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영화 전성기 방송문화진흥총서 107
이보경 지음 / 창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우선 새해부터 이렇게 반가운 책이 나왔다는 점에서 매우 기뻤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아시다시피 현 정부 들어 남북관계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버렸고, 급기야 ‘전쟁’ 운운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덩달아 출판계의 꼬라지도 말이 아니었다는 점, 감히 말씀 드립니다. 출처도 불분명한 일본 만화를 번역해 북한의 김정일을 마음껏 조롱하는 책이 등장하는가 하면, 지겹게도 써먹은 김대중 대통령의 정상회담 대가 제공 주장 등이 여전히 책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당최 지겨운 인간들입니다. 과거 정부의 치부를 찾으려는 그 극악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정작 나오는 것이 없으니 고작 예전 정상회담 대가 주장을 아직까지 써먹고 있습니다. 무죄 판결이 난지 얼마나 지났습니까.

 

물론 아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안함에다 연평도까지 우리 정부만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생각하니까요, 또 그렇게 정부는 이용해 왔으니까요. 하지만 천안함의 진실이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건 아시죠? 연평도 역시 우리가 그런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왔다는 점까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과거 정권이 ‘잃어버린 10년’에다가 남북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현 정권의 대통령이란 사람을 비롯해 실세들은 떠듭니다. 통일부장관이라는 사람 역시 통일보다는 전쟁을 선호하는 듯한 무책임한 발언을 지껄입니다. 위키리크스에도 드러났죠? 미 대사관에 가서 한다는 이야기가 김정일은 얼마 못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죽는다는 소리죠. 이딴 얘기나 떠들면서 과연 북에게 진정성을 요구할 자격이 있을까요.

 

마냥 북이 좋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천안함도 명확히 사실이 밝혀지고, 그 원인이 북에 있다면 그 책임을 분명히 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연평도 역시 마땅히 사과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인간적으로 생각을 해봅시다. 그렇게 상황을 악화시킨 주범은 누굽니까. 곰곰이 따져보자고요. 틈만 나면 김정일은 곧 죽는다 죽는다 저주를 퍼붓고, 남북관계에 있어 아무런 비전이나 정책 없이 무작정 기다리면 굶어죽는다, 말라 죽는다를 외치는 남과 과연 북이 진정성 있는 대화를 하고 싶을까요.

 

자국의 영토 바로 아래에서 미국의 빽을 믿고 매일같이 대포를 쏴대며, 무력시위를 벌이는 남이 과연 아름답게 보였을까요. 중국도 러시아도 믿지 못하는 천안함 사건을, 아니 전 세계가 의심을 품고 있는 천안함 사건을 기어이 유엔까지 끌고 가 결국 애매한 성명이나 받아서 개망신당한 남쪽. 그러고도 외교적 성과니 뭐니 하며 북한을 마치 쓰레기 국가인양 매도하는 남쪽이 과연 예쁠까요?

 

다시 말하지만 북이 예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통일을 할 생각이 있고, 아니, 다 때려치우고 평화롭게 공존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북을 고립시키고 말라죽게 하려는 의도가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말라죽을 북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보수 세력들은 살판났다고 매일같이 규탄대회를 열고 김정일의 초상화를 불태웁니다. 북 인민들이 하나같이 다 노예라 그것을 보면 좋아라 할까요? 뭐 최근 공영방송까지 나서서 출처가 불분명한 ‘카더라’통신을 인용해 해괴망측한 이야기까지 내보내고 있긴 합니다. 그것을 또 그대로 믿는 인간들이 있어요. 참, 당최 상식이란 게 사라진 나라입니다.

 

해방 후, 전쟁을 겪고, 그것도 최악의 참혹한 전쟁을 겪고 난 뒤 남아있는 적개심. 그것을 교묘히 혹은 대놓고 이용하며 부와 명예를 쌓은 쓰레기들. 그들이 타인의 생명을 빼앗아가며 만들어놓은 그 저주받을 ‘레드 콤플렉스’. 우린 여전히 거기에 갇혀 있는 것이지요.

 

자, 그렇담 이 책을 봅시다. 책은 그동안 천 만 관객이 넘은 초 흥행작부터 최근의 〈의형제〉까지 남북의 이야기를 다룬 ‘남북영화’들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왜 이 영화들에 관객은 ‘천 만’이라는 반응을 보였을까요. 과거 지겹고도 지겨웠던 반공영화가 아닌, ‘북의 사람들도 사람이더라’하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에 열광했을까요.

 

“전후 한국인에게 부과된 반공주의는 무엇보다 공포에 기초하고 있었다. 파멸적인 전쟁의 경험을 잊을세라 두 적대 체제는 각각 국민에게 이것을 계속 일깨웠다. 두려움으로써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를 떠올리는 기제가 한국인이 지니게 된 반공의 실상이자 레드콤플렉스의 요체였다.…영화도 이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쓰였을 때 끊임없이 사람들을 겁주는 게 필요했다. 하지만 국민적으로 거기에 부응했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경제가 성장하며 국민들은 더 이상 강요된 도식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북이 ‘뿔 달린 도깨비’들만 살고 있는 지옥이라는 주입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함께 보기(영화 관람)’를 통해 ‘함께 살기’와 ‘상대주의’적 관점을 꿈꾸었는지 모릅니다. 다만 오래 떨어져 살았던 가족, 혹은 이웃이란 생각은 전혀 이상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하지 않은 생각만 가져도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던 사회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새로운 남북영화의 관점은 상대주의다. 일방적이고 제국적인 가치를 상대화하기, 모순적인 사물들을 관계 속에 놓고 생각하기다. 상대주의에 입각해서 보면 심지어 ‘진실을 말하는 인간조차 종국에는 자기가 거짓말하기를 멈출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고 니체는 말한 바 있다. 선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도로는 무수한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경구를 상기시킨다.”

 

둘 중 하나가 결국엔 절멸되어야 하는 통일. 증오와 갈등, 살육과 학살만이 대안일 수밖에 없는 평화. 이는 통일도 평화도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죽음과 증오와 지겹도록 반복되는 ‘지옥’일 뿐입니다.

 

함께 하기는 결국 함께 바라보기와 함께 생각하기, 함께 말하기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우리는 이를 위해 초보적 노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에 벌어진 놀라운 변화를 기억하는 이들은 알겠지만, 미약한 첫걸음도 엄청난 이야기를 가져다줍니다.

 

다시 멈춘 우리, 그러나 이내 다시 달려야 할 우리입니다. 책은 영화라는 친숙한 도구를 통해 남과 북을 바라보는, 화해와 통일과 함께 살기를 바라보는 이들의 진실을 추구합니다. 물론 그 답은 우리 스스로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상계의 억압된 반쪽을 회복시키는 꿈을 꾸었을지 모른다. 화해로써 온전한 공동체를 되찾는 꿈도. 함께 살기를 원망(願望)하는 오래된 정신적 토양 위에서 능구렁이처럼 능수능란한 민력이 명하는 바에 따라 아마 추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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