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꿈 같은 거 없는데 정글짐어린이책 1
김이연 지음, 권혁주 그림 / 정글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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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비문화가 팽배한 속에서 선거에 입후보한 사람이 ‘저에게 표를 주신다면 더 적은 것들을 소비하게 될 것이다’라고 선거운동을 벌여서, 보란 듯이 당선되고 공약을 그대로 이행하게 될 그날이 자유민주주의가 완연히 성숙하는 날일 것이다.”

- 데이비드 랜섬

 

완전히 속았다. 철학 동화라는 말에. 이건 동화가 아니다. 아니, 만약 동화라면 너무나 잔혹한 동화다. 마치 아무 생각 없는 기계처럼 살아온 기성세대들을 향해 아이들이 던지는 절규이자, 질문이다. 왜 그렇게 사느냐는.

 

꿈이 없는 세상. 꿈을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세상. 상상하기 어려운가? 모른 척하지 말자. 이미 그런 세상인지 오래아닌가? 젊음이, 피가 끓어오르는 젊음이 매년 200-300명이 넘게 취업과 등록금 등으로 자살하는 시대. 이 시대가 꿈마저 돈으로 환산하는 시대가 아니면 무엇인가?

 

책은 어느 날 꿈을 공장에서 생산해 팔아보자는 아이디어를 가진 장 사장과 서 비서의 치밀한 계획으로부터 시작한다. 지금 온 방송 매체를 점령하고 있는, 정말 광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오디션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장 사장과 서 비서 역시 아이들을 공모해 꿈을 수집한다. 그리곤 아이들의 꿈을 상품화해 공장에서 찍어낸다. 온갖 캡슐이나 여러 형태의 물약 등으로.

 

아이들은 차츰 스스로 꿈꾸는 법을 잊게 된다. 그리곤 값비싼 꿈을 가지고 있는 아이와 저렴한 꿈을 가진 아이들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난다. 꿈마저 계급성을 띠게 된 것이다.

 

벌써부터 공포 영화의 분위기가 맴 돈다. 얼마 전 관람한 영화 《MB의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호러 무비였다. 암튼 꿈꾸는 법을 잊은 아이들은 돈으로 꿈을 살 수밖에 없고, 점차 꿈의 ‘밑천’이 떨어져간 장 사장과 서 비서는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이 공포영화의 결말은 무엇일까.

 

초등학생의 장래희망 1위가 공무원인 시대에서 살고 있다. 이미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대통령도, 장군도, 과학자도 죽어버렸다. 오직 생존, 치열한 경쟁을 통한 생존만이 이 시대의 가치임을 알아버렸다. 누가 아이들을 철부지라 하는가. 이미 아이들을 정글의 법칙을 알고 있다.

 

아름다운 세상인가? 길거리에 나가면 온갖 상품들이 수없이 쌓여있는 상점들이 수두룩한데, 왜 우리들은 더 불안할까? 도대체가 가늠할 수 없는 GDP는 세계 10위권이라 떠들고, 후진국들이 부러워마지 않는 나라가 바로 우리라는데, 왜 우리는 불행할까?

 

같은 동포, 피를 나눈 북한 사람들을 악마로 묘사하고, 그들과 협력하고 공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여전히 지겹도록 환멸적인 단어, ‘빨갱이’로 몰아가고, 한미관계와 한미동맹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은 성조기를 흔들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그 최선전에서 우리의 구세주를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외치는 이들이 정치권을 선점하고 있다. 2013년에도 다시 권력을 잡겠다고 광기를 부리고 있다.

 

이런 우울한 세상에서 과연 아이들이 행복할까? 꿈을 꿀 수 있을까? 지금은 오직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공존과 화해, 배려와 나눔보다는 적과 나의 구분, 경쟁, 룰도 필요 없는 묻지마식 승리, 돈 만을 최고의 가치로 받드는 시대에서 아이들은 과연 어떤 꿈을 꿀 수 있을까?

 

2007년 대선이 떠오른다. 오직 돈에 환장한 인간들의 외침이 떠오른다.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돈만 벌어달라는 천박함이 떠오른다. 물론 서민들의 고통을 싸구려 표로 만들어버린 MB의 책임이 가장 클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묻지마 화풀이 투표를 한 이들 역시 자랑스럽지는 않을 것 같다.

 

너무도 힘들었던 5년이 지났다. 지겨운 정도로 힘들었던 5년이 지났다. 5년 동안 우리가 놓친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면 그야말로 끝이 없겠지만, 잊지는 말아야 한다. 그 놓친 것들 중엔 우리 아이들의 꿈도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끝내 곽노현 교육감이 구속되고, 이제 대선과 함께 새로운 교육감을 선출한다. 보수진영은 일찌감치 단일화에 성공해, 더 이상 진보진영에게 아이들의 교육을 맡길 수 없다고 떠들고 있다.

 

얼마 전 인사동 거리에서 전교조를 ‘척결’하자는 무시무시한 구호를 외치며 서명을 받고 있는 이들을 보았다. 그 자리에서 난 이들과 함께 숨쉬고 있음이 너무도 괴로웠다. 원래 내가 4가지가 없으니 양해해달라. 아무런 논리도 근거도 없이, 전교조를 빨갱이로 표현하는 이들. 내가 보기엔 그들은 이성적 동물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긍정적인 일들이 보인다. 투표시간 연장이라는 다소 상식적인 이슈가 이제야 떠올랐고, 경제와 함께 복지도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시 남과 북의 화해와 공존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정치인들의 말을 듣기 전에, 그들이 내세운 정책이 무엇인지, 꼼꼼하게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명박의 ‘747 정책’과 같은 ‘공갈빵’을 우리는 또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질 사람도 누구여야 하는지 꼼꼼하게 살펴보자. 그리고 투표하자. 정말 목이 터져라 외친다. 투표하자. 아이들에게 다시 아이들다운 꿈을 찾아주기 위해서는 투표해야 한다. 내 표를 던져야 한다. 소중하게 신중하게 던져야 한다.

 

박근혜 후보가 TV토론에 나오지 않겠다고 하자, 공영방송이라는 것이 대선후보 TV토론을 아예 하지 않겠다고 한 것으로 안다. 이는 국민을 그야말로 ‘병신’으로 생각하는 행태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국민들은 대선 후보라는 이들에 대해 자세히 보고 듣고 평가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길 바란다.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주관하는 법정토론은 공식 선서 운동 기간에만 3회 이상 개최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MB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국민에게 굽실거리는 흉내라도 냈는데, 박근혜는 아예 그조차도 하기 싫다는 모양새다. 아름답다. 너희와는 급이 다르다는 표현일까.

 

이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꿈이 되돌릴 수 있는 희망이 오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해야 아이들이 행복하고, 내 삶도 변할 수 있다. 좋은 게 좋은 것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함께 좋아야 좋은 것이다.

 

공존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사람답게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떳떳하게.

 

아이들을 위한 철학 동화라고 하지만, 일단 부모님들의 일독 후 아이들이 읽는 게 더욱 유익한 책이라 생각된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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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판사 서기호입니다 - ‘가카 빅엿’ 양심 판사, 사법개혁의 꿈을 안고 소통하다
서기호.김용국 지음 / 오마이북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개념법관, 서기호님. 당신은 촛불시민에 대한 대법관의 부당한 재판 개입에 항거하고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려는 이명박 정부에 대해 강력한 쫑코를 먹였으며 임용 탈락이라는 치졸한 법원 인사에 맞짱을 놓아 사법부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으므로 사법권 독립을 바라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은 쫄지 말라는 응원의 뜻을 모아 당신을 국민판사에 임명합니다.”

 

지난 2월 17일, 법복을 벗은 서기호 판사에게 네티즌들이 직접 마려한 ‘국민법복’을 주며 수여한 임명장의 내용이다. 그의 옷에는 法(법)자, 대신 正(정)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해냈다. 건국 이래 최대의 최단기 공사라 할 수 있는 4대강 사업을 기적적(!)으로 이뤄냈고, 무수히 많은 탈법과 꼼수를 조장 혹은 몸소 실천하며 국정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아울러, ‘역대 대통령 중 최초’라는 찬사를 너무나 사랑하신 가카는 독도를 친히 방문하시고, 연평도 역시 최초로 방문하시어, 북이 도발하면 천배 백배 보복할 것이라는 으름장을 놓으셨다. 스스로 밝혔듯, 처음이다. 이렇게 대책 없는 대통령은.

 

서기호 판사가 법복을 벗고 이제 국회의원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 역시 따지고 보면 가카와 정부 덕분이다. 해외에서 본다면 토픽감이 확실한 SNS상에서의 멘트 하나로 꼬투리를 잡고, 결국 그것으로 멀쩡한 판사의 옷을 벗긴 정부 그리고 그것을 나몰라라 했던 동업자(!)들과 언론.

 

결국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유일한 집단인 국민들이 서 판사의 억울함과 현 정부의 치졸함을 과감 없이 비판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로서 국회에 입성하게 되었다. 아, 지금은 무소속이다. 그의 탈당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조금 아쉽다는 말은 해야겠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다. 서기호 판사가 영웅이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평범한 법조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심히 싫어하는 정부와 대통령으로 인해 그는 본의 아니게 ‘영웅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팔자에도 없었던, 아니 그건 본인의 마음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고, 암튼 국회의원이라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책은 《오마이뉴스》에 사법개혁 관련 글들을 꾸준히 올렸던 시민기자가 서기호 판사와 나눈 대화를 모았다. 요새 이런 콘셉이 유행이다. 책으로 내기에 큰 부담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대신 깊이가 부족하다는 단점은 어쩔 수 없다. 상대가 어느 정도 내공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말이다.

 

서기호 판사는 억울하게 재임용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게 되었다. 때문에 사법개혁에 대한 의지나 열의가 강할 수밖에 없다. 책에서 그가 강조하고 있는 사법개혁은, 그러나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이라 할 수밖에 없다. 상식적인 것이 ‘개혁적’이거나 ‘혁명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나라는 슬프다.

 

아무튼 영화 〈부러진 화살〉에 대한 국민들의 뜨거웠던 관심으로 알 수 있듯, 현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거의 전방위적이다. 국민들은 법 앞에 만인이 아니라, 오직 ‘만 명’만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험하고 살고 있다.

 

사실 따지고 들어가자면 정부가 한 행동 중 불법과 탈법은 셀 수도 없다. 4대강사업도 탈법, 위법이 난무했고, 용산참사, 제주 강정기지, MBC 〈PD수첩〉판결, 논객 미네르바 구속, 정수장학회 등 헤아릴 수조차 없다. 하지만 번번이 사법부는 정의가 아닌 권력의 편에 섰다. 번번이. 과연 그 사실을 국민들이 잊을까. 정말 쉽게 잊으리라 생각하는가.

 

대통령이 부도덕하고 탈법을 일삼는 나라에선 국민들에게 정의와 상식을 강요할 어떠한 권리도 없다. 오히려 따귀 한 대 맞지 않으면 다행이다. 때문에 서기호 판사와 같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도, 때에 따라선 영웅으로 변신할 수 있다. 그걸 가지고 서 판사에게 비난이나 이의를 제기하면 안 된다. 번지수 잘못 찾았다.

 

내가 보기엔 서기호라는 인물이 과연 국회의원 ‘깜’인가를 두고 비난과 이의를 제기하는 것보다는, 앞으로 그가 의원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돕고 감시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서 판사와 같은 억울 희생자를 대량 생산해온 정부와 이명박 대통령에게 비판과 이의를 제기함이 옳다. 이제 임기가 끝나간다고 다 끝난 게 아니다. 어쩜 이명박 정부의 온갖 어처구니없는 일들의 결과는 다음 정부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난 인간 서기호를 잘 모른다. 국회의원 서기호 역시 아직 평가하기엔 이르다. 물론 판사 서기호도 당시엔 몰랐다. 때문에 앞으로는 그가 국회의원, 즉 국민들의 종이자, 대리인으로서 역할을 잘 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서슬퍼런 권력과 자본 앞에 떳떳하게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는지 볼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다면 그가 누구 말대로 ‘가카빅엿’말 한마디로 국회의원이 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의원의 자격이 있는지,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바른 평가와 그에 따른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현 정부가 잘한 일은 무엇인지, 잘못한 것은 무엇인지, 명명백백히 따져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거짓말을 통해 권력을 잡았다고 게임 끝이 아님을 국민들이 보여줘야 한다. 혹자들은 말한다. 이제 BBK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참 지겹다만, 할 수 없지.

 

굳이 서기호가 아니더라도, 현 사법부가 개혁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하지만 그 막강한 권력에 개혁이란 칼날을 들이대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국민들의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강력한 일을 할 수 있는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

 

이번엔 좀 제대로, 아니 그나마 나은 사람으로 선출하자. 기권도 정치적 의사 표현이며, 권리라는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투표장에 나가야 할 일이다. 그리고 각 후보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지, 말도 안 되는 공약(예를 들어 MB의 747공약, 그 공약대로 되었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세계 최고의 경제강국이 되었을 걸)을 하지는 않는지, 주변 인물들은 어떤지, 친인척들은 대략 어떠한 인간들인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또 다시 ‘고향이 같아서, 왠지 아버지가 생각나서’ 등등 정말 창피한 이유로 투표한다면 이명박은 돌아올 것이다. 오! 상상해버렸어!

 

국민판사가 아닌, 국회의원 서기호의 건승을 빈다. 똑바로 일 안하면 바로 국민들이 쫑코 먹일 것이다. 잘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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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3반
오토다케 히로타다 지음, 전경빈 옮김 / 창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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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 모델이라는 단어가 이젠 꽤 친숙하게 들릴 정도로 많이 사용되는 것 같다. 닮고 싶은 사람, 훌륭한 사람 그리고 성공한 사람. 거칠게 의미를 설명하자면 이 정도이지 않을까. 암튼 언론이나 방송에서는 심심찮게 롤 모델들을 생산해내는 것 같다.

 

아울러 아주 오랜 관행(!)이랄까. 늘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던 것이 있었다. 바로 장애인 롤 모델에 대한 것이다. 장애인 중 특출한 재능을 지녔거나 매우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 성공한 이들을 이슈화 시켜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던 특별한 롤 모델로 만드는 것. 물론 그 개인의 노력이나 재능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아주 소수인 그들을 빌어 다수의 장애인 혹은 일반인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것은 매우 마음을 불편케 하는 요인이었다.

 

때문에 예전 《오체불만족》과 주인공인 오토다케 히로타다를 알게 되었을 때도 감탄과 감동은 물론 있었지만, 동시에 다소 우려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의 삶은 배울 점이 많고 매우 훌륭하지만, 이로 인해 평범한 장애인들이 받아야 할 따가운 시선 혹은 ‘너희들은 사지 멀쩡한 것들이 어째 그리 나약한가!’하며 압박할 사회의 무지막지한 폭력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사지절단증이라는 매우 희귀한 장애를 안고 태어난 오토다케는 자신의 장애로 인해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의 원천으로 만든 사람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으로 학창시절을 보냈고, 대학을 졸업한 후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특별한 경험이라 말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만약 우리나라였다면 그처럼 장애를 가진 이가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까를 생각해본 것이다. 가능할까. 회의적이다.

 

과거에 비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 땅에 살고 있는 많은 장애인들은 행복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아주 기본적인 삶의 권리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그들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사고가 여전히 존재하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때문에 오토다케의 경험은 매우 특별하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 그에게 수업을 받은 아이들 또한 매우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점. 평범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는 선생님과 함께 수업을 하며 웃고 떠들며 학창시절을 보낸다는 것.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장애인은 물론이고, 우리는 사회는 아직도 다름과 틀림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다르면 틀린 것이라는 사고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깨뜨리기 쉽지 않다. 하지만 반드시 깨부수어야 할 매우 옳지 못한 사고이다.

 

피부색, 장애의 유무, 이념, 언어, 종교, 출신지, 출신 학교, 성적 취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것들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나누는 사람들. 그 기준이라는 것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의미한 것인지는 둘째 치더라도, 기필코 편을 나누고 내편 상대편을 나눠야만 속이 풀리는 심리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책은 장애를 가진 선생님이 평범한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아이들 마음속의 장애를 함께 풀어나가는 이야기다. 아마도 오토다케의 실재 경험이 많이 담겨 있을 것이다. 크나큰 갈등도 반전도 없지만 가슴 따뜻한 이야기 자체로 많은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책이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으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외에 다른 것들까지 생각해야만 했다. 우리가 그처럼 부러워하면서도 무시하는 일본이라는 국가에서조차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데,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어떤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 다르니까 모두 좋은 것’이란 말이 전해주는 의미는 결코 어렵지 않다.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더 큰 이해와 연대를 가능케 한다는 것일 테다. 그동안 편 가르기에 익숙했던 우리도 이제는 그 지긋지긋한 편 가르기보다는 차이를 인정하는 미덕을 배울 시기가 아닐까.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상투적인 표현은 하기 싫다. 그것은 장애인들에게도 실례가 되는 말일 것이다. 다만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아, 이것도 상투적 표현일까. 마음의 장애를 안고 있는 이들이 훨씬 더 많은 세상. 그들의 마음을 고치는 것이 어쩌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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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는 어디에?
디팩 맬호트라 지음, 김영철 옮김, 호연 그림 / 이콘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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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를 어느 정도 아는 이들은 내가 이른바 자기계발서라 불리는 책들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터이다. 난 그것이 슬픈 자기 위안이며 또 다른 비겁한 착취이자, 결국은 저자만 신나게 금전적으로 ‘자기계발’하는 것일 뿐이라 여겨왔다.

 

하지만 모조리 다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음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물론 여타 고전이나 정말 가슴을 울리는 글, 책들을 만났을 때의 감동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아주 가끔은 자기계발서를 읽고도 약간의 감흥을 느끼기 때문이다.

 

《치즈는 어디에?》는 15년 전 베스트셀러였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의 시즌2 성격을 가지고 있다. 미리 말하자. 난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를 읽은 적이 없다. 아, 들어는 봤다. 무지하게 잘 팔린 책이라는 것 정도는 기억한다.

 

그 책은 그랬다고 한다. IMF가 터져 우왕좌왕하고 그야말로 패닉 상태에 빠진 우리들에게 일종의 구원처럼, 새로운 희망을 줬다~고 한다. 어떤 희망? 뭐, 말하자면 이젠 너희들에게 안정적으로 주어지던 치즈는 없으니, 알아서 새로운 치즈를 찾기 위한 변화를 시도하라는 것 정도? 였단다. 음. 우리가 참 정신이 없었긴 했나보다. 이 따위 말을 지껄인 책을 베스트셀러라고 읽었으니.

 

암튼. 이제 저자는 단순히 변화에만 몰두하던 시대는 지났다고 말한다. 이젠 단순히 열심히만 뛰어서는 안 된다는 것. 왜? 다들 죽어라 열심히 뛰니까! 헐, 잔인하다. 그렇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예 마하의 속도로 뛰다 죽어버릴까?

 

저자는 세 마리의 쥐를 등장시킨다. 다른 모든 쥐들이 미로 속에서 오직 치즈만을 찾기 위해 뛰어다닐 때 이 세 마리의 불온한 쥐들은 또 다른 생각에 빠지기 시작한다. 미로를 연구하고 탐험하고 결국 그것을 변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자, 그렇담 저자의 의도는 대충 나온다. 어쩜 우리 스스로가 만든 것인지도 모르는 미로에 구속되지 말고, 미로의 실체를 파악해 조종당하지 말라! 내가 미로 속에 머무는 것인지 나의 마음속에 미로가 존재하는지 항상 되물어라! 나의 필요에 의해 머무르고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말라! 뭐, 세 마리 쥐의 생각을 대충 결합하면 이쯤 되겠다.

 

“직시하고, 변화하고, 행동하라!”

 

흠…. 어찌 보면 좌파들을 위한 자기계발서의 냄새도 슬쩍 묻어난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룰 속에서 안주하거나 구속당하지 말고, 스스로 그 룰을 깨라,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 이는 아무리 봐도 일반 뻔뻔한 자기계발서와는 다른 느낌이다.

 

행복을 좇아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행복을 찾는 것. 무슨 소리지? 같은 말 아닌가? 책은 말한다. “행복을 좇는 그 자체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행복을 찾는 게 과연 가능할까?”

 

여타 자기계발서와는 달리 결론을 이미 정하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 아울러 정답이 따로 있지 않고 스스로 정답을 고민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책은 미덕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세 마리 쥐의 성격이 다르듯, 세 가지의 유형을 제시하는 친절을 베풀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하지만, 왜 난 여전히 의심스러울까. 변화를 먼저 재빠르게 눈치 채고, 허점을 찾거나, 남들보다 먼저 움직이는 것. 결국 그것은 같은 의미이지 않을까. 단순히 치즈를 찾기 위해 열심히 살아서는 더 이상 답이 없는 세상이기에, 이젠 한 차원 높은 더 힘든 그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말과 과연 다를까.

 

또, 달리 생각해보자. 미로가 정말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미로’인지도 모른 채 오늘도 자식새끼와 마누라를 먹여 살리겠다고 열심히 미로 속을 누비며 치즈를 찾아 돌아다니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아빠 쥐들은, 적어도 이 책에 의하면 개념 없는, 뒤떨어진 ‘바보’들인 셈. 정말 그런가.

 

‘원래 자기계발서가 그런 거잖아. 뭘 그리 따져?’라고 말하면 할 말 없다. 그럼에도 슬프다. 책은 말한다. “변화에 쫓겨 미친 듯이 꿈만 찾아다니는 당신, 행복합니까?”냐고. 행복하겠냐? 장난하냐? 그럼 대안은 뭐냐? 지금 우리가 머물거나 얽매여 있는 곳을 “직시하고, 변화하고, 행동하”면 아름다운 답이 나오냐? 정말이냐?

 

‘자기’계발서이기 때문에, 이 책 역시 모든 것은 ‘자기’에 달렸다고 결론짓는다. ‘내’가 무지와 몽매에서 벗어나 크게 다시 한 번 깨우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치즈를 찾겠다고 열심히 뛰어 다니는 것으론 살아갈 수 없다는 냉정한 훈계. 어흑. 또 다시 슬프다. 도대체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와 뭐가 크게 다른가?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는 IMF로 삶의 근원이 흔들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고 한다. 다행이다. 그나마 희망이라도 줬다면. 하지만 생각해보자. IMF를 가져온 원인은 무엇인가. 열심히 살아온 수많은 아빠 쥐들인가. 그리고 빌어먹을 치즈는 과연 누가 옮겼는가! 누구의 잘못이냔 말이다!

 

미로를 만들어 놓은 그 장본인들, 그 세력들에 대한 냉철한 인식. 그것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말이다. 내 말은! 빌어먹을 모든 것을 항상 힘없는 쥐들에게 강요하거나 훈계하지 말고!

 

정말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보다 진화된, 이 시대에 맞는 시즌2를 쓰려 했다면 쥐들이 함께 힘을 모아 미로 자체를 붕괴시켜버렸어야 했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왜냐? 이 책대로만 하면 결국 이른 바 깨달은 세 마리의 쥐들만 진실을 알고 행복을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비겁하게도 말이다.

 

아, 자기계발서가 원래 그렇다니까! 왜 그리 성질을 내. 라고 말하는 분들. 그럼 그 따위 ‘원래 그런’자기계발서 읽지 마시라. 원래 그런 거 아는 데 왜 읽어? 원래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는 게 독서 아닌가?

 

암튼 이 책은 노력하는 멋진 개그맨 김영철이 빛나긴 하지만, 역시나 그저 그런 자기계발서에서 멀리 벗어나진 못했다. 물론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보단 낫다고 평가해 주겠다. 아주 무식하진 않으니.

 

혼자 도를 닦고 깨우쳐 혼자만 잘 살겠다는 심보. 그걸 버려야 한다. 다 같이, 힘들더라도, 함께 가자는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질 떨어지는 자기계발서를 써서, 혹은 그걸 번역해 들여와서 잘 먹고 잘 사는 인간들이 사라진다. 외국의 작가, 기업인, 경영인, 컨설턴트를 잘 살게 해주는 자기계발서는 이젠 좀 그만 봤으면 좋겠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따위의 무식한 제목의 책들도 이젠 제발 그만. 요즘 다시 그 책을 대형서점 한복판에 깔아둔 것을 보고 얼마나 식겁했던지. 양심이 없으면 무식이 배가된다.

 

뭐, 어쨌든 하지만, 이 책은 그나마 자기계발서 중 나은 편이었다고, 평가해본다. 김영철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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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 귀신 가다르 - 팔레스타인 편 처음 읽는 나라별 옛이야기 2
소니아 니므르 지음, 이승숙 옮김, 한나 쇼 그림 / 여유당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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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하는 글의 제목이 아름답다. ‘같음과 다름, 아름다운 어울림’

그렇다. 세상엔 ‘다름’만이 존재할 뿐 ‘틀림’은 없다. 나와 다르다 해서 ‘틀렸다’고 단정 짓는 것만큼 오만하고 위험한 게 또 있을까.

 

어린 시절을 곰곰이 떠올려 본다. 뭐, 어렸을 때부터 그리 무난하지 않았던 성정 탓에 책을 읽어도 꼭 무슨 음모론, UFO, 괴물 등 미스터리 쪽을 기웃거리곤 했다. 물론 부모님이 꼭 내가 읽기를 원하셨던 위인전, 명작문학도 읽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 만화나 미스터리로 빠지곤 했다.

 

때문에 동화를 진지하게 읽고 깊은 감동에 빠져 눈물을 흘렸던 기억은 없는 것 같다. 동화란 그때부터 나에겐 ‘굉장히 심한 허풍’혹은 ‘완전 희망 사항’정도로만 인식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생각해보니 우리 민족의 설화나 신화, 전래동화 등을 오히려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백성공주나 신데렐라, 인어공주 따위는 솔직히 좀 아니다 싶었다. 아니, 까놓고 내가 이솝이 누군지, 그 사람이 언제 어디에서 살았는지 어떻게 알겠나. 그 나이에. 게다가 안데르센은 또 누구니? 그림 형제는 화가 동맹인 알았다는!

 

어찌되었든 내 유년시절과 지금이 그리 달라지진 않은 것 같다. 어린 아이들의 동화책들을 보면 죄다 서양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당최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이들의 심성을 길러주는 그 중요한 시기에, 벌써부터 ‘금발은 너무해’ 아동버전을 보며 꿈을 키워야겠는가. 왜 아이들의 마음마저 ‘닥치고 사대주의’로 만들려 하는가. 게다가 그런 동화들이 사실은 무지막지 살벌한 호러라는 사실, 아이들이 먼 훗날 알게 되면 부모를 원망하지 않을까.

 

바로 이 때문이다. 여유당 출판사가 기획한 《처음 읽는 나라별 옛이야기》가 큰 의미가 있음이. 이라크, 팔레스타인, 소말리아, 베트남 등 아직 아이들에겐 생소한, 혹은 전쟁과 기아, 죽음으로만 인식되는 나라들에도 이렇게 아름답고 재미있는 동화들이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이미 훌쩍 마음이 자라지 않을까.

 

어른들의 시각, 그것도 삐뚤어진 어른들의 시각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주입시키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천박한 자본주의에 함몰된 이들이 일으킨 더러운 전쟁의 피해자들, 그리고 제국주의의 피해자들이 겪어야만 했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고 아파할 수 있는 감수성이 아이들에겐 ‘돈과 성적’보다 중요하다.

 

팔레스타인의 친구들이 왜 그토록 고통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지, 왜 6살 어린이가 탱크 앞에서 작은 돌멩이를 집어 들어야 하는지, 아직 우리 아이들은 모른다. 하지만 결국 이 지구라는 작은 마을에 함께 살고 있는 친구들의 아픔을 알아야만 성장도, 성찰도 가능하다. 그것에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 중요치 않을 것이다.

 

《식인 귀신 가다르》는 팔레스타인에서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이야기들을 담았다. 그런데 내용을 읽어 내려가며 얼마나 반갑고 신기하던지! 그 먼 곳에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우리와 어찌나 닮았는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주인공이고, 아무리 못난 사람도 착한 마음을 간직하면 결국 행복하게 잘 살게 되고, 형제 자매 중 항상 착한 막내를 괴롭히는 누나, 언니들이 있고, 욕심쟁이 구두쇠가 나중엔 자기 꾀에 속아 넘어가고….

 

물론 팔레스타인의 고유의 문화를 간직한 이야기들도 신기하고 재미있기는 마찬가지다. 아, 이런 동화를 읽으며 자라는 아이들은 이 세상엔 미국만, 유럽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세상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는 많은 이들도 얼마든지 우리와 친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 지금의 동화라고 알고 있는 서양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들이다. 서양의 것이라면 환장하다 못해 아예 ‘서양’이 되고 팠던 일본의 심성이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아름다운 전래동화들, 전설, 민담 들이 수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일본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비겁한 일임은 물론이다. 시작이야 어찌되었든 우리는 결국 그것을 받아들였으며 거기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진지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것들을 끝내 지켜오신 수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음도 기억해야 하지만 말이다.

 

아이들에게 세상은 참 넓고, 수많은 이들과 평화롭게 공존해야 함을 일깨우는 것은 그리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다. 일단 어른들이 모범을 보이면 되는 것이고, 또한 어렸을 때부터 기형적인 선행학습이나 영어 몰입 같은 변태적 학습을 시키는 대신, 세계 여러 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이야기도 함께.

 

아이들은 분명 이 세상의 수많은 문화와 이야기,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고 접하고 들을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학벌사회’‘경쟁사회’라는 변명으로 억압하는 것은, 당연히 극악한 인권탄압이라는 사실.

 

똑똑한 신세대 부모들은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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