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기린의 말 - 「문학의문학」 대표 작가 작품집
김연수.박완서 외 지음 / 문학의문학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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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정합니다. 제가 약간 유별나다는 사실을. 책을 읽을 때, 상당히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으로 읽는다는 사실을. 남들이 보면 인생 참 피곤하게 산다고 느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어떤 이는 저에게 ‘활자 중독증’이라는 진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타당하고, 또 어떤 점에서는 과분한 진단입니다. 일단 제가 그런 진단을 받을 만큼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하다고 느끼니까요.

 

먼저 하는 일이 글을 쓰고 읽고 고치고 다시 고치는 직업이기에 글에 대한 묘한 강박증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식당엘 가서도 벽에 붙은, 혹은 메뉴판에 붙은 음식 이름과 설명, 음식의 유래 등등을 읽으면서 띄어쓰기와 오타를 찾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뭡니까, 이게.

 

또 지금은 그나마 상당히 호전됐다고는 하지만, 잡지를 읽을 때면 표지부터 시작해서, 광고 하나하나 목차 하나하나를 전부 읽고 나서야 다음 페이지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양심적으로 광고는 읽지 않습니다만, 이것도 뭡니까.

 

때문에 때로는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닌 텍스트를 읽어나가고 있는 저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상당히 안 좋은 부작용인 셈이죠. 하지만, 분명 단언컨대 적어도 소설을 읽을 때에는 다른 모드로 들어갑니다.

 

그 다른 모드는 다름 아닌 ‘받아들임’입니다. 무언가 책에서 잘못되고 부족하고 어색한 부분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글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뭐, 어차피 제가 문학작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는 깜냥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소설을 그런 불순한 자세로 읽으면 천벌을 받는다는 어느 소설가의 준엄한 경고(!)가 기억나기 때문에, 그냥 있는 그대로 읽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깊은 밤, 기린의 말》은 한 문장, 한 편을 그야말로 아껴가며 읽은 책입니다. 수록된 작품들도 그렇거니와, 작가들의 내공과 깊이가 절로 느껴지는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박완서, 이청준 작가의 작품과 김연수, 이명랑 등 비교적 젊은 작가, 그리고 최일남, 윤후명과 같은 깊은 연륜을 가진 작가의 작품까지. 글들의 성찬이었습니다.

 

작품들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매우 불순한 행위라 사료되는 까닭에 담지 않겠습니다. 다만 각 작품에서 받은 느낌이랄까요. 그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요?

 

김연수의 〈깊은 밤, 기린의 말〉은 분명 슬픈 이야기임이 분명한데도 어떤 발랄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뭐라고 할까, 단어들이 톡톡 튀더라고요. 《대책없이 해피엔딩》을 읽은 후여서 그런지, 일단 인상은 좋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는 중년, 노년 문학의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습니다. 왠지 범접할 수 없는 삶의 연륜도 느껴지고요. 쓸쓸하면서도 무덤덤함이 저는 참 좋습니다. 최근에 선생님의 마지막 작품집 《기나긴 하루》를 아껴두고 있습니다.

 

이청준 님의 〈이상한 선물〉도 매우 즐거운 소설 읽기였습니다. 아직 선생님의 작품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지만, 선생님 특유의 아련함이 참 좋습니다. 이나미 작가의 〈마디〉, 권지예 작가의 〈퍼즐〉도 인상 깊은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가장 감동을 느낀 작품은 최일남 작가의 〈국화 밑에서〉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예전부터 이런 문장, 문체, 쓸쓸함을 참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깊은 삶의 성찰과 농담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작가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승우의 〈한 구레네 사람의 수기〉, 윤후명의 〈소금창고〉, 조경란의 〈파종〉, 이명랑의 〈제삿날〉 모두 즐거운 소설 읽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전 여전히 소설은 먼저 읽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 안에 담겨진 내용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답고 애정하다 해도 재미가 담겨 있지 못하면 결국 다음 페이지를 넘길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 저의 어리석고 독단적인 기준으로 보면 이 책은 상당히 성공한 것이 아닐까, 이 역시 혼자 어리석게 판단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소설 읽기는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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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없이 해피엔딩 - 김연수 김중혁 대꾸 에세이
김연수.김중혁 지음 / 씨네21북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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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번 설 연휴 때, 아주 오랜만에 영화를 몇 편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나름 좋아한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그리 많이 볼 수 없었거든요. 뭐, 시간이 있음 순서대로 보던 미드나 몇 편 보았고, 또 사람이 어느 때는 영화에 집중하기조차 버거울 때가 있잖아요. 제가 딱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연휴에 모처럼 시간이 생겨서 몇 편은 일부러, 몇 편은 텔레비전을 켜니까 나와서, 그렇게 봤습니다. 나름대로 편안한 연휴였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연휴가 시작될 즈음 읽은 이 책은 뭐랄까, 부럽기도 하고, 또 약간은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킨 책이었습니다. 일단 두 작가의 오랜 우정이 부러웠고, 또 그들의 글 솜씨에 다시 부러웠죠.

 

하지만 우정이라면 저도 뭐 그렇게 꿀리지는 않습니다. 비록 많지는 않지만 나름 십 수 년을 함께 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뭐 그렇게 정답고 살가운 표현은 안 하지만(남자끼리 그러는 건 좀) 말을 안 해도 대충 서로 분위기 파악을 할 수 있는(거의 능력자 수준인가요)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서로 주고받는 칼럼이라, 이건 좀 색다른 것 같았습니다. 이 부분은 솔직히 부러웠습니다. 뭐 스포츠나 게임, 음주와 가무로 서로 자웅을 겨루거나 우정을 뽐내는 것은 해봤습니다만, 글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고, 때로는 유치찬란하게 서로를 공격하는 모습. 요건 왠지 아름답고 거룩해 보였어요.

 

게다가 그 중심의 영화가 있다…. 나름 참신하면서도 나쁘지 않은 기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양 김씨와 같은 글 솜씨가 있는 분들이어야 좋은 그림이 그려지겠죠.

 

영화는 누구나 즐겨보지만, 그 ‘누구나’는 모두 저마다의 눈으로, 저마다의 생각을 하며 영화를 보기 때문에, 사실 영화는 지구상의 인간의 수만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고, 또 해석되고 있습니다. 무슨 교과서처럼 이 영화는 이렇게 보고 해석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이들도 있지만, 다만 부르짖을 따름이죠. 그걸 누가 강요할 수 있습니까.

 

때문에 두 김씨가 한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느낀 감정은 어느 부분은 같고, 또 어느 부분은 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점을 바라보는 게 쏠쏠한 재미를 주었고요. 저는 아예 다른 방향으로 본 영화들도 있었다는 점도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이번 연휴 때 본 영화 중 하나는 그나마 최근에 개봉했던 것으로 기억하는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제목이 맞나요) 이었습니다. 인간의 의도된 실수로 태어난 침팬지 ‘시저’가 점차 각성하여 인간과 그야말로 ‘맞짱’을 뜬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동족 원숭이, 고릴라, 침팬지들을 규합하고 선동해서 말이죠.

 

제목부터가 ‘시작’이니 앞으로 후속편들이 나올 것이란 예상을 해봅니다. 그리고 그때는 더욱 스펙터클한 액션과 거대한 스케일로 압도하겠지요. 뭐 대충 그럴 겁니다.

 

그런데 제가 영화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저의 눈빛이 변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시저는 자신을 키워준 인간에게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고, 의지합니다. 하지만 점차 성장하는 과정(이른바 머리가 커지는 것이지요)에서 시저는 자신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다른’ 침팬지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미가 그 과정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도.

 

점차 변해가는 시저의 눈을 바라보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또 하나의 ‘자기반성 강요용’ 영화라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을 매도하고, 그들의 도전을 위험천만한 ‘범죄’로 매도하고, 그 과정에서 꼭 지구를 뒤흔들만한 사건이 터지고, 결국 인간은 ‘함부로 자연의 법칙을 건들면 안 된다’는 숭고한 교훈을 주는 영화들. 이젠 좀 식상하지 않나요.

 

하지만 여전히 이런 부류의 영화들은 만들어지고 또 소비됩니다. 이는 인간 죄의식에 기반한 반성일까요, 반성하는 척 하는 것일까요.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도대체 뭘까요?

 

영화는 단지 영화일 수 없습니다. 그 내용이 아무리 안드로메다까지 가는 허황된 것이라도 말이죠. 현실의 반영, 희망, 반성, 촉구, 이데올로기 등 모든 것이 혼합된 그것이 바로 영화입니다.

 

이러한 영화를 주제로 떠드는 두 작가의 대화는 즐겁습니다. 때론 사소한 듯 보이지만, 찔끔 눈물이 날 만큼 치명적인 영화도 있고, 당최 감독의 면상을 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들도 있습니다. 그 사이를 왕복하며 두 작가가 쏟아내는 주저리 주저리는 지극히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물론 글 솜씨로 어디 가서 주눅 들지 않을 정도의 필력을 가진 두 분이니, 글들이 무척 재미있다는 장점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영화를 통해 삶을 성찰하고, 거대한 담론들이 왔다갔다하기도 하지만, 때론 사소함에 극치를 달리는 모습도 즐거웠습니다. 하긴, 세상에 거대한 것이, 사소한 것이 따로 있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 나이 사십을 갓 넘기신 두 김씨의 앞날이 더욱 기대됩니다. 뭐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바쁘거든요. 두 분의 미래를 유심히 지켜보느라 제 미래에 눈 감을 수는 없잖아요. 뭐 대충 가끔 들여다 볼 뿐입니다.

 

즐거운 글, 그리고 페이지 넘기는 손가락이 부끄럽지 않을, 그런 글들을 앞으로도 심심찮게 써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저도 영화를 될 수 있는 한 더 자주 봐야겠다는 생각, 더 글을 재미지게 써야겠다는 생각,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이 공부하고 잔머리를 굴려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주 즐거운 책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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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북한을 멈출 수 있을 것인가 - 중국과 북한, 애증의 60년을 추적한다
고미 요우지 지음, 박종철.정은이 옮김 / 코인미디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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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관계는 남북관계와 한반도 문제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더욱이 MB정권 들어 급속도로 경색된 남북관계의 현실에서, 북중 관계를 세심히, 제대로 살펴보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점이 북중 관계를 제대로 보는 데 장애로 작용합니다. 양국 관계가 워낙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기도 하지만, 현실과 희망을 혼동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북과 관련된 연구에 있어 일본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꽤 체계적인 연구가 이뤄지는 것 같다가도, 언론이나 정치인들의 언행을 보면 아주 기초적인 지식조차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아울러 언제나 북 문제는 일본 보수 우익 세력의 편리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도 있습니다.

 

저자는 언론인으로서 오랫동안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을 정리해 나름 북중 관계를 진단하고 전망합니다. 오랫동안 북중 문제에 천착해 왔다는 점을 책의 여러 곳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본 언론보다 상대적으로 객관적이고, 비교적 상세하다는 평가를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책은 일본인이 바라본 한반도, 북중 관계에서 크게 탈피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인용 자료들의 객관성이 상당히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고, 이른바 ‘들은 이야기’들도 신뢰성을 주기 힘든 부분이 많았습니다. 또한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부분들을 여전히 사실인양 주장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일본은 몇 차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북과 수교를 맺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가지고 있는 자체적 한계 탓도 있지만, 북을 여전히 잘 알지 못한다는 부분도 일정 작용할 것입니다. 일본 내 수구보수 세력의 만만치 않은 힘과 영향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일본은 북과 관계개선을 추진해야 할 상황에 처할 것입니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일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한반도에 대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는 일본에게 북중 문제는 매우 민감하면서도 관심의 대상입니다. 양국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일본에게는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학자와 언론인을 막론하고 경계해야 할 첫 번째는 바로 ‘이상과 현실’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상황을 해석해버리면 올바로 현실을 직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될 것’과 ‘그렇게 된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현재 저자는 북중 관계가 과거의 혈맹에서, 철저히 이해에 기반한 일반적 관계로 격하됐다고 분석합니다. 2차례의 북핵 실험 당시 중국의 반응, 혁명 1세대인 북중 지도자들의 퇴장에 따른 유대 관계 약화, 한국, 미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와의 영향 등으로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서로 필요성에 의해 관계를 맺고 있지만, 과거처럼 단단한 혈맹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일견 타당한 측면이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국가도 자국의 이익이 되지 않는 외교관계를 수립하지는 않습니다. 중국 역시 북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는 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일방적으로 해석되어선 곤란합니다. 국가 대 국가의 관계, 당대 당의 관계, 지도자 간의 관계. 이렇게 세 가지 측면을 동시에 살펴야 비로소 북중 관계의 미래가 보입니다.

 

그리고 현재 북중 관계는 어느 때보다 긴밀하고 원활합니다. 김정일 이후 김정은 체제가 빠르게 안정화된 것도 중국의 신속한 대응이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중국은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호들갑을 떨었던 한국 정부를 자제시키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남북관계는 다시 좋아질 것입니다. 향후 한국에서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MB정부가 망친 현 남북관계를 복원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다시 남북관계가 호전된다면 지금의 북중 관계 역시 일정한 변화의 요구에 직면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동아시아 정세 변화에 높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분단된 한반도에 아직도 많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강대국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다 슬기로워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전반적으로 내용에 대해선 아쉬움이 많은 책입니다. 하지만 북중 관계와 동북아 정세에 대해 한번쯤 고민의 필요성을 준다는 점에선 의미가 있는 책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엔 나쁘지 않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특정 인물이나 사건의 사실 여부에 대해선 각자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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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 동녘선서 20
조성오 엮음 / 동녘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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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임진년 새해에 들어 지난 해 목표했던 독서량보다 딱 10% 더 늘리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한 권을 온전히 읽었습니다. 역시 올해도 ‘양보단 질’이라는 핑계를 찾아야만 할 듯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정말 오래된 책입니다. 초판이 군사정권 시절인 1984년에 나왔고, 제가 읽은 개정판이 1991년에 나왔습니다. 꽤 오래된 책이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이 책이 꾸준히 읽히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자가 역사학이나 경제학의 세계적 석학이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내용이 천지개벽할 정도로 색다르다거나, 무언가 특별하기 때문도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 단 하나일 것입니다. 과감 없이 있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를 기술했다는 것.

 

10년도 더 지난 대학시절, 선배의 권유로 읽었던 책. 하지만 오랜 시간 잊고 있다가 다시 꺼내든 이 책은, 수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다시 깨우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탐욕과 거기에 대한 또 다른 인간의 저항입니다.

 

책은 원시공동체 사회에서 자본제 사회까지 인류가 걸어온 역사, 특히 경제사적 측면으로 우리가 걸어온 길을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산력이 너무나 낮아서 타인이 타인을 ‘착취’할 수조차 없었던 원시 공동체 사회는 순수 공산주의 사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차츰 인간의 지능이 발달하고 도구를 사용하고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서게 되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진화와 진보, 그리고 풍요와 발전이라는 단어들이 마구마구 쏟아지게 된 것이죠.

 

하지만 원시 공동체 사회 이후,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제 사회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점차 놀라운 속도로 발달한 진보와 풍요를 결코 ‘나누려’하지 않았습니다. 착취가 가능한 그 순간부터 계급이 발생하고,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을 죽기 바로 전까지 악랄하게 착취해 왔습니다. 유감이지만, 그게 우리가 걸어온 역사입니다.

 

이제 과거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된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돈이 없어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고, 아파도 병원을 찾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은 이 시대에, 대기업들은 남아도는 돈을 고용에 쓰지 않고, 쌓아만 둡니다. 그리곤 경제를 살리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고 협박하죠.

 

정부 역시 경제를 살린다고 하며 사실은 대기업을 살리고, 기득권층의 이익에 복무합니다. 국가라는 자체가 지배 계급의 착취와 억압을 더욱 효율적으로, 도와주기 위해 탄생한 것이기에, 그 임무에 영원히 충실히 복무합니다.

 

2012년 흑룡띠의 해입니다. 많은 희망찬 전망들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올 해가 경제적으로 나아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불황이 더욱 극심해 질 것이라 말합니다. 아마 그 전망이 맞을 듯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불황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들 것입니다.

 

99%의 대다수의 ‘못 가진 자’들이 1%의 소수의 ‘가진 자’들에게 저항하는 시대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습니다. 그렇게 발전해 온 것이 역사입니다. 하지만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자본주의, 거기에 그 기형적 변화인 신자유주의를 깨부수고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크다 큰 용기와 도전이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는 가진 자도 못 가진 자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류가 밟아온 역사의 길을 곰곰이 되돌아보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도전을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생 뿐만 아니라, 누구나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봐야 할 책입니다.

 

새해, 아직은 어둡지만, 곧 다가올 아침을 기다려 봅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노예의 투쟁은 노예제 사회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모순, 노예 소유자 계급과 노예 계급의 모순이 폭발한 것이었으며 이는 노예 소유자 계급에게 심각한 위협과 공포감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소수인 노예 소유자 계급은 자신들의 재산과 지위, 특권을 지속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장치를 만들어 냈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였습니다.

노예 소유자 계급이 노예의 반항, 나아가 평민의 반항을 막기 위해 주로 의지한 방법은 폭력이었습니다.

 

그들은 군대, 경찰, 법정, 감옥 등 폭력적인 국가 기구를 만들어 놓고 노예나 평민에게 노예제 사회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사회 질서, 즉 법을 지킬 것을 강요했습니다.

 

만약 이러한 사회 질서를 지키지 않고 노예제 사회의 존립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면 그들에게 법의 이름 아래 가혹한 형벌을 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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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액션플랜 - 캠퍼스 비밀 삽질프로젝트
황윤지 지음 / 들녘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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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은 그야말로 ‘청춘시대’였다. ‘이게 무슨 개소리냐!’고 발끈하는 젊음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2011년이 청춘들이 너무나 살기 좋았던 해라는 말이 아니다. 이른 바 ‘청춘 담론’‘20대론’이 판쳤던 해라는 뜻이다.

 

정말 그랬다. 너도 나도 청춘을 외치고, 마치 그들의 대변자인양, 혹은 준엄한 부모 역할을 하려 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20대들에게 관심이 많았는지, 반값등록금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자, 많은 정치인들이 20대 근처를 기웃거렸다. 뭐, 표현이 좀 과해도 어쩔 수 없다. 정말 기웃거리기만 한 정치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지금의 20대들은 욕이란 욕은 다 먹고 돌아 댕겼다. 무뇌아부터, 잉여인간, 개새끼론 등등. 당최 무슨 죄가 그리 많은 지, 사회로부터, 기성세대로부터 암튼 무지하게 욕먹고 다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 싸가지가 없었던 것은 기성세대들이었다. 그들을 개미지옥에 몰아넣고, 투표나 정치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캠퍼스에 낭만 따위는 개나 줘버리게 만들어 놓은 당사자들이, 오히려 20대를 비난했다. 투표율 저조의 모든 책임을 20대에 돌리고, 심지어 대통령은 군대에서 죽으면 마음이 약하다고 하고, 반값등록금 공약은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뻥치고, 취업난에 대해서는 눈높이를 낮추라고 떠들어댔다.

 

최근 결혼률이 급격히 떨어지고, 결혼을 했어도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들이 많은데, 20대들은 거기에 더해 사랑의 본능까지 유예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맘 편히 연인을 안을 수도, 사랑을 약속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런 개 같은 상황을 만들어온 기성세대가 욕이란 욕은 다 했으니, 20대들이 느꼈을 분노와 허탈함은 말해 무엇 하랴. 아마 극심한 살인충동에 휩싸이지 않았을까. 그나마 우리 청년들이 한없이 착해서 그렇지, 그리스 청년들은 일단 불부터 지르고 봤다!

 

이 책은 20대가 얼마나 발랄하고, 기발하고, 또 속이 깊은지, 그리고 여전히 아름다운지 그대로 보여준다. 삭막한 취업인 양성소로 전락해버린, 부모들의 등골과 학생들의 불안한 미래를 저당삼아 장사에만 몰두하고 있는 대학에 텃밭을 만들어 배추를 심고, 무를 심어 도시농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그들의 ‘삽질’은 유쾌하고 즐거웠다.

 

사회가 원하는, 기업이 원하는 스펙이 아니면 생존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놓고, 정작 청춘들이 스펙에만 몰두한다고 비난하는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넘치는 지금, 두꺼운 토익책 대신 낫과 호미를 들고 등교하는 ‘씨앗들’의 모습은, 20대들이 기성세대의 뜻대로 움직이는 안드로이드들이 아님을 보여준다.

 

물론 이들이 지금 20대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울러 그들과 달리 취업을 위해 몰두하는 이들을 모두 ‘잘못됐다’고 할 수도 없다. 물론이다. 다만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구조가 원천적으로 차단당한 지금, 남들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에 나서는 이들의 모습에 박수를 쳐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그들이 그 어떤 원대한 사상과 목표가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봤듯, 20대들은 무시하지 못한 저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의해 농락당하고, 이용당할 20대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다. 그게 당연하기도 하고.

 

저자의 말대로 철 지난 20대론은 그만 떠들자. 저자는 인생이 정답을 20대 안에 못 찾으면 망하는 토익 시험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지당하다. 정답이 어디 있나?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젊음을 사는 것이며, 어떤 젊음이 무의미한 삶인가? 이명박 대통령처럼 자기가 안 해본 게 없다고 떠드는 어른들은 더 이상 입을 놀리지 말아야 한다. 자기가 지금 이 시대의 20대가 아니라면 말이다.

 

각자 처한 상황에 맞게 그들은 삶을 꾸려가고 있다. 거기에 이래라 저래라 토 달지 말자. 그냥 같이 살아가자. 그들의 고민이 무언지, 혹 그 고민이 멍청한 어른들의 잘못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제발 성찰 좀 하면서 살자. 그게 최선 아닌가 싶다.

 

저자를 비롯한 일곱 명의 청춘들. 그들의 유쾌발랄한 삽질은 정말 재미있었고, 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줬다. 비단 우리 농업의 문제만이 아닌, 대학 등 교육 문제, 세계적 환경 문제 등 한 권의 책에 많은 이야기들이 꽤 재미있게 담겨있다.

 

이들의 무모한 도전이 또 어떤 꽃으로, 열매로 이어질지 궁금하다. 건투를 빌고, 또 존경과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그대들의 고민과 도전이 모두 모두 값진 열매로 돌아올 것임을 믿는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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