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꿈 -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평전 우리시대의 논리 13
김순천 지음 / 후마니타스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배달호. 어느 새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이름이다. 2003년 1월 9일, 모든 걸 빼앗기고 마지막 남은 자신의 몸을 장작개비 삼아 그렇게 스러진 이름.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가정의 남편이자, 든든한 아빠였던 사람. 모든 동료들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호루라기 사나이’ 배달호. 그는 그렇게 잊혀진 이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떠난 지 8년 만에 그의 삶과 죽음을 담은 책이 나왔다. 르포 작가이자 강사이기도 한 김순천 님의 펜을 빌어 그렇게 그는 다시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무심하고 무참한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우리는 배달호라는 이름 앞에 당당하지 못하다. 그게 더 아프다.

 

신자유주의라는 괴물 앞에, 두산이라는 악랄한 기업 앞에,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일해 온 일터와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던 노동자 배달호. 그는 단지 사람답게 일하며 살기를 바랐던 ‘인간의 꿈’을 가진 인간이었다. 그가 바란 건 부귀영화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다만 ‘인간’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권력은 그를 인간으로 부르길 거부했다. 공장에서 청춘을 다 바쳐 일했지만, 자신과 동료와 사회와 이 세상을 위해 다만 성실히 일한 죄밖에 없었지만, 세상은 그를 다만 ‘노예’라 부르고 있었다. 그는 결국 죽음으로 그것을 거부했을 따름이다.

 

그가 죽기 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노동자들은 죽어가고 있다. 그 어떤 악랄한 왜곡과 거짓으로 분칠한다해도, 노동자들의 죽음을 묻어버릴 순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여전히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전태일 열사가 원했고, 배달호 열사가 원했던 것은 오직 단 하나 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다운 대접’ 그 뿐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돈과 권력을 손에 쥔 인간들은, 그러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대접을 받으며 일하는 이들을 다시 착취하길 원했다. 그들의 생명과도 같은 임금을 깎으려 했고, 그들의 이름 앞에 손배소 가압류라는 멍에를 던졌다. 수천억 원 대의 자산을 가진 기업이 하루 3천만 원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배상을 노동자들에게 청구했다. 단지 합법적인 파업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배달호 열사가 분신한 후 그에게 돌아갈 그 달 월급은 2만 5000원이 전부였다. 월급을 집으로 가져다주지 못하는 배달호 열사는 죽는 그 날도 미안한 마음을 숨기려 고장난 수도꼭지라도 고쳐주고 그렇게 집을 나서야 했다.

 

인간다운 삶은 무엇인가. 자신이 인간임을 믿으며, 또 인간의 대접을 받고 산다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답일 것이다. 단지 쓰다 버리는 부속품이 아닌, 살아 숨쉬는 인간. 남들보다 위에 서려는 것이 아닌 다만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픈 마음.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그러한 소박한 꿈마저 불법, 위반, 손해라 말한다. 그리곤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지금 내가 이따위 자위행위 같은 글을 끄적거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김진숙 선생은 한진중공업의 악랄한 정리해고를 막고자 35미터 크레인 위에 올라가 고통스러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법원은 그에게 당장 닥치고 내려오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불응한다면 그 자랑스러운 공권력을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그렇다. 아직도 우리는 노동자가 죄인인 시대에 살고 있다. 노동자가 아닌 사람이 없고, 노동자가 없으면 세상이 멈추어 버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기꺼이 그들의 고통에 눈을 감는다. 우리의 고통에 눈을 감고, 우리의 죽음에 시치미 뗀다. 구역질나는 자본과 권력에 굴종하는 것 외엔 우리의 생존은 다만 막다른 골목이라 스스로 합리화하며, 그렇게 우리는 따뜻하고 배가 부르다.

 

얼마나 많은 배달호가 죽어야 할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전태일이 죽어나가야 이 지긋지긋한 지옥이 끝날까. 자본을 쥔 자들의 만행 앞에 도대체 언제까지 죽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죽음 뒤에 남겨진 우리들은 또 얼마나 헛헛하고 막막하고 죄스러워야 할까.

 

결국 자각만이 살 길일 것이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닌 ‘인간’으로 사는 길일 것이다. 피가 터지고 머리가 깨지고 무릎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자동차 보닛 위에 노동자를 매달고 질주하는 저 야만의 자본 앞에, 그리고 그 노예들 앞에 당당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자각에만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외침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우리는 언제 이 죽음과도 같은 한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배달호 동지가 힘차게 불던 호루라기 소리. 모든 동지들을 하나로 모았던 그 호루라기 소리. 여전히 그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호루라기를 불고 있다. 여전히 그는 한진 중공업 공장을 누비며 호루라기를 불고 있다. 우리들을 깨우고 있다. 일어나라고.

 

“자신을 밟고 가기를 원했다. 출퇴근 시간에 오며 가며 회사에 다니는 모든 동료들이 자신을 밟고 가기를, 쿨링타워 후미진 곳에 자신을 묻으니 그렇게 자신을 딛고 다시 살아 주기를……. 세상의 못된 사람들이,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인간 이하로 만들더라도 거기에 주눅 들지 말고, 오히려 당당히 그들까지 변화시키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세상을 만들어 주기를! 회사가 변하지 않는 한 노동자들의 삶이 변하기 쉽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얼음 조각처럼 날카로운 추위에 살은 이미 얼어붙었지만 그의 뼈는 불타오른 듯 뜨거웠다.

희미하게 회색빛 공장 건물 사이로 동료들이 하나둘 노동자 광장에 모여들었다. 광장은 점점 짙은 하늘색 작업복을 입은 동료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그 동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배달호는 어린 아이처럼 즐겁게 호루라기를 불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