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우리 엄마 아빠 이야기
백남호 글.그림 / 철수와영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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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월간 《작은책》의 표지 그림을 그려주시는 백남호 님이 ‘우리 둘레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를 글과 함께 모았습니다. 이미 《작은책》을 통해 보아왔던 따뜻한 그림들과 함께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담은 그림들이 가득합니다.

 

이 책을 추천해주신 손석춘 선생님의 글이 처음부터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엄마 아빠는 왕도 왕비도 아닙니다. 부자도 아닙니다. 미용사인 엄마, 문구점을 하거나 떡볶이를 파는 아빠를 비롯해 우리가 생활하면서 만나는 어른들입니다.…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왕이나 왕비는 없어도 되지요. 실제로 대다수 나라에 없어요. 부자 또한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학용품과 옷 만드는 공장의 노동자는, 쌀과 배추 농사짓는 농민은, 지금 이 순간도 어디선가 땀 흘리며 일하는 우리 모두의 엄마와 아빠는 정말이지 없으면 안 될 분들이지요.”

 

그렇습니다. TV나 영화를 보면 등장하는 돈 많은 기업의 회장님, 사모님 그리고 그 자녀들의 화려한 이야기, 언제나 으리으리한 집에서 사는 이들만이 등장하는 이야기만 나옵니다. 서민들의 삶을 다루는 드라마는 외면받기 일쑤고, 언제나 신데렐라, 왕자님을 꿈꾸는, 말 그대로 ‘꿈같은’이야기만 환영받습니다.

 

물론 정작 우리네 삶이 너무 팍팍하고 고통스럽기에, TV나 영화에서나마 그런 고통을 잊기 위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현실을 언제까지나 외면할 순 없습니다. 아울러 자세히 살펴보면, 또한 조금만 생각을 달리 하면 우리네 삶이 그 어떤 것 못지않게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왕자나 공주로 태어날 가능성, 대기업 회장의 손자, 손녀로 태어날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자신도 모르게 부모님이 부자가 아니라고, 혹은 왕 못지 않은 대기업의 회장님이 아니라고, 원망한 적은 없었나요? 만약 그랬다면, 물론 철이 들면 달라지겠지만, 정말 슬픈 일일 것입니다.

 

책은 바로 우리 엄마 아빠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미용사 엄마는 다른 사람의 머리를 예쁘게 매만져 주시고, 공주보다 귀한 딸의 머리카락을 예쁘게 세 갈래로 땋아주십니다. 친환경 린스를 만드는 방법도 알고 계시죠. 또 우리 아빠는 학용품을 파십니다. 좁은 문방구에 물건이 하도 많아 구석구석 틈 하나 없이 빼곡하지만, 아빠는 구석구석에 있는 모든 물건을 훤히 꿰고 계십니다.

 

또 우리 아빠는 출출한 퇴근 시간, 사람들에게 휴식 같은 ‘떡볶이’를 파시고, 엄마는 낮에 집에서 돌돌 말은 김밥을 가져 오시죠. 우리 아빠는 집을 지으시는 건설 노동자, 맛있는 과일을 파는 과일장수, 남의 옷을 자기 옷보다 소중히 여기는 세탁소 주인,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연탄 배달부, 새벽같이 집집마다 맛있는 우유를 배달해주시는 우유 배달부, 무거운 짐들을 척척 옮겨 새로운 집에 놓아주시는 이삿짐 센터 일꾼, 맛난 짜장면을 배달해주는 중국집 배달부, 동네를 깨끗하게 치워주시는 환경미화원, 우리에게 맛있는 밥을 주시는 농부, 몸이 불편한 사람, 무거운 짐을 든 사람, 바쁘게 가야 하는 사람, 나이 드신 어르신들을 어디든지 모셔다 주시는 택시 기사입니다.

 

또 전업주부로 하루 종일 힘든 가사노동을 하시는 우리 엄마, 그리고 싱싱한 생선을 새벽 일찍 수산 시장에 나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추우나 더우나 하루도 안 거르시고 사와서 파시는 생선 장수 울 엄마도 있어요. 엄마가 일하는 데는 늘 물이 흥건해서, 늘 장화를 신으시죠. 엄마는 밖에서 식사를 하세요. 엄마가 밥을 먹을 때 제가 어깨를 주물러 주곤 한답니다. 아, 공장에 나가 작은 기계 부품을 끼워 맞추는 일을 하시는 울 엄마도 있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온 울 엄마 이야기도 있답니다. 회사 사정이 안 좋다며 막무가내로 엄마를 쫓아낸 회사에게, 다시 일하게 해 달라고 엄마는 친구들이랑 싸우고 있어요. ‘텔레비전에서는 엄마가 아주 나쁘고 무서운 사람처럼 자꾸 싸우는 모습만 보여’주지만, ‘우리 엄마는 집에서 방구 뿡뿡 뀌는 착한 엄마’에요!

 

책에 나오는 엄마, 아빠는 모두 백남호 님이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삶에 대해 그 누가 함부로 떠들 수 있을까요. 대기업의 손녀로 태어난 몇 안 되는 이들은 자영업을 하시는 수많은 엄마, 아빠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고, 마치 북한처럼 3대에 걸쳐 기업을 세습하는 회장님은 자랑스럽게, 아들·딸들을 데리고 다니며, 짐짓 거만하게 한국 경제를 논하는 현실에서, 우리와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엄마, 아빠를 감히 그 누가 가난하다고, 불행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은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저 먼 외국의 오래된 동화가 아니고, 시시껄렁한 이들을 위인이랍시고 거창하게 만든 책들이 아닌, 정말 이 시대 우리 아이들이 읽어야 할, 꼭 필요한 그런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처럼, 혹은 일부러 삶을 외면하며 살고 있는 어른들이 읽어야 할 책이기도 합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그들이 없으면 결코 편하게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이 읽어야 할 책입니다.

 

‘철수와영희’는 언제나 개념 어린 책들을 펴내왔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책을 만드는 출판사가 더 많아야 합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늘 조연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이지만, 사실은 이 세상의 주인공인 분들.

 

엄마, 아빠가 있어 세상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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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창고 살인사건
알프레드 코마렉 지음, 진일상 옮김 / 북스토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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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제가 미스터리, 추리 문학을 상당히 좋아하는 것을,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시고, 알보다 조금 작은 분들은 모르시지만, 암튼 그렇습니다.(어쩌라고?) 때문에 이 책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음흉한 음모의 냄새에 즉각적으로 반응했음은 물론입니다.

 

아울러 표지글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아하! 와인 발효 가스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구나! 사실 와인 제작 과정을 전혀 몰랐던 저로서는 부끄럽지만 처음 알게 된 사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와인 발효 가스를 이용해 얼마나 치밀하고 정교한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을까? 더더욱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긴장과 호기심으로 시작된 독서는 의무감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어졌고, 마지막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찾기에 이르렀습니다. 아, 이게 웬 비극인가. 황금 같은 주말에 고르고 골라 읽은 책이 하필 왜 이런 비극적 마무리를 나에게 준단 말인가.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피살자에 신상을 캐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용의자들과의 대화, 주인공 시몬 폴트 경위의 고독과 함께 하는 수고양이, 100% 연애 관계로 이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카린 발터 양. 오래된 포도 압착장의 미로와 같은, 지하 동굴처럼 꼬이고 꼬이는 관계들. 이런 그럴싸한 스토리 전개에도 불구하고 왜 작가는 이렇게 허망하게 이야기를 끝맺었을까요.

 

작가가 추구했던 최대한의 사실성이 결국 이렇게 감당하지 못할 허무로 작품을 끝나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허무맹랑함보다는 최대한 사실적인 것이 더 낫다는 작가의 믿음이 너무 과하진 않았을까요.

 

사실 그런 것 같습니다. 가장 최근 극장에서 본 영화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에서 느꼈던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함이 가져다 준 재미와 허무는 사실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습니다. 영화의 고수들은 이 영화가 전작에 비해 너무 심하게 ‘뻥’이 많아서, 오히려 재미가 반감됐다고 평가합니다. 저도 역시 좀 심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그렇게 보면 최근 봇물을 이루고 있는 일본 추리소설, 미스터리 소설들 중 너무하다싶을 정도로 허무맹랑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뭐 우리소설 중에서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않는, 독자를 우롱하는 작품들이 눈에 보입니다.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반전에 성공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게 이야기를 전개하다, 결국 스스로 그 이야기에 감당하지 못해 허겁지겁 초현실적 마무리로 끝나는 작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때문에 어쩌면, 아주 어쩌면 이 책의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놀라운 반전, 트릭을 기대하셨나? 여보게들,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네. 삶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야”라고 말이죠.

 

여기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과연 ‘있을 법한, 재미없는 이야기’와 ‘과장이 지극히 많지만, 또한 재미도 쏠쏠한 이야기’중 어디에 손을 들어줄 것인가, 말이죠. 음, 어렵습니다. 하지만 또한 지극히 쉽기도 합니다. 전 후자에 손을 들고 싶습니다.

 

제 변치 않는 믿음,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제1원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책을 통해, ‘인간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언젠가 지은 죄는 돌아오기 마련이다’등을 이야기하려 했다면, 그와 같은 교훈을 전달하면서도 얼마든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동시에 알아야 했습니다. 사실 그런 이야기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어쩌면 무지한 제가 숨은 작가의 더 깊은 메시지를 못 읽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담 저의 무지를 탓할 수밖에요. 하지만 그래도 크게 아쉬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미스터리 소설을 쓴다는 것, 추리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문에 코난 도일, 아가사 크리스티, 모리스 르블랑, 앨러리 퀸, 챈들러, 대실 해밋 등등이 추앙을 받는 것입니다.

 

언젠가 정말 괜찮은 작품으로 작가를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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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의 제왕
이장욱 지음 / 창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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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아련한 감동을 준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서는, 나에겐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워낙 눈물이 많고, 마음이 약해 빠진 녀석이라, 질질 잘 울고 쉽게 울컥하긴 하지만, 내 기억 상 문학작품으로 이처럼 애매모호한 감동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난 역시 신파에 약하다.

 

이장욱이란 작가를 또 이제야 알았다. 무지하면 의외로 즐거운 점도 있으니, 이렇게 느닷없이 괜찮은 작가의 괜찮은 작품을 접할 수 있다.《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을 들어본 기억은 있지만, 정작 작가는 알지 못했다.

 

충동 구매한 책이다. 사전지식 없이 소설 읽기를 즐기는 편이다. 무지를 덮는 변명임에 틀림없지만, 또 매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정글을 탐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장욱의 소설은 나른하다. 또 무참하다. 판타지와 미스터리를 섞어놓은 듯한 스토리 전개는 환상과 현실을 구분키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 중얼거리듯 이어지는 독백과 대화는 삶의 절대고독과 해프닝 사이를 위험하게 오간다.

 

〈동경소년〉의 ‘유끼’. 그녀의 죽음 같지 않은 죽음을 애써 지켜주는 ‘그’. 그리고 그런 그를 마치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처럼 살펴보는 주인공과 일행들. 그 사이 고독은 점차 환상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너무나 평범하여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작가 와따나베 포우처럼 유끼와 그는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다, 그렇게 사라진다. 남은 것은? 오직 살짝 느낄 수 있는 흔들거림 뿐이다.

 

〈변희봉〉역시 끊임없이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오직 ‘만기’와 만기의 부친만이 알고 있는 배우 변희봉. 그의 존재는 어디에서도 부정당하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 그리고 삶의 척박함으로 이혼마저 당한 만기에게 변희봉은 자신과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어디에든 존재하지만, 오직 특별한. 때문에 동대문운동장에서 날아오는 야구공은 수많은 이 땅의 만기를 위한 역전 만루 홈런일 수밖에. 슬쩍 울컥하게 만든 작품이다.

 

〈고백의 제왕〉은 시종일관 불편함과 외면으로 일관하다, 급작스런 고백으로 끝맺는다. 결국 인천의 장례식장까지의 거리만이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거리일 뿐, 누구도 쉽사리 바다로 나아가지 못한다. 고백의 제왕 ‘곽’을 두려움과 호기심과 동경과 환멸의 기억으로 포장시킨 주인공과 동기들은 결국 곽이 그 누구보다 자신들과 흡사한 인간임을 깨닫게 된다. 삶은 그렇게 환멸적인 나와의 만남인 것.

 

〈아르마딜로의 공간〉은 누가 누구에게 어떤 영향으로 삶을 간섭하는지, 도무지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이 시대를 보여준다. 모든 것이 인과 관계에 얽혀 있다는 종교적, 때론 철학적 의미를 부여할 것 까진 없어 보인다. 다만 끊임없이 깨어있지만, 깨어있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잠들 수 없는 우리를 비쳐줄 뿐이다.

 

죽은 아내의 유령과 함께 떠난 유럽여행. 남자는 끊임없이 서성거리고 중얼거린다. 의미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행위. 잠들지 못하는 밤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순종. 목적이 목적일 수 없는 삶 속에서 필요한 것은 어쩌면, 상대에게 내 ‘말’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아닐까. 〈기차 방귀 카타콤〉은 조절되지 않는 괄약근의 서글픔이 전해지는 ‘오래 묵은’불면을 보여준다.

 

‘목란’은 낡고 오래된, 하지만 외진 곳에 위치한 모텔. 그 곳엔 죽음이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죽음은 축적되고, 다시 그 위에 한 겹을 쌓으려는 이들이 찾아온다. 하지만 어느 새 죽음과 삶은 섞이고, 그 황량한 풍경은 프라모델을 조립하는 아저씨들의 등 뒤로 먼지처럼 내려앉는다. ‘고철동’의 낡고 구식의 느낌을 없애기 위해 ‘목란동’으로 바뀌었듯. 역무원의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외로움 때문이듯, 죽음을 이끌고, 죽음을 위해 당도한 이들에게 정작 죽음은 쌀쌀맞게 바라만 본다. ‘데쓰’는 도망가고, ‘씨발놈아! 살아야지!’를 외치는 고희성은 낮은 목소리에 오히려 더 익숙하다. 공부하러 모텔을 찾아와 죽음을 쌓은 여고생들의 ‘명랑하지만, 책을 읽는 듯한 어조’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목란은 너무 쉽게 〈곡란〉으로 바뀔 수 있으니.

 

불면의 밤이 이어지면, 결국 위장된 잠과 철저한 외면 만이 남는다. 서로의 불면과 서로의 죽음을 파악하지 못한 채 사람들은 제각각의 불면을 긍정하고, 헛된 공간 속에 의미를 쌓아두려 애쓴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는 이 책에서 가장 작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 작품이다. 기억을 지우기 위해 아내를 찾아오는 남편의 유령과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기억을 부정하는 딘과 애슐린은 행복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독은 인공위성일까, 온전한 별일까. ‘잠든 척 눈을 감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고독이다.

 

〈안달루씨아의 개〉의 ‘옹’은 바지에 오줌을 지린다. 살아있다. 하지만 그 살아있음은 오직 죽음으로만 확인된다. 아내의 묘를 찾아가는 그의 여정엔 ‘인수 애비’처럼 황량한, 의미를 알 수 없는 삶들이 조여든다. 그의 길을 막은, 무섭도록 큰 개 역시 그의 삶이 지려버린 오줌을 통해 그를 망각한다. 그가 친구 ‘박’에게 맞았든, 혹은 때렸든 그 기억은 중요치 않다. 그를 추적하고 감시하는 ‘개미’들이 여전히 뻗어가는 그의 삶을 바라보고 있다면, ‘침엽수’와 같은 그의 살아있음이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단편 하나하나가 전해주는 애매모호함과 살짝의 울컥, 그리고 아련함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공간의 대책없음을 일깨워준다. 누구도 편하지 않은 그 편안함에 대한 긍정. 그것이 결국 불면의 밤을 정당화시켜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척 아껴가며, 그러나 참 빨리 읽어 내려간 소설이다. 당연히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적어도 내 생각엔, 참 잘 쓰는, 작가라고 생각된다. 모든 이들이 작가의 바람대로 편안하게 잠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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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히틀러 - 건달에서 총통으로

 

[역사의 해석, 정답이 가능해?]

 

아돌프 히틀러, 그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 스탈린과 함께 세계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이자, 학살자로 그의 이름은 끊임없이 거론된다. 수백만 유태인들을 계획적으로 집단 학살한 그의 죄악에 대해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 히틀러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가 꿈꾸었던 세상, 그가 바라던 독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무엇을 그리고 있었을까.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한 번 읽은 후 그대로 책장에 고이 모셔두고 있던 책이다. 그러다 문득 다시 손을 뻗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을 히틀러에 묘사한 어느 예술가의 그림을 본 기억도 잠깐 들었긴 했지만.

 

저자는 이른 바 정식으로 문학을 배운 이가 아닌 것 같았다. 대학도 이공계열을 졸업했고, 특별히 등단을 했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그런 것을 따지고 있는 내 자신이 먼저 우스웠다. 그런 나는 문학 작품 감상 허가증이라도 취득하고 읽었는가.

 

책은 히틀러의 청년 시절부터 시작된다. 가난한 화가이자 건달이었던 히틀러. 삶에 대한 그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었던 젊은 시절. 부패한 권력에 대한 증오와 가족의 행복을 송두리째 앗아갔던 유태인들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되었던 젊은 시절은 훗날 그를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살인마로 만들고 만다.

 

저자는 히틀러의 인간적인 고뇌와 상처를 소개하려 노력했다. 부모의 비참한 죽음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목격한 전쟁의 광기와 무의미성. 그리고 돈이 없고, 권력이 없는 힘없는 국민들만 죽어야 하는 참혹한 현실을 겪으며 히틀러는 점차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뇌하게 된다.

 

이어 그는 양부모와 사랑하는 여인마저 유태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또 자신도 부패한 유태인 사업가에 의해 죽기 직전까지 폭행을 당한다. 훗날 유태인에 대한 그의 증오는 이렇게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는 1차 세계대전 직후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독일 국민들의 고통과, 동시에 점점 커지는 반유태인 정서를 뚜렷이 목격하게 된다. 전쟁으로 모든 국민들이 고통 받고 있을 때에도 유태인들은 무기를 팔고, 권력을 이용해 더 많은 부를 챙기고 있었다. 물론 대다수 유태인들은 힘없고 선량했지만, 독일 사회에서 점점 유태인은 악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었다. 많은 독일 국민들이 나치당에 협력하고 동조하고 추종하게 된 것은 집단적 광기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역사적 근원이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히틀러가 청렴하고 솔선수범하는 정치가의 이미지를 잘 살려, 결국 국가의 권력을 장악했다고 설명한다. 절대 부정한 이익을 취하지 않았으며, 오직 국민들과 함께 겸손한 자세로 정치를 펴나갔다는 것이다. 히틀러와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독일 경제는 몰라볼 정도로 발전했으며,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다시 일어선 위대한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전 세계에 과시하게 된다. 아우토반과 폭스바겐도 히틀러 시대의 산물이다.

 

물론 그가 절대 권력을 잡은 후에는 다른 양상이 벌어진다. 철저한 독재를 추구하며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결국 또 다른 세계대전을 일으켜 인류의 또 다른 재앙을 불러온 것이다.

 

어떠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물론 히틀러와 스탈린과 같은 명백하고도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이들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는 없다. 영원히 히틀러는 악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든 것에는 그 원인을 제공하는 계기, 배경, 사건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해 가는 과정,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른바 선진국, 승전국들의 파렴치한 행위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죄악상 등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넓은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히틀러라는 인물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역사의 해석은 언제나 승자의 몫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규정되고 단정 지어질 수 없다.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다시 태어난다. 히틀러에 대한 평가, 나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는 없겠지만, 당시 독일의 광기와 집단 최면과도 같았던 모습들은 독일을 넘어 세계사적 차원으로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해석에 정답은 없다. 관점만 있을 뿐이다. 《나의 투쟁》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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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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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제가 일하고 있는 잡지 《민족21》에서 〈저자와의 대화〉라는 연재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매달 한 권의 책을 선정하고 그 저자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이지요. 그 중 창원대 이성철 교수님과 이메일 인터뷰를 했는데, 당시 선정한 책이 《영화가 노동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영화로 만나는 15개의 노동이야기’라는 부제가 있는 이 책은 여러 국가들의 노동을 주제로 한 영화들을 소개하며, 그 역사적 맥락과 의미를 짚어주는 꽤 괜찮은 책이었습니다. 서평도 올렸습니다.

 

그때 알게 된 감독이 바로 켄 로치입니다. 노동자 및 서민들의 삶을 유쾌하지만 현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 꽤 있습니다. 매우 멋진 분이더군요. 켄 로치 감독의 영화 중 이 책과 동명의 작품이 있습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비정규직 미화노동자들의 조직화 사업을 다룬 작품입니다.

 

책을 읽으며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게으름으로 아직까지 미뤄만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죠. 그리고는 폭풍 감동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책은 1912년 미국 메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발생한 섬유산업 여성 노동자들의 전설적인 파업을 다루고 있습니다. 미국 노동사에서 ‘빵과 장미의 파업’이라 부르는 이 사건은 헬렌 켈러도 동참했던 역사적 운동이었습니다. 책은 로렌스 토박이 소년 제이크와 이탈리아 이민 노동자의 딸 로사, 이 두 아이들이 바라본 파업의 모습들, 그리고 너무나 아름다운 연대의 과정이 잘 담겨져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이윤이 창출되는 과정에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이익은 상충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혹한 노동조건에서 살인적인 노동을 감내해야 했던 노동자들은, 그러나 정당한 땀의 대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임금삭감 마저 이뤄지자, 생존을 위해 그들은 파업을 선포합니다.

 

그 치열한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공권력에 의해 폭행당하고, 살해당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인종과 국적을 가진 노동자들은 단결합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우리는 결코 움직이지 않으리!”

 

당시 미국의 노동자들은 연대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장기간의 파업으로 추위를 이겨낼 땔감, 당장 먹어야 할 빵조차 구하기 힘들어진 상황에서 타 지역의 노동자들은 모금운동을 전개해 식량과 땔감으로 보냈고, 파업 노동자들의 자녀들을 자신의 집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해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마치 부산에서 파업을 전개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대전, 광주, 춘천, 서울 등 전국의 노동자들이 대신 자녀들을 맡아 보호해준 셈입니다. 이러한 연대의 힘이 바로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아닐까요.

 

소설은 행복한 결말을 맺습니다. 제이크와 로사도 다시 희망을 찾게 되지요. 뭉클한 감동으로 책장을 덮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봅니다. 김진숙 동지의 300일이 넘었던 고공투쟁, 지금도 추운 날씨를 버티며 1500일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투쟁.

 

그런데 다른 편에서는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분노와 환멸로 기억되는 이랜드가 미국의 야구구단을 인수한다고 하고, 삼성은 세계에서 가장 나쁜 기업 3위에 선정되고 있습니다.

 

동네 빵집은 대기업 프랜차이즈와 재발 3세 딸들의 고품격(!) 제과점 겸 커피전문점에 의해 문을 닫고 있습니다. 취업하려고 해도 자리가 없고, 있어도 대부분이 비정규직인 현실. 언제 해고되어도 아무 말 못하고 쫓겨나야 하는 현실.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는 쌍용 해고자들의 죽음.

 

지금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은 더없이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빵과 장미’를 전해줄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요. 추악한 대기업의 횡포와 정부의 죄악을 언제까지 바라봐야만 할까요.

 

결국 연대의 힘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들이, 대도시 노동자와 지방 노동자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고 요구해야, 세상은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결국 같은 노동자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있는 자들, 썩은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언론을 끊고, 그들의 똘마니 역할을 하고 있는 정당을 거부하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정치인들을 몰아내야 할 것입니다. 한미FTA에 찬성표를 던진 정치인들을 끝까지 기억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총선과 대선에서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해야 할 이유입니다.

 

인간은 빵 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장미도 필요합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아름다움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어진 세상은 지옥입니다. 단 1%의 행복을 위해 99%가 착취당하는 세상은 이미 정당성이 사라진, 없어져야 할 지옥일 뿐입니다.

 

눈물겹게 아름다운 노동자들의 연대를 보여준 로렌스의 ‘빵과 장미의 파업’.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든 노동자들의 투쟁과 절규에 눈 감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용산참사의 아픔, 쌍용자동차의 눈물, 이랜드, 홈플러스,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눈물과 죽음을 잊어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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