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 제6회 채만식문학상, 제10회 무영문학상 수상작
전성태 지음 / 창비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어느 새 글을 쓰며 생계를 유지한지 10년이 되어 간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시작한 글쓰기는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른 채 시간만 잡아먹었다. 늘어나는 건 염치없음과 부적절한 배짱뿐이니 여전히 제대로 사람 구실하지 못하며 살고 있다.

때문에 글을 잘 쓰는 이들은 영원한 동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직업상 작가보다는 학자들을 많이 만나게 되지만, 정작 존경의 대상은 거의 작가들이다. 그들의 글을 읽으며 때로는 감탄, 때로는 부러움, 때로는 시기를 반복하곤 한다.

전성태의 《늑대》는 오랜 만에 만난 친구와 걸쭉하게 한 잔 걸친 뒤, 풀려진 눈으로 대로를 활보하다 눈에 들어온 서점에 무작정 들어가, 무작위로 고른 책이었다. 작가에겐 참으로 미안한 소리가 아닐 수 없는데, 사실 전에는 작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알코올에 축축이 젖은 내 혼미한 정신이 집어든 《늑대》. 내 안에 또 다른 늑대가 살고 있었을까. 순전히 제목을 보고 집어 들었을 책. 난 그렇게 쑥스러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저자는 이미 “완벽에 가까운 문장과 구성을 추구하고 사회적 현실에 깊게 뿌리를 내리면서 독특한 작품세계를 일궈온”이로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매향》《국경을 넘는 일》등의 작품으로 주목받는 작가를 넘어 새로운 소설 세계를 일구고 있는 이였다.

그가 6개월여의 몽골 체험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작품이 책이 절반을 넘고 있다. 10편의 소설 중 6편이 몽골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온전히 몽골의 것만은 아니다. 울란바토르의 한 북한 식당을 통해 분단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기도 하고, 〈강을 건너는 사람들〉에서는 탈북자들의 처절한 삶이 날 것 그대로 보여 진다. 물론 이 작품은 몽골을 배경으로 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동안 작품들이 통해 ‘경계 넘기’에 대한 고뇌를 보여줬다고 한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국경을 넘어야 하는 사람들, 기존의 정체성을 벗어버려야 하는 이들이 겪는 혼란과 고통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물리적 국경이 아닌 정체성에 천착한 그의 소설들을 때문에 읽는 이에게 적지 않은 인식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었다고 한다.

《늑대》 역시 단순한 몽골 체험기, 혹은 북한 이해하기에 차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삶이라지만 그의 소설 속에 펼쳐지는 웃지 못 할 일들이 엄연한 현실임을 자각하는 순간, 독자는 이미 또 다른 인식의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웃기지도 않는 것이 우리의 삶임을, 저자는 특유의 문장과 탁월한 묘사로 그려낸다.

〈목란식당〉은 북의 식당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 편의 코미디다. 멀리 몽골까지 찾아온 한국 교회의 목사 일행은 식당의 종업원들을 마치 ‘악마’대하듯 행동한다. 고작 냉면 한 그릇에 담겨진 이데올로기의 폭력성. 단순한 식당을 이념 투쟁의 장으로 인식하는 목사의 행동 앞에서 독자들은 실소와 함께 묵직한 쓰라림을 경험하게 된다. 기실 그것은 목사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폭력성과 경직성에 다름 아니었다. 식당은 그냥 식당을 뿐이다.

〈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가장 큰 울림을 준 작품이다. 아픔도 제일 컸다고 할 수 있다. 살기 위해 강을 건너려는 북한의 인민들. 배가 고파 아기 무덤을 파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을 전하는 청년에게 남자는 이렇게 외친다.

“죽은 아이를 이웃끼리 바꿔먹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자식, 그만두지 못해!”

갑자기 안경잡이 사내가 청년의 뺨을 후려쳤다. 청년은 나뭇가지를 쏟으며 주춤 물러났다.

“보지 않은 건 믿지 말랬잖아. 그런 일은 없어. 산짐승들 짓이야.”

사내가 쏟아 붓듯 소리쳤다. 그래놓고 그는 멍하니 서 있었다.

청년이 힘없이 몸을 돌렸다. 사내는 땅바닥에서 나뭇가지를 주워 품에 안았다. - 195p

강을 건너게 도와주는 중국 교포 여자의 젖먹이 아이가 이미 숨이 멈춰 있었다는 사실에는 먹먹한 슬픔이 가슴을 울린다. 분단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비극이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북의 심각한 식량난과 더불어 퍼졌던 위와 같은 소문들은 기실 사실로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그 어떤 이야기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뿐, 증거는 없다.

물론 그와 같은 일이 전혀 없었다고 자신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극단적 기아 상황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는 북이 아닌 그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소문이 만들어낸 공포와 증오, 반감은 결국 또 다른 비극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역사가 지금껏 줄기차게 보여준 모습이다.

‘경계 넘기’는 인류가 태어난 이래 끊임없이 반복되어왔던 생존의 모습이었다. 인간은 살기 위해 바다를 건넜고, 살기 위해 고향을 버렸다. 노마드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포장해도 결국 우리는 이 곳 저 곳 떠남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운명이다.

하지만 그 떠남이 21세기가 된 지금은, 어떤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지, 떠남을 강요하는 이들은 누구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할 겨를은 그리 없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의 어머니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떠남’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인식의 문제다. 우리는 같은 땅 위에서도 끊임없이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했던 민족이다. 변명일 뿐이다.  


고매한 시인이 결국 극단적 상황에서는 ‘코리안 쏠저’를 들먹이게 되는 모습. 우리 안에 지독히 깊게 숨어있는 군사 문화, 병영 문화. 이 역시 떠남과 돌아옴을 인정하지 않는 일방주의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연습은 더디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다.

글 잘 쓰는 이들을 참으로 부러워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속으로 ‘허 이 녀석 참 글 잘 쓴다. 젠장’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버릇없다고 욕하셔도 사실이니 욕먹어야겠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잘 쓰는 그 글이 어떤 고민과 성찰 속에 나온 것이냐 하는 문제다.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늑대》는 정말 글 잘 쓰는 분의, 충분히 깊은 글이다.

저자의 말처럼 더 오래 오래 글을 쓰길 바란다. 나 같은 백면서생을 위해서도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