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의 제왕
이장욱 지음 / 창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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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아련한 감동을 준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서는, 나에겐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워낙 눈물이 많고, 마음이 약해 빠진 녀석이라, 질질 잘 울고 쉽게 울컥하긴 하지만, 내 기억 상 문학작품으로 이처럼 애매모호한 감동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난 역시 신파에 약하다.

 

이장욱이란 작가를 또 이제야 알았다. 무지하면 의외로 즐거운 점도 있으니, 이렇게 느닷없이 괜찮은 작가의 괜찮은 작품을 접할 수 있다.《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을 들어본 기억은 있지만, 정작 작가는 알지 못했다.

 

충동 구매한 책이다. 사전지식 없이 소설 읽기를 즐기는 편이다. 무지를 덮는 변명임에 틀림없지만, 또 매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정글을 탐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장욱의 소설은 나른하다. 또 무참하다. 판타지와 미스터리를 섞어놓은 듯한 스토리 전개는 환상과 현실을 구분키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 중얼거리듯 이어지는 독백과 대화는 삶의 절대고독과 해프닝 사이를 위험하게 오간다.

 

〈동경소년〉의 ‘유끼’. 그녀의 죽음 같지 않은 죽음을 애써 지켜주는 ‘그’. 그리고 그런 그를 마치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처럼 살펴보는 주인공과 일행들. 그 사이 고독은 점차 환상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너무나 평범하여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작가 와따나베 포우처럼 유끼와 그는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다, 그렇게 사라진다. 남은 것은? 오직 살짝 느낄 수 있는 흔들거림 뿐이다.

 

〈변희봉〉역시 끊임없이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오직 ‘만기’와 만기의 부친만이 알고 있는 배우 변희봉. 그의 존재는 어디에서도 부정당하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 그리고 삶의 척박함으로 이혼마저 당한 만기에게 변희봉은 자신과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어디에든 존재하지만, 오직 특별한. 때문에 동대문운동장에서 날아오는 야구공은 수많은 이 땅의 만기를 위한 역전 만루 홈런일 수밖에. 슬쩍 울컥하게 만든 작품이다.

 

〈고백의 제왕〉은 시종일관 불편함과 외면으로 일관하다, 급작스런 고백으로 끝맺는다. 결국 인천의 장례식장까지의 거리만이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거리일 뿐, 누구도 쉽사리 바다로 나아가지 못한다. 고백의 제왕 ‘곽’을 두려움과 호기심과 동경과 환멸의 기억으로 포장시킨 주인공과 동기들은 결국 곽이 그 누구보다 자신들과 흡사한 인간임을 깨닫게 된다. 삶은 그렇게 환멸적인 나와의 만남인 것.

 

〈아르마딜로의 공간〉은 누가 누구에게 어떤 영향으로 삶을 간섭하는지, 도무지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이 시대를 보여준다. 모든 것이 인과 관계에 얽혀 있다는 종교적, 때론 철학적 의미를 부여할 것 까진 없어 보인다. 다만 끊임없이 깨어있지만, 깨어있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잠들 수 없는 우리를 비쳐줄 뿐이다.

 

죽은 아내의 유령과 함께 떠난 유럽여행. 남자는 끊임없이 서성거리고 중얼거린다. 의미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행위. 잠들지 못하는 밤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순종. 목적이 목적일 수 없는 삶 속에서 필요한 것은 어쩌면, 상대에게 내 ‘말’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아닐까. 〈기차 방귀 카타콤〉은 조절되지 않는 괄약근의 서글픔이 전해지는 ‘오래 묵은’불면을 보여준다.

 

‘목란’은 낡고 오래된, 하지만 외진 곳에 위치한 모텔. 그 곳엔 죽음이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죽음은 축적되고, 다시 그 위에 한 겹을 쌓으려는 이들이 찾아온다. 하지만 어느 새 죽음과 삶은 섞이고, 그 황량한 풍경은 프라모델을 조립하는 아저씨들의 등 뒤로 먼지처럼 내려앉는다. ‘고철동’의 낡고 구식의 느낌을 없애기 위해 ‘목란동’으로 바뀌었듯. 역무원의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외로움 때문이듯, 죽음을 이끌고, 죽음을 위해 당도한 이들에게 정작 죽음은 쌀쌀맞게 바라만 본다. ‘데쓰’는 도망가고, ‘씨발놈아! 살아야지!’를 외치는 고희성은 낮은 목소리에 오히려 더 익숙하다. 공부하러 모텔을 찾아와 죽음을 쌓은 여고생들의 ‘명랑하지만, 책을 읽는 듯한 어조’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목란은 너무 쉽게 〈곡란〉으로 바뀔 수 있으니.

 

불면의 밤이 이어지면, 결국 위장된 잠과 철저한 외면 만이 남는다. 서로의 불면과 서로의 죽음을 파악하지 못한 채 사람들은 제각각의 불면을 긍정하고, 헛된 공간 속에 의미를 쌓아두려 애쓴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는 이 책에서 가장 작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 작품이다. 기억을 지우기 위해 아내를 찾아오는 남편의 유령과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기억을 부정하는 딘과 애슐린은 행복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독은 인공위성일까, 온전한 별일까. ‘잠든 척 눈을 감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고독이다.

 

〈안달루씨아의 개〉의 ‘옹’은 바지에 오줌을 지린다. 살아있다. 하지만 그 살아있음은 오직 죽음으로만 확인된다. 아내의 묘를 찾아가는 그의 여정엔 ‘인수 애비’처럼 황량한, 의미를 알 수 없는 삶들이 조여든다. 그의 길을 막은, 무섭도록 큰 개 역시 그의 삶이 지려버린 오줌을 통해 그를 망각한다. 그가 친구 ‘박’에게 맞았든, 혹은 때렸든 그 기억은 중요치 않다. 그를 추적하고 감시하는 ‘개미’들이 여전히 뻗어가는 그의 삶을 바라보고 있다면, ‘침엽수’와 같은 그의 살아있음이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단편 하나하나가 전해주는 애매모호함과 살짝의 울컥, 그리고 아련함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공간의 대책없음을 일깨워준다. 누구도 편하지 않은 그 편안함에 대한 긍정. 그것이 결국 불면의 밤을 정당화시켜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척 아껴가며, 그러나 참 빨리 읽어 내려간 소설이다. 당연히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적어도 내 생각엔, 참 잘 쓰는, 작가라고 생각된다. 모든 이들이 작가의 바람대로 편안하게 잠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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