젖먹이 아이가 이미 숨이 멈춰 있었다는 사실에는 먹먹한 슬픔이 가슴을 울린다. 분단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비극이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북의 심각한 식량난과 더불어 퍼졌던 위와 같은 소문들은 기실 사실로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그 어떤 이야기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뿐, 증거는 없다.

물론 그와 같은 일이 전혀 없었다고 자신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극단적 기아 상황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는 북이 아닌 그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소문이 만들어낸 공포와 증오, 반감은 결국 또 다른 비극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역사가 지금껏 줄기차게 보여준 모습이다.

‘경계 넘기’는 인류가 태어난 이래 끊임없이 반복되어왔던 생존의 모습이었다. 인간은 살기 위해 바다를 건넜고, 살기 위해 고향을 버렸다. 노마드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포장해도 결국 우리는 이 곳 저 곳 떠남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운명이다.

하지만 그 떠남이 21세기가 된 지금은, 어떤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지, 떠남을 강요하는 이들은 누구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할 겨를은 그리 없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의 어머니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떠남’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인식의 문제다. 우리는 같은 땅 위에서도 끊임없이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했던 민족이다. 변명일 뿐이다.  


고매한 시인이 결국 극단적 상황에서는 ‘코리안 쏠저’를 들먹이게 되는 모습. 우리 안에 지독히 깊게 숨어있는 군사 문화, 병영 문화. 이 역시 떠남과 돌아옴을 인정하지 않는 일방주의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연습은 더디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다.

글 잘 쓰는 이들을 참으로 부러워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속으로 ‘허 이 녀석 참 글 잘 쓴다. 젠장’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버릇없다고 욕하셔도 사실이니 욕먹어야겠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잘 쓰는 그 글이 어떤 고민과 성찰 속에 나온 것이냐 하는 문제다.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늑대》는 정말 글 잘 쓰는 분의, 충분히 깊은 글이다.

저자의 말처럼 더 오래 오래 글을 쓰길 바란다. 나 같은 백면서생을 위해서도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