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깊은 밤, 기린의 말 - 「문학의문학」 대표 작가 작품집
김연수.박완서 외 지음 / 문학의문학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인정합니다. 제가 약간 유별나다는 사실을. 책을 읽을 때, 상당히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으로 읽는다는 사실을. 남들이 보면 인생 참 피곤하게 산다고 느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어떤 이는 저에게 ‘활자 중독증’이라는 진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타당하고, 또 어떤 점에서는 과분한 진단입니다. 일단 제가 그런 진단을 받을 만큼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하다고 느끼니까요.
먼저 하는 일이 글을 쓰고 읽고 고치고 다시 고치는 직업이기에 글에 대한 묘한 강박증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식당엘 가서도 벽에 붙은, 혹은 메뉴판에 붙은 음식 이름과 설명, 음식의 유래 등등을 읽으면서 띄어쓰기와 오타를 찾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뭡니까, 이게.
또 지금은 그나마 상당히 호전됐다고는 하지만, 잡지를 읽을 때면 표지부터 시작해서, 광고 하나하나 목차 하나하나를 전부 읽고 나서야 다음 페이지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양심적으로 광고는 읽지 않습니다만, 이것도 뭡니까.
때문에 때로는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닌 텍스트를 읽어나가고 있는 저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상당히 안 좋은 부작용인 셈이죠. 하지만, 분명 단언컨대 적어도 소설을 읽을 때에는 다른 모드로 들어갑니다.
그 다른 모드는 다름 아닌 ‘받아들임’입니다. 무언가 책에서 잘못되고 부족하고 어색한 부분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글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뭐, 어차피 제가 문학작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는 깜냥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소설을 그런 불순한 자세로 읽으면 천벌을 받는다는 어느 소설가의 준엄한 경고(!)가 기억나기 때문에, 그냥 있는 그대로 읽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깊은 밤, 기린의 말》은 한 문장, 한 편을 그야말로 아껴가며 읽은 책입니다. 수록된 작품들도 그렇거니와, 작가들의 내공과 깊이가 절로 느껴지는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박완서, 이청준 작가의 작품과 김연수, 이명랑 등 비교적 젊은 작가, 그리고 최일남, 윤후명과 같은 깊은 연륜을 가진 작가의 작품까지. 글들의 성찬이었습니다.
작품들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매우 불순한 행위라 사료되는 까닭에 담지 않겠습니다. 다만 각 작품에서 받은 느낌이랄까요. 그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요?
김연수의 〈깊은 밤, 기린의 말〉은 분명 슬픈 이야기임이 분명한데도 어떤 발랄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뭐라고 할까, 단어들이 톡톡 튀더라고요. 《대책없이 해피엔딩》을 읽은 후여서 그런지, 일단 인상은 좋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는 중년, 노년 문학의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습니다. 왠지 범접할 수 없는 삶의 연륜도 느껴지고요. 쓸쓸하면서도 무덤덤함이 저는 참 좋습니다. 최근에 선생님의 마지막 작품집 《기나긴 하루》를 아껴두고 있습니다.
이청준 님의 〈이상한 선물〉도 매우 즐거운 소설 읽기였습니다. 아직 선생님의 작품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지만, 선생님 특유의 아련함이 참 좋습니다. 이나미 작가의 〈마디〉, 권지예 작가의 〈퍼즐〉도 인상 깊은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가장 감동을 느낀 작품은 최일남 작가의 〈국화 밑에서〉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예전부터 이런 문장, 문체, 쓸쓸함을 참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깊은 삶의 성찰과 농담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작가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승우의 〈한 구레네 사람의 수기〉, 윤후명의 〈소금창고〉, 조경란의 〈파종〉, 이명랑의 〈제삿날〉 모두 즐거운 소설 읽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전 여전히 소설은 먼저 읽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 안에 담겨진 내용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답고 애정하다 해도 재미가 담겨 있지 못하면 결국 다음 페이지를 넘길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 저의 어리석고 독단적인 기준으로 보면 이 책은 상당히 성공한 것이 아닐까, 이 역시 혼자 어리석게 판단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소설 읽기는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