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영화 전성기 방송문화진흥총서 107
이보경 지음 / 창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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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선 새해부터 이렇게 반가운 책이 나왔다는 점에서 매우 기뻤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아시다시피 현 정부 들어 남북관계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버렸고, 급기야 ‘전쟁’ 운운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덩달아 출판계의 꼬라지도 말이 아니었다는 점, 감히 말씀 드립니다. 출처도 불분명한 일본 만화를 번역해 북한의 김정일을 마음껏 조롱하는 책이 등장하는가 하면, 지겹게도 써먹은 김대중 대통령의 정상회담 대가 제공 주장 등이 여전히 책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당최 지겨운 인간들입니다. 과거 정부의 치부를 찾으려는 그 극악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정작 나오는 것이 없으니 고작 예전 정상회담 대가 주장을 아직까지 써먹고 있습니다. 무죄 판결이 난지 얼마나 지났습니까.

 

물론 아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안함에다 연평도까지 우리 정부만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생각하니까요, 또 그렇게 정부는 이용해 왔으니까요. 하지만 천안함의 진실이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건 아시죠? 연평도 역시 우리가 그런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왔다는 점까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과거 정권이 ‘잃어버린 10년’에다가 남북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현 정권의 대통령이란 사람을 비롯해 실세들은 떠듭니다. 통일부장관이라는 사람 역시 통일보다는 전쟁을 선호하는 듯한 무책임한 발언을 지껄입니다. 위키리크스에도 드러났죠? 미 대사관에 가서 한다는 이야기가 김정일은 얼마 못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죽는다는 소리죠. 이딴 얘기나 떠들면서 과연 북에게 진정성을 요구할 자격이 있을까요.

 

마냥 북이 좋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천안함도 명확히 사실이 밝혀지고, 그 원인이 북에 있다면 그 책임을 분명히 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연평도 역시 마땅히 사과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인간적으로 생각을 해봅시다. 그렇게 상황을 악화시킨 주범은 누굽니까. 곰곰이 따져보자고요. 틈만 나면 김정일은 곧 죽는다 죽는다 저주를 퍼붓고, 남북관계에 있어 아무런 비전이나 정책 없이 무작정 기다리면 굶어죽는다, 말라 죽는다를 외치는 남과 과연 북이 진정성 있는 대화를 하고 싶을까요.

 

자국의 영토 바로 아래에서 미국의 빽을 믿고 매일같이 대포를 쏴대며, 무력시위를 벌이는 남이 과연 아름답게 보였을까요. 중국도 러시아도 믿지 못하는 천안함 사건을, 아니 전 세계가 의심을 품고 있는 천안함 사건을 기어이 유엔까지 끌고 가 결국 애매한 성명이나 받아서 개망신당한 남쪽. 그러고도 외교적 성과니 뭐니 하며 북한을 마치 쓰레기 국가인양 매도하는 남쪽이 과연 예쁠까요?

 

다시 말하지만 북이 예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통일을 할 생각이 있고, 아니, 다 때려치우고 평화롭게 공존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북을 고립시키고 말라죽게 하려는 의도가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말라죽을 북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보수 세력들은 살판났다고 매일같이 규탄대회를 열고 김정일의 초상화를 불태웁니다. 북 인민들이 하나같이 다 노예라 그것을 보면 좋아라 할까요? 뭐 최근 공영방송까지 나서서 출처가 불분명한 ‘카더라’통신을 인용해 해괴망측한 이야기까지 내보내고 있긴 합니다. 그것을 또 그대로 믿는 인간들이 있어요. 참, 당최 상식이란 게 사라진 나라입니다.

 

해방 후, 전쟁을 겪고, 그것도 최악의 참혹한 전쟁을 겪고 난 뒤 남아있는 적개심. 그것을 교묘히 혹은 대놓고 이용하며 부와 명예를 쌓은 쓰레기들. 그들이 타인의 생명을 빼앗아가며 만들어놓은 그 저주받을 ‘레드 콤플렉스’. 우린 여전히 거기에 갇혀 있는 것이지요.

 

자, 그렇담 이 책을 봅시다. 책은 그동안 천 만 관객이 넘은 초 흥행작부터 최근의 〈의형제〉까지 남북의 이야기를 다룬 ‘남북영화’들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왜 이 영화들에 관객은 ‘천 만’이라는 반응을 보였을까요. 과거 지겹고도 지겨웠던 반공영화가 아닌, ‘북의 사람들도 사람이더라’하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에 열광했을까요.

 

“전후 한국인에게 부과된 반공주의는 무엇보다 공포에 기초하고 있었다. 파멸적인 전쟁의 경험을 잊을세라 두 적대 체제는 각각 국민에게 이것을 계속 일깨웠다. 두려움으로써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를 떠올리는 기제가 한국인이 지니게 된 반공의 실상이자 레드콤플렉스의 요체였다.…영화도 이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쓰였을 때 끊임없이 사람들을 겁주는 게 필요했다. 하지만 국민적으로 거기에 부응했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경제가 성장하며 국민들은 더 이상 강요된 도식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북이 ‘뿔 달린 도깨비’들만 살고 있는 지옥이라는 주입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함께 보기(영화 관람)’를 통해 ‘함께 살기’와 ‘상대주의’적 관점을 꿈꾸었는지 모릅니다. 다만 오래 떨어져 살았던 가족, 혹은 이웃이란 생각은 전혀 이상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하지 않은 생각만 가져도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던 사회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새로운 남북영화의 관점은 상대주의다. 일방적이고 제국적인 가치를 상대화하기, 모순적인 사물들을 관계 속에 놓고 생각하기다. 상대주의에 입각해서 보면 심지어 ‘진실을 말하는 인간조차 종국에는 자기가 거짓말하기를 멈출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고 니체는 말한 바 있다. 선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도로는 무수한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경구를 상기시킨다.”

 

둘 중 하나가 결국엔 절멸되어야 하는 통일. 증오와 갈등, 살육과 학살만이 대안일 수밖에 없는 평화. 이는 통일도 평화도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죽음과 증오와 지겹도록 반복되는 ‘지옥’일 뿐입니다.

 

함께 하기는 결국 함께 바라보기와 함께 생각하기, 함께 말하기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우리는 이를 위해 초보적 노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에 벌어진 놀라운 변화를 기억하는 이들은 알겠지만, 미약한 첫걸음도 엄청난 이야기를 가져다줍니다.

 

다시 멈춘 우리, 그러나 이내 다시 달려야 할 우리입니다. 책은 영화라는 친숙한 도구를 통해 남과 북을 바라보는, 화해와 통일과 함께 살기를 바라보는 이들의 진실을 추구합니다. 물론 그 답은 우리 스스로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상계의 억압된 반쪽을 회복시키는 꿈을 꾸었을지 모른다. 화해로써 온전한 공동체를 되찾는 꿈도. 함께 살기를 원망(願望)하는 오래된 정신적 토양 위에서 능구렁이처럼 능수능란한 민력이 명하는 바에 따라 아마 추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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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구해줘
기욤 뮈소 지음, 윤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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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최근 《종이여자》가 서점가에 나왔더군요. 많은 이들이 책을 집어 드는 모습을 봤습니다. 여전히 기욤 뮈소의 인기가 대단함을 실감했습니다. 뭐, 전 언제나 그렇듯 이제야 이 작가의 작품을 접하게 됐네요.

 

‘85주 연속 프랑스 베스트셀러 1위!’라는 문구가 표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흔하디흔한 사랑 이야기일 수도 있는 책이 왜 이리 큰 인기를 얻었을까요. 그리고 프랑스 소설이라 하면 조금은 어렵게 받아들이는 국내 출판계에서 이토록 큰 반향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단 많은 분들의 서평을 보면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가독률이 뛰어나다는 것. 이는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보자면 무엇보다 큰 미덕입니다. 한 장 한 장 넘기기가 그야말로 어려운 소설들도 많거든요. 그 작품들이 노벨상이나 등등의 큰 상을 받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솔직히 책장 넘기기 어려운 소설들은 망설여지게 됩니다.

 

책은 쉽습니다. 아울러 프랑스 소설 특유의 딱딱함, 그리고 난해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조금 세련되었다고 할까요. 영화를 고려해 만든 것처럼 장면 장면이 눈에 보이고, 약간의 판타지와 스릴이 가미된 ‘잘 만들어진 이야기’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아내를 잃어버린 샘. 그는 하루하루 생명을 구한다는 사명감으로 살아가지만 정작 자신은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말이죠.

 

한편 화려한 여배우의 꿈을 안고 고향 프랑스를 떠나 뉴욕으로 온 줄리에트는 결국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다시 쓸쓸한 귀향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샘과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지고 격정적인 사랑을 하게 됩니다.

 

짧지만 생애 최고의 사랑을 경험한 이들. 하지만 선뜻 서로에게 진심을 털어놓지 못하고, 결국 줄리에트는 고향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그리고 이어서 벌어지는 놀라운 사건들. 과연 이들의 사랑은 이루어질까요.

 

무난한 스토리 전개에 무난한 문장. 나쁘지 않았습니다. 요즘 트렌드에 걸맞은 판타지적 요소들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전 그 이상의 점수를 주기엔 머뭇거려 집니다. 왜 그럴까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 작품에 감히 시큰둥하다니요.

 

전적으로 제 개인적 취향임을 밝혀둡니다만, 전 ‘너무 미국적인’혹은 ‘너무 대중적인’글로 보이기 위해 애썼을 저자가 약간은 안쓰럽다는 생각입니다. 이 소설은 누가 읽어봐도 당최 저자가 프랑스 작가라는 사실을 알기 어렵습니다.

 

문장마다, 혹은 문단마다 부러 세련되어 보이려는, 혹은 미국의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듯한 흔적이 엿보입니다. 뉴욕의 소도시 혹은 타운 들에 대한 묘사에서 나타나듯, 실재 저자는 뉴욕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오히려 저에겐 어색하게 다가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딱 다빈치 코드 류’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살벌하게 폼 잡는 것 말이죠.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는 순전히 제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통해 감동을 느꼈다면 책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고, 또한 대중과의 소통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저 하나 정도는 빼고 말이죠.

 

아, 그렇다고 제가 책을 정말 눈물 나게 재미없게 읽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페이지는 쉽게 넘어가고, 또 어느 인기 미드의 에피소드 하나, 혹은 할리우드의 뻔한 통속 러브스토리 한 편을 본 듯한 느낌이었으니까요. 저 미드 좋아하거든요.

 

거창하게 민족주의 운운할 능력도 생각도 없습니다. 미국은커녕 프랑스 구경도 못해본 촌놈이지만, ‘위대한’ 글로벌 스탠더드나 세계화에 대해 대체로 수긍하고 사는 편입니다. 하지만 모든 스토리의 중심, 이야기의 중심이 너무 미국적으로 흐르는 것은 그닥 맘에 들지 않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지만, 혹시 배경이 전부 미국은 아니겠죠?

 

혹시 오해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 말씀드리자면, 제가 찌질이처럼 배경이 미국이거나 미국 상품, 제품의 이름이 난무한다는 것 하나에만 딴지를 거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요. 뭐 어떻습니까. 다만 그 도도하고 자존심 높은 프랑스 양반들이 미국 입맛에 딱 맞는, 혹은 맞추려 애쓰는 작품들이 최근 좀 많이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 정도?

 

본의 아니게, 건방지게 작품에 시비를 건 꼴이 되었습니다. 뭐 저 하나가 딴지를 걸어 봤자

대세에 지장은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미안한 건 별로 없지만, 오해는 말아 주세요. 저 미드 좋아한다니까요.

 

책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니 그의 작품들이 두어 권 정도 더 있습니다. 이것들도 마저 읽어 본 다음, 다시 기욤 뮈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봐야 할 듯합니다. 뭐 프랑스인이면 프랑스다운 글을 쓰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는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딴 건 세상에 없거든요. 다만 ‘뜨기 위해’부러 그다지 부럽지도 않은 세계를 환상적으로 그려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죠.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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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꿈 -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평전 우리시대의 논리 13
김순천 지음 / 후마니타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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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호. 어느 새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이름이다. 2003년 1월 9일, 모든 걸 빼앗기고 마지막 남은 자신의 몸을 장작개비 삼아 그렇게 스러진 이름.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가정의 남편이자, 든든한 아빠였던 사람. 모든 동료들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호루라기 사나이’ 배달호. 그는 그렇게 잊혀진 이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떠난 지 8년 만에 그의 삶과 죽음을 담은 책이 나왔다. 르포 작가이자 강사이기도 한 김순천 님의 펜을 빌어 그렇게 그는 다시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무심하고 무참한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우리는 배달호라는 이름 앞에 당당하지 못하다. 그게 더 아프다.

 

신자유주의라는 괴물 앞에, 두산이라는 악랄한 기업 앞에,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일해 온 일터와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던 노동자 배달호. 그는 단지 사람답게 일하며 살기를 바랐던 ‘인간의 꿈’을 가진 인간이었다. 그가 바란 건 부귀영화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다만 ‘인간’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권력은 그를 인간으로 부르길 거부했다. 공장에서 청춘을 다 바쳐 일했지만, 자신과 동료와 사회와 이 세상을 위해 다만 성실히 일한 죄밖에 없었지만, 세상은 그를 다만 ‘노예’라 부르고 있었다. 그는 결국 죽음으로 그것을 거부했을 따름이다.

 

그가 죽기 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노동자들은 죽어가고 있다. 그 어떤 악랄한 왜곡과 거짓으로 분칠한다해도, 노동자들의 죽음을 묻어버릴 순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여전히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전태일 열사가 원했고, 배달호 열사가 원했던 것은 오직 단 하나 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다운 대접’ 그 뿐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돈과 권력을 손에 쥔 인간들은, 그러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대접을 받으며 일하는 이들을 다시 착취하길 원했다. 그들의 생명과도 같은 임금을 깎으려 했고, 그들의 이름 앞에 손배소 가압류라는 멍에를 던졌다. 수천억 원 대의 자산을 가진 기업이 하루 3천만 원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배상을 노동자들에게 청구했다. 단지 합법적인 파업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배달호 열사가 분신한 후 그에게 돌아갈 그 달 월급은 2만 5000원이 전부였다. 월급을 집으로 가져다주지 못하는 배달호 열사는 죽는 그 날도 미안한 마음을 숨기려 고장난 수도꼭지라도 고쳐주고 그렇게 집을 나서야 했다.

 

인간다운 삶은 무엇인가. 자신이 인간임을 믿으며, 또 인간의 대접을 받고 산다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답일 것이다. 단지 쓰다 버리는 부속품이 아닌, 살아 숨쉬는 인간. 남들보다 위에 서려는 것이 아닌 다만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픈 마음.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그러한 소박한 꿈마저 불법, 위반, 손해라 말한다. 그리곤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지금 내가 이따위 자위행위 같은 글을 끄적거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김진숙 선생은 한진중공업의 악랄한 정리해고를 막고자 35미터 크레인 위에 올라가 고통스러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법원은 그에게 당장 닥치고 내려오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불응한다면 그 자랑스러운 공권력을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그렇다. 아직도 우리는 노동자가 죄인인 시대에 살고 있다. 노동자가 아닌 사람이 없고, 노동자가 없으면 세상이 멈추어 버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기꺼이 그들의 고통에 눈을 감는다. 우리의 고통에 눈을 감고, 우리의 죽음에 시치미 뗀다. 구역질나는 자본과 권력에 굴종하는 것 외엔 우리의 생존은 다만 막다른 골목이라 스스로 합리화하며, 그렇게 우리는 따뜻하고 배가 부르다.

 

얼마나 많은 배달호가 죽어야 할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전태일이 죽어나가야 이 지긋지긋한 지옥이 끝날까. 자본을 쥔 자들의 만행 앞에 도대체 언제까지 죽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죽음 뒤에 남겨진 우리들은 또 얼마나 헛헛하고 막막하고 죄스러워야 할까.

 

결국 자각만이 살 길일 것이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닌 ‘인간’으로 사는 길일 것이다. 피가 터지고 머리가 깨지고 무릎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자동차 보닛 위에 노동자를 매달고 질주하는 저 야만의 자본 앞에, 그리고 그 노예들 앞에 당당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자각에만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외침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우리는 언제 이 죽음과도 같은 한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배달호 동지가 힘차게 불던 호루라기 소리. 모든 동지들을 하나로 모았던 그 호루라기 소리. 여전히 그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호루라기를 불고 있다. 여전히 그는 한진 중공업 공장을 누비며 호루라기를 불고 있다. 우리들을 깨우고 있다. 일어나라고.

 

“자신을 밟고 가기를 원했다. 출퇴근 시간에 오며 가며 회사에 다니는 모든 동료들이 자신을 밟고 가기를, 쿨링타워 후미진 곳에 자신을 묻으니 그렇게 자신을 딛고 다시 살아 주기를……. 세상의 못된 사람들이,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인간 이하로 만들더라도 거기에 주눅 들지 말고, 오히려 당당히 그들까지 변화시키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세상을 만들어 주기를! 회사가 변하지 않는 한 노동자들의 삶이 변하기 쉽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얼음 조각처럼 날카로운 추위에 살은 이미 얼어붙었지만 그의 뼈는 불타오른 듯 뜨거웠다.

희미하게 회색빛 공장 건물 사이로 동료들이 하나둘 노동자 광장에 모여들었다. 광장은 점점 짙은 하늘색 작업복을 입은 동료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그 동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배달호는 어린 아이처럼 즐겁게 호루라기를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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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강의 - 미국 명문대 교수가 추적하는 뱀파이어의 세계
로렌스 A.릭켈스 지음, 정탄 옮김 / 루비박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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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보는 미드 중 수퍼네츄럴(Supernatural)이 있다. 잘생긴 두 청년 퇴마사들이 온갖 악의 무리를 소탕하는 뭐 그런 내용이다. 이제는 시즌을 거듭할수록 신의 경계를 넘나들고 생사도 왔다 갔다 한다. 온갖 천사와 악마들도 등장하고.

 

최근 에피소드 중에서 주인공 형제 중 형 ‘딘’이 뱀파이어의 습격을 당해 자신도 뱀파이어가 되는 장면이 있었다. 뭐 결국은 다시 인간이 되지만, 그 후부터랄까. 다른 인간들이 뱀파이어와 관련된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한 딘의 평가가 조금 달라졌다.

 

뱀파이어를 숭배하는 어느 소녀의 집에 들어간 딘은 소녀의 방에 걸려있는 뱀파이어 영화의 남자 주인공 브로마이드를 보며 말한다. “저건 뱀파이어가 아니야, 그냥 쓰레기일 뿐이지.”아마도 최근 〈트와일라잇〉〈뉴문〉 따위의 영화를 빗대어 말한 것일 테다.

 

뭐 그렇다. 아주 오랜 예전부터 지금까지 흡혈귀, 드라큘라, 뱀파이어와 관련된 문화 아이템은 너무나 많았다. 늑대인간과 더불어 흡혈귀는 없어서는 안 될 대표 문화 상품이다. 거기에다 100% 창작이 아닌 나름의 실화와 전설, 역사도 갖추고 있으니 더 그럴 듯 하지 않나.

 

〈뱀파이어 강의〉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런 여러 가지 흔해빠진 아이템 중 하나라 여겼다. 이것 또한 하나의 소비품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엄연히 대학에서 10년 넘게 강의를 해 온 하나의 ‘학문’이었던 것이다. 뱀파이어에 대한 학문적 고찰이라, 색다르면서도, 조금은 깔보며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가 빈번히 등장하고, 정신분석학, 문학과 영화, 드라마를 넘나들며 파헤쳐진 뱀파이어의 세계는 나의 무지를 다시 한 번 강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으악”이었다.

 

애도와 우울, 동성애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니힐리즘과 자본주의, 인쇄술과 마녀 사냥 등 뱀파이어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만만한 것들이 전혀 없었다. 한마디로 뱀파이어는 그냥 단순한 영화, 드라마의 흥밋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자.

“적절하게 매장되지 못한 사람이 뱀파이어가 된다는 것은 그 특정인이 적절하게 애도를 받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많은 나라에서 중병에 걸렸으나 돌보아줄 이가 없어서 혼자 죽음을 맞은 사람들은 누구나 되살아난다는 믿음이 실제로 유행하고 있었다.……죽은 자의 원망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

 

“애도를 할 때, 그때마다 일어나는 대체, 통합, 살의의 순간에 대해서도 애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애도하는 동시에 애도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오로지 삶을 긍정하기 위해 벌떡 일어서서 동일자의 영원회귀를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리의 유령으로 인해 또는 그것을 따라 죽는 게 아니라 유령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뱀파이어는 애도 받지 못한 자이자, 미처 애도하지 못한 우리이며, 이해받지 못한 소외된 자다. 또한 초인적이지만 신이 될 수 없는 ‘팝스타’이자 ‘기형아’인 것이다. 그들은 유령이기보단 ‘슬픈 인간’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뱀파이어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환호하는 것일까.

그것은 뱀파이어의 불멸성, 젊음, 성적 매력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은 아닐 듯 싶다. 유년 시절을 온전히 극복하지 못한 이들의 불안감, 성장통 역시 뱀파이어를 숭배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또한 내가 느끼기에 뱀파이어에 대한 인기, 숭배에는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죄의식’이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소외된 이들, 가까이 가기 두려운 이들에 대한 죄의식, 억지로 ‘악인화’시켜, 결국 집단으로 살해해 버린 이들의 대한 공포인 것이다. 우리는 최근 흔하게 등장하는 좀비 등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좀비는 그 발생 원인을 막론하고 두렵고 기피해야 할 ‘죽지 않은 자’이다.

 

세상에 이유 없는 존재는 없다는 사실. 뱀파이어 역시 수많은 이야기와 수많은 시간들과, 수많은 고통과 죽음 속에 이어진 전설이자, 엄연한 ‘사실’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적당한 소비품으로 전락해버린 비통함이 있지만, 엄연히 뱀파이어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적당히 즐기고, 무서워하고, 비명을 질러대는 것으로는 온전히 확인할 수 없는 뱀파이어의 세계. 비록 저자의 난해하고 비비 꼬는 듯한 문장이 눈에 착착 감기지는 않지만, 저자 덕분에 애꿎은 역자의 문장마저 때론 기괴하고 이해불가였지만, 어찌되었든 ‘국내 최초의 뱀파이어 분석서’라는 수식어처럼 책은 흥미와 그 외에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준다. 수많은 뱀파이어 영화들과 문학 작품들을 알아가는 재미도 적지 않다.

 

그리고 나를 비롯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자신 없어 하는, 그러면서도 마치 아무 일 없이 잘 하고 있는 것 마냥 꾸며대는 ‘애도’와 ‘우울’에 대한 다른 시각을 얻을 수 있었음도 성과였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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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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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요. 2008년 초에 읽었던 《친절한 복희씨》를 다시 꺼내든 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였습니다. 말 그대로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죠. 그리고 마감이다 뭐다 바쁘게 돌아가는 와중에 짬짬 읽어나가다 21일 책장을 다 덮었죠.

 

그런데 다음 날, 참 허망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박완서 작가님의 별세 소식이었습니다. 이날은 고 리영희 선생님의 49재 날이기도 했습니다. 전 아침 일찍 봉은사에 나가 49재 추모행사 자리에 있었죠. 그런데 같은 날 박완서님께서 생을 달리 하신 것입니다.

 

손에 쥐어있는 책이 순간 마치 작가님이 마지막 가시는 길에 저에게 주신 선물마냥 느껴졌다면 이상한 이야기일까요. 허망하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이제 편히 쉬시겠구나 생각도 들었습니다.

 

《친절한 복희씨》의 맨 마지막 “작가의 말”을 보자면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9년 만에 또 창작집을 내면서 또 작가의 말을 쓰려니 할 말이 궁했던지 문득 이게 마지막 창작집이 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나도 사는 일에 어지간히 진력이 난 것 같다. 그러나 이 짓이라도 안 하면 이 지루한 일상을 어찌 견디랴.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드이 대부분이다.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결국 《친절한 복희씨》는 선생님의 마지막 창작집이 된 셈인가요. 지난 해 말 다른 문인들과 함께 펴낸 《반성》에서 선생님의 마지막 글을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참으로, 참으로 겸손하셨어요. “건망증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서글픈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을 위해 좋은 일 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라 하셨죠. “사회정의를 일신의 안위를 희생한 적도, 불우한 이웃을 위해 큰돈을 쾌척한 적도 없다.”시며 “기껏해야 남에게 폐나 안 되게 살려고 전전긍긍 옹졸하게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엔 염치없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은 사실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없죠. 다만 죽지 않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선생님은 널리 알려지거나, 혹은 알려지지 않게 크고 작은 선행을 꾸준히 해 오신 분입니다. 자신의 장례조차 부의금을 일체 받지 말라 당부하셨죠. 가난한 문인들이 문상 오는 것을 부담 없게 하려는 생각이셨습니다.

 

선생님이 과연 이 세상에 태어나 남을 위해 좋은 일 한 게 하나도 없는지는, 남아있는 사람들이 절절히 알 것입니다. 선생님의 소설을 통해 위안을 받고, 삶의 용기를 얻고, 때론 함께 분노해 온 많은 이들에게 선생님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주셨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친절한 복희씨》는 ‘나이 들어감’의 대한, ‘노년’에 대한 솔직하고 담담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없이 자식을 위해, 먹고 살기 위해 달려 온 이들이, 이제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허둥지둥 대는 모습도 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슬기롭고 지혜롭습니다.

 

생각보다 무서운 속도로 ‘나이 들어가는’사회에서 정작 사회는 이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새로운 자원들(아기)을 빨리, 많이 생산하라는 독촉뿐이죠. 아이를 갖기 위한 적당한 조건은 전혀 마련해주지 않고 말이죠.

 

어느 책에선가요.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 불타 사라지는 도서관들을 하염없이 멍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책을 통해 선생님은 ‘이해하고’‘용서하고’또한 그저 바라봅니다. 젊은 아이들의 청춘에 삐치고 싶지만, 그들이 젊음을 받아들이고, 곧 자신의 늙음을 받아들입니다. 세상에 각박함에 진절머리 치다가도, 이 또한 사람 사는 세상임을 인정합니다.

 

물론 이러한 달관의 자세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대책 없이 무조건 ‘다 그렇게 가는 거지’ 따위의 방관도 아닙니다. 선생님의 글이 여전히 우리에게 우뚝한 이유는 노년의 지혜와 더불어 날카로운 관찰력과 비판 의식이 살아 숨쉬기 때문입니다.

 

좀처럼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았던, 그러나 시무룩해 있는 이들의 기분을 ‘눙쳐줄’ 줄 알았던 사람. ‘첫밗’에 마음에 들지는 않았더라도 언제나 ‘구슬’같았던 사람. 이제 능청스럽게도 추억을 아름아름 풀어놓던 선생님의 글은 더 이상 만날 수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선생님이 풀어놓으신 이야기들은 언제나 두고두고 젊은 ‘아해’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로해 줄 것입니다.

 

〈그 남자네 집〉의 아련한 추억처럼 이제 추억으로 남을 박완서 작가님. 부디 아름다운 심성 그대로 그 곳에서도 한없이 편안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숨막히게 어지러웠던 세상일랑 깨끗이 잊어버리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굿바이 추억이여, 잘가요. 복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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