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 귀신 가다르 - 팔레스타인 편 처음 읽는 나라별 옛이야기 2
소니아 니므르 지음, 이승숙 옮김, 한나 쇼 그림 / 여유당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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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하는 글의 제목이 아름답다. ‘같음과 다름, 아름다운 어울림’

그렇다. 세상엔 ‘다름’만이 존재할 뿐 ‘틀림’은 없다. 나와 다르다 해서 ‘틀렸다’고 단정 짓는 것만큼 오만하고 위험한 게 또 있을까.

 

어린 시절을 곰곰이 떠올려 본다. 뭐, 어렸을 때부터 그리 무난하지 않았던 성정 탓에 책을 읽어도 꼭 무슨 음모론, UFO, 괴물 등 미스터리 쪽을 기웃거리곤 했다. 물론 부모님이 꼭 내가 읽기를 원하셨던 위인전, 명작문학도 읽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 만화나 미스터리로 빠지곤 했다.

 

때문에 동화를 진지하게 읽고 깊은 감동에 빠져 눈물을 흘렸던 기억은 없는 것 같다. 동화란 그때부터 나에겐 ‘굉장히 심한 허풍’혹은 ‘완전 희망 사항’정도로만 인식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생각해보니 우리 민족의 설화나 신화, 전래동화 등을 오히려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백성공주나 신데렐라, 인어공주 따위는 솔직히 좀 아니다 싶었다. 아니, 까놓고 내가 이솝이 누군지, 그 사람이 언제 어디에서 살았는지 어떻게 알겠나. 그 나이에. 게다가 안데르센은 또 누구니? 그림 형제는 화가 동맹인 알았다는!

 

어찌되었든 내 유년시절과 지금이 그리 달라지진 않은 것 같다. 어린 아이들의 동화책들을 보면 죄다 서양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당최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이들의 심성을 길러주는 그 중요한 시기에, 벌써부터 ‘금발은 너무해’ 아동버전을 보며 꿈을 키워야겠는가. 왜 아이들의 마음마저 ‘닥치고 사대주의’로 만들려 하는가. 게다가 그런 동화들이 사실은 무지막지 살벌한 호러라는 사실, 아이들이 먼 훗날 알게 되면 부모를 원망하지 않을까.

 

바로 이 때문이다. 여유당 출판사가 기획한 《처음 읽는 나라별 옛이야기》가 큰 의미가 있음이. 이라크, 팔레스타인, 소말리아, 베트남 등 아직 아이들에겐 생소한, 혹은 전쟁과 기아, 죽음으로만 인식되는 나라들에도 이렇게 아름답고 재미있는 동화들이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이미 훌쩍 마음이 자라지 않을까.

 

어른들의 시각, 그것도 삐뚤어진 어른들의 시각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주입시키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천박한 자본주의에 함몰된 이들이 일으킨 더러운 전쟁의 피해자들, 그리고 제국주의의 피해자들이 겪어야만 했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고 아파할 수 있는 감수성이 아이들에겐 ‘돈과 성적’보다 중요하다.

 

팔레스타인의 친구들이 왜 그토록 고통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지, 왜 6살 어린이가 탱크 앞에서 작은 돌멩이를 집어 들어야 하는지, 아직 우리 아이들은 모른다. 하지만 결국 이 지구라는 작은 마을에 함께 살고 있는 친구들의 아픔을 알아야만 성장도, 성찰도 가능하다. 그것에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 중요치 않을 것이다.

 

《식인 귀신 가다르》는 팔레스타인에서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이야기들을 담았다. 그런데 내용을 읽어 내려가며 얼마나 반갑고 신기하던지! 그 먼 곳에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우리와 어찌나 닮았는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주인공이고, 아무리 못난 사람도 착한 마음을 간직하면 결국 행복하게 잘 살게 되고, 형제 자매 중 항상 착한 막내를 괴롭히는 누나, 언니들이 있고, 욕심쟁이 구두쇠가 나중엔 자기 꾀에 속아 넘어가고….

 

물론 팔레스타인의 고유의 문화를 간직한 이야기들도 신기하고 재미있기는 마찬가지다. 아, 이런 동화를 읽으며 자라는 아이들은 이 세상엔 미국만, 유럽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세상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는 많은 이들도 얼마든지 우리와 친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 지금의 동화라고 알고 있는 서양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들이다. 서양의 것이라면 환장하다 못해 아예 ‘서양’이 되고 팠던 일본의 심성이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아름다운 전래동화들, 전설, 민담 들이 수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일본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비겁한 일임은 물론이다. 시작이야 어찌되었든 우리는 결국 그것을 받아들였으며 거기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진지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것들을 끝내 지켜오신 수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음도 기억해야 하지만 말이다.

 

아이들에게 세상은 참 넓고, 수많은 이들과 평화롭게 공존해야 함을 일깨우는 것은 그리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다. 일단 어른들이 모범을 보이면 되는 것이고, 또한 어렸을 때부터 기형적인 선행학습이나 영어 몰입 같은 변태적 학습을 시키는 대신, 세계 여러 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이야기도 함께.

 

아이들은 분명 이 세상의 수많은 문화와 이야기,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고 접하고 들을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학벌사회’‘경쟁사회’라는 변명으로 억압하는 것은, 당연히 극악한 인권탄압이라는 사실.

 

똑똑한 신세대 부모들은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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