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고민 - 평화 공존이냐, 고립이냐
안문석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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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학번이다. 남들은 지금까지도 그 존재 여부를 신기한 듯 되묻곤 하는 북한학과 출신이다. , 또 다시 이 글을 보고 그런 과가 있었어?”하시는 분들 계시겠다. 존재한다. 엄연히.

 

한때 전국적으로 5개 정도의 대학에서 북한학과를 만들어 학생들을 배출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전멸. 그나마 온전히 남은 학교가 나의 모교이다. MB정권 때 상당히 부끄러워, 출신 학교를 밝히지 않았다는 것만 살짝 밝힌다. 젠장, 다 알겠구먼 그래도.

 

북한학과에선 뭘 배우는지 궁금한 분들 또한 여전히 계시겠다. 당연히 북한을 연구한다. 통일을 준비하고, 남북의 평화와 화해협력을 배운다. 그래야 했다. 다시 한 번 젠장. 하지만 뭐 다들 아시다시피 대부분 보수적인 시각이 지배하는 학계에서 북한학과라고 용가리 통뼈는 아니다. 보수적인 성향의 교수들이 가끔 반공교육을 그야말로 펼치시기도 하여 학생들의 가슴에 맹렬한 멸공의식을 심어주시곤 하신다. 통재라.

 

난 그 이후 남북관계 관련 언론사에서 쭉 일했고, 그 사이 대학원을 다녔다. 역시 북한을 연구하는 전문대학원이었다. 나름 따져보면 이 바닥에서 꽤 있었던 셈이다. 지금도? 물론 통일운동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나름 한 우물을 파온 셈. 근데 물은 당최 언제 나오나. .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동안 북을 공부했지만, 지극히 당연하게도 난 여전히 북을 모르겠다. 북한학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한 국가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미국학과, 일본학과, 중국학과와 마찬가지로 한 나라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말씀. 이런 학문을 달랑 4년 대학에서 공부한다고 통달할 수 있겠는가. 대학원을 다녀도 조금 더 깊어질 뿐이지, 여전히 조족지혈이다.

 

한때는 조금 주워들은 풍문으로 아는 척 좀 했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무모하고 대책 없는 행동인지 나중에야 느꼈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북핵문제다, NLL이다, 평화협정이다 하며 남북관계, 대북정책 등등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참 많다.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언론이나 방송에 나와 분석 전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다들 오래 공부하신 분들이고, 그 중에는 내 스승들도 있다.

 

하지만 명심할 것 하나. 그들이 온전히 북에 대해 알고 있다는 착각은 하지 마시라는 것이다. 그들도 역시 북을 100% 모른다. 그렇다면 살다가 온 탈북자들은 북을 100%알까? 내가 보기엔 그것도 아니다. 그들도 모르는 북이 있다.

 

정전 60주년을 무슨 자랑인 것처럼 떠드는 개념 없는 우리 정부처럼, 북 문제 역시 확실한 근거나 증거 없이 떠들어대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 전문가라 자처한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참말인 것처럼 믿다간 정작 북을 바라보는 주체적인 시각을 잃기 십상이다.

 

우리는 분단된 국가다. 세계 유일이다. 참 자랑이다! 아무튼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어 함께 살아가야 할 북을, 북의 인민들을 알아야 할 절박한 필요성이 있다. 통일이 우리 이해타산에 안 맞아서 불리하니 하지 말자는 의견들도 있지만, 우리가 정말 발전하고 번영하기 위해서 바로 통일이 필요하다. 그게 아니면 솔직히 답이 없다. 창조경제? 남북관계가 이 모양인데, 절대 불가능하다. 양극화 해소? 일자리 창출? 턱도 없다.

 

그렇다. 민족의 화합, 다시 하나 됨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잠시 접어두고 당장 먹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적 요구로만 봐도 통일은 지상과제다. 그렇기 때문에 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우리의 미래와 직결된 중대한 문제다.

 

그런데? 지금은? 여전히 이념을 잣대로 싸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정말 이념적 잣대로 싸운다기보다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북 문제를 앞에 내세우며, 이용한다. 철저하게.

 

미친 짓이다. 일제 시기 친일과도 맞먹는 매우 악질적인 행동이다. 우리의 미래를 팔아 자신의 배를 채우는 꼴과 다르지 않다. 진보나 보수나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남남갈등? 따지고 보면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추잡한 싸움일 뿐이다. 일반 국민들은 개성공단이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금강산에 올라 눈물을 흘렸으며, 이산가족 상봉을 티브이 중계로 보며 함께 서럽게 울었다. 배고픈 북 동포들을 위해 모금함에 동전을 넣었고, 핵과 같은 위험한 무기를 만드는 대신 서로 도와 서로 잘 살았으면 하고 바란다.

 

북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름의 정치 시스템, 경제 시스템, 사회, 문화 등등의 길을 걸어왔다. 60년이다. 우리가 기형적인 수출의존 경제 시스템을 가지게 된 것처럼, 그들은 주체적으로 자립경제를 추구하다 지금 어려움에 처해있다. 물론 여기엔 미국의 경제제재가 큰 몫을 했음을 인정해야 하지만.

 

때문에 먼저 상대방이 나와 틀리지 않고(!) 오직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름 속에서 같음을 찾아내야 하고,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에서 모든 것을 풀어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나라가 선뜻 대화와 타협과 협상에 나서겠는가? 북이 바보인가?

 

지금까지 개성공단 정상화와 관련된 회담 과정 속에서 우리 정부의 철저한 아집과 북 당국의 고집이 불꽃을 튀기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봐야만 했다. 그리고 이를 교묘하게 비틀어 보도하는 보수 언론들의 작태도 지겹게 봤다.

 

북이 왜 개성공단 가동중단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제대로 소개한 언론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 정부가 북을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한미훈련 등을 통해 얼마나 압박을 가해왔는지 그 배경을 안다면 북이 왜 개성공단을 중단시켰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정부는 지금까지 북에게 반성문을 제대로 크게 써서 바치지 않으면 재가동을 안 한다고 버텨왔다. 오직 명분이다. 그 명분에 개성공단 60,000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있다.

 

북과 전쟁을 할 텐가? 자신 있나? 미국이 든든하게 우리 뒤를 봐주고 있으니 걱정이 없나? 그래서 전시작전통제권을 다시 미국의 품에 안기려 하나? 전 세계 국민들의 조롱을 받으며?

 

난 결국 하나라고 본다. 답은 말이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우리를 외면해왔다. 나 아니면 너, 우리 아니면 적으로만 나누었다. 버릇이 됐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곳도 아니고 북은 더 이상 나와 너로 나누면 안 된다. 그들도 우리고, 우리가 그들임을 이제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 아닌 관계. 그들이 아프면 우리도 아플 수밖에 없는 관계. 그게 남과 북이요, 한반도요, 통일인 것이다. 북이 잘못하고 고쳐야 할 것이 있으면 꾸짖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고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하지만 윽박지르고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경제적으로 압박한다면, 답은 없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고,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나눌 것은 나누고 도울 것은 돕는 가운데, 천천히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 북이 중국의 입김보다는 우리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도록, 우리도 미국의 말만 받들지 말고, 동포의 처지를 고려해가며 정책을 결정짓는 노력이 필요하다. 더 이상 친북좌파니 좌빨이니 하는 한심한 소리 지껄이지 말고, 친미도 하고 친중도 하고 친북도 하는 균형이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은 오랫동안 북을 연구하고 현장에서 직접 북을 겪어본 기자 출신의 저자가 풀어내는 오늘과 미래의 북 이야기다. 그의 글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일단 지금의 북 현황과 새로운 지도자 김정은에 대한 소중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또한 우리가 진정 대북정책, 남북관계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우리 민족이 행복할 수 있을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줄 것이다.

 

다시 금강산이 열리고 개성이 열리고, 끝내 백두산이 열리는 그 날을 기다린다. 오늘도.

 

우씨. 암튼 남북관계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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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나를 찾아가는 첫걸음 - 30대에 다시 시작하는 위안과 희망의 일기쓰기 안내서!
스테파니 도우릭 지음, 조미현 옮김 / 간장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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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어떻게 매일 맑음이냐? 좀 양심적으로 몰아 쓰자 우리. 손 아파서 어떻게 참았니. 고생했다. 이 녀석아!”

 

국민학교, 절대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 시절에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가끔 벌어지곤 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그 어린 아이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두르던 선생님들이 간혹 있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 분들은 어찌나 남녀평등을 온 몸으로 실천하셨는지. 여자 아해든 사내 녀석이든 차별을 두지 않으셨다.

 

다행히 나는 그런 극악무도한 선생님을 담임으로 맞은 적이 없었지만, 불운했던 친구 녀석들은 가끔 퉁퉁 부은 얼굴을 하며 담임 뒷담화에 나를 끌어들이곤 했다. ,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했다 싶다.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국민학교 때는 방학 동안 탐구생활이라는 버라이어티한 책을 꼼꼼하게 정리해서 가져오는 아해들이 제법 있었다. 우스운 것은 3학년인가 4학년 때 병환으로 집에만 계실 수밖에 없었던 아버님 덕분에 나 역시 탐구생활을 그야말로 기가 막히게 작성해서, 무려 상까지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상보다 그 상에 대해 뿌듯해 하시던 아버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은 기억이나 하실 런지.

 

암튼 문제는 언제나 일기였다. 국민학생이 방학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일기를 정직하고 아름답게 작성해 개학과 동시에 멋들어지게 선생님께 제출한다면, 그 아이는 분명 정신적으로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만약 그런 분들이 계셨다면 죄송), 암튼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최소한 12일 동안) 작성해 제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건 아버님과의 공조도 소용없지 않나.

 

이런 아름다운 추억 때문인가. 일기 쓰기는 어쩐지 강압에 의해 억지로, 게다가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가정 하에 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난 군대에 들어가서도 수양록이라는 이름의 일기를 써야만 했다. 비극이다. 뭔 수양록! 쓰다가 성질 다 버리는 것이 수양록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난 대학 시절부터 일기를 써왔다. 물론 매일 매일 쓰진 못했지만, 꽤 길게 때로는 꽤 자세하게, 내 맘대로 써왔다. 누가 본다는 생각은? 물론 하지 않았다. 나중에 졸업을 앞두고 자비로 제작한 문집에 몇 개를 집어넣기도 했지만 말이다.

 

일기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휴식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쓰는 글들은 언제나 가슴에 무거운 부담을 안고 쓸 수밖에 없다. 지금 쓰는 서평도 그런 글에 속한다. 하지만 일기는 아니다. 내 삶의 조각들을 내 스스로 곳곳에 던지고, 때로는 그것들을 다시 꿰어 맞추는 것이 일기다. 때문에 최대한 자유로워야 하고, 지극히 개인적이며 내밀해야 한다.

 

저자의 책을 집어 들게 된 것은 굳이 저자가 말하는 일기 쓰기 방법을 따라하려고 했다기보다는 내가 쓰고 있는 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차원이었다. 드문드문 써내려 간다고는 하지만, 일기 역시 공력을 기울여야 하는 작업이다. 그 작업을 나는 진정 자유롭고 편안하게 하고 있는 것인지, 행여 직업병이 발동해 기자의 눈으로 기자의 마음으로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 자신은 바로 내 안에 있다. ‘이 안에 너 있다식의 김정은이 아닌, 내 자신 말이다. 그러니 나를 찾으려면 내 안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나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그 방법 중 가장 현명한 것이 일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더 좋은 방법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난 일기를 나와의 대화 공간이라 생각한다. 저자 역시 여기에 동의한다. 고맙게도.

 

저자는 내가 눈길을 주기만 하면, 일기는 언제든 내 이야기를 정성껏 귀담아 들어주고 내 참된 목소리를 들려준다고 말한다. 어리석은 나는 아직 참된 나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일기는 내 마음의 소소한 안식을 주는 고마운 친구임엔 틀림없다.

 

게으른 내가 그나마 정기적으로(그리고 생계가 아닌 이유로) 써내려가는 것이 딱 두 개있다. 하나가 일기이며, 하나가 서평이다. 독서노트라 하여 내가 읽은 책에 대한 간단한 기록을 해두는 것도 있다. 책 제목, 저자, 출판사, 독서기간 등을 기록해두는 것이다. 난 쪼잔하게도 독서번호도 매긴다. 하도 읽은 책이 없어서 일부러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책은 내 독서번호 1413호 책이 되었다.

 

그리 무난한 성격이 아닌 탓에 남들이 보면 왜 저래?”할 수도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 조금 있다. 예를 들면 월간지나 주간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전부 다 읽어야 바로소 속이 시원하다는 것, 게다가 아무리 월간지가 밀려도 최근 호 보다는 밀렸던 가장 오래된 호부터 순서대로 읽어나가야 한다는 것,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최소한 10분 전에 자리에 앉아서 맨 처음부터 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만약 시간에 늦어 첫 부분을 놓치거나, 중간에 들어가야 할 때가 발생하면 대부분 난 영화를 포기하고 아예 안 들어간다), 가능하면 색연필과 포스트 잇이 갖춰진 상태에서 책읽기를 해야 편하다는 것 등이다. , 생각해보니 조금이 아니었구나.

 

이러한 몹쓸 성격으로 인해, 하나 더 추가된 것. 일기를 하루에 두 개씩 쓴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 오늘 일기와 밀린 과거의 일기를 동시에 쓴다는 말씀. 제대로 꼬박 안 썼으니, 또 다시 언제나 맑음이 될 가능성도 농후하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다이어리에 그날 했던 일과 느낌을 간략하게 메모하는 습관은 버리지 않았느니, 대충 기억을 더듬어보면 밀린 과거에 대한 일기도 나름 재미있게 쓸 수 있다. 이쯤 되면 병이다. 나도 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내가 즐거우면 그만인 것을.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죽은 뒤 내 후손들이나 전혀 안면도 없는 누군가가 내 일기장을 보면서 킥킥 웃을 수 있다면, 그것도 성공 아니겠나? 내 사후에 일기를 출판하게 된다면, 그래도 인세 중 일부는 내 가족들에게 주시길. 판권은 내 아내에게 넘기겠노라!

 

즐거운 세상은 아니지만, 즐겁게 살고 싶다. 거기에 나의 은밀하고도 스펙터클하고 섹시하면서도 온갖 불법과 탈법이 난무하는 일기장이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 인정해야겠다.

 

여러분도 여러분만의 세계를 만들어 멋지게 꾸며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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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선수 - 뿌리를 잊지 않는 재일 축구선수들의 역경과 희망의 역사
신무광 지음 / 왓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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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아니, 거센 분노를 참을 수 없다.

 

한국은 우리 모두가 보다시피 표현할 단어를 찾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 되어가고 있고, 일본 역시 사정이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다시금 과거 군국주의 국가의 모습으로 회귀하려는 일본을 보고 있으면, 도대체 저 나라 국민들은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 제국?

 

아베 신조 수상이 다시 집권한 이후 일본은 단순한 우경화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는 모습이다. 이웃 국가들과의 평화로운 공존보다는 군사력 강화나 평화헌법 수정 등을 통해 과거 잃어버린 제국의 위엄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강해 보인다. 게다가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굴종, 그리고 세계 패권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지속적인 견제, 또 과거사, 영토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까지. 어차피 동북아, 동아시아 국가로 분류되는 것 자체를 거부해온 일본이지만, 사실상 아시아를 넘어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리더십은 상상 외로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라는 전대미문의 자연재해 이후 더욱 가속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재앙과도 같은 자연재해를 겪은 뒤, 경제 회복과 국제적 리더십 확대 면에서 자신감을 상당히 잃어버리고 위축되어 왔다.

 

때문에 아베 정권을 비롯한 일본 정치계가 지금과 같은 비상식적인 행동을 반복하고, 여기에 국민들의 지지 또한 높은 것은, 단순히 이들이 역사의식이 전무하다거나 개념이 없어서가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들의 현 상황을 살펴봐야 그림이 보일 것이다.

 

어쩌면 현재 일본 지도부는 일본이란 국가가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끌어 모아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자국의 위상 회복과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동북아에서 일본과 중국의 위상이 바뀐 지는 오래 되었다.

 

과연 한·일 양국은 스스로 안에서부터 무너질 것인가. 정의와 상식이 무너진 두 나라의 모습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동북아 정세에 더욱 깊은 안개를 드리우게 한다.

 

, 그럼 책 이야기다. 지난 남아공 월드컵 당시 잊을 수 없는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북의 대표팀으로 출전한 정대세의 눈물이다. 그는 남아공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북의 국가를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무엇을 말해주었을까. 일본에서 태어나 받아야 했던 차별과 무시, 이는 모든 재일조선인들이 겪어야만 했던 아픔이었다. 그는 두 개로 쪼개진 조국에서 반쪽의 이름으로 그라운드에 서야만 하는 자신의 모습과 또한 세계적인 무대에 섰다는 기쁨 등이 한꺼번에 밀려와 그렇게 서러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나 역시 가슴 뻐근함을 느껴야만 했다.

 

현재 그는 수원 삼성에서 뛰고 있다. 얼마 전, 개념은 달나라에 이미 갖다 준 한 보수 논객이 정대세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조사해야 한다고 떠든바 있다. 그가 자신의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말했다는 것이 국보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거기에 검찰은 맞장구를 쳤다.

 

욕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다들 정신병자가 아닌가 싶었다. 북 대표로 월드컵에 출전했던 그가 자신의 조국이 북이라고 말한 것이 위법인가? 그는 언제나 남과 북 모두 자신의 조국(어머니 나라)이라고 말해왔다. 하긴 지금 이 사회가 온전히 제정신으로 살아가기엔 조금 벅차기도 한 것이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보수 논객의 북에 대한 맹목적인 반감과 증오는 돈이 오고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최전방인 프로 스포츠에서조차 이념을 잣대로 판단해버리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말았다. 한심하다.

 

책은 재일조선인축구단의 역사와 그 역사 속에서 빛을 발했던 이들의 이야기다. 이는 온전히 우리네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본에서 프로축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93년 이전까지 일본 열도를 제패했던 재일조선인축구단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정대세, 안영학, 이충성 등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재일조선인 출신 프로축구 선수들의 뿌리. 일본에 살고 있는 모든 재일동포들의 자존심이자 희망이었던 재일조선인축구단. ‘조고참배라는 신화와 같은 단어를 만들어냈던 그들은 진정 남북 모두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재일 3세 출신의 언론인인 저자는 최근 한국 사회에도 많이 알려진 정대세를 시작으로 재일출신 J-리거, 혹은 재일조선인 축구선수와 축구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겪어야 했던 방황과 상처, 아픔을 그들의 입을 통해 소개한다.

 

조선인이란 이유로 차별받고, 재능마저 마음껏 발휘할 수 없었던 그들. 하지만 그들은 절대 지지 않고, 무릎 꿇지 않는다는 각오로 그라운드를 누볐고, 결국 일본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인 J-리그에 입성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아울러 때로는 인공기를 달고, 때로는 태극기를 달고 세계무대에 나섰다.

 

가슴 벅찬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오히려 가슴이 더욱 뻐근했다. 축구로 민족 분단의 설움, 일본의 탄압을 버틸 수 있었다는 이들의 이야기는 정작 이들의 조국인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게 한다.

 

지난 721일 동아시안컵 축구대회에 참가한 북의 여자대표팀과 우리 한국 여자대표팀의 경기를 관람했다. 남북의 여걸들은 저마다 맘껏 기량을 뽐냈고, 서로 넘어진 선수를 일으켜 세워주며, 스포츠정신과 민족애를 함께 보여줬다. 어찌 맘이 울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신 사진을 찍어대면서도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것으로도 아름답다!’는 생각뿐이었다.

 

붉은 악마에게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북 여자팀이 볼을 잡고 골문으로 쇄도할 때마다 야유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아울러 경기장에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하지 못하게 막은 것, 통일과 화해를 염원하는 현수막을 내걸지 말 것 등 참 속 좁아 보이는 모습이 많았다. 게다가 경기장 앞에는 탈북지원단체가 와서 북을 비방하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도 했다. 국제적인 행사의 일원으로 참가한 손님한테, 정말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스포츠는 많은 것을 보여주는 행위다. 그리고 메시지이다. 특히 남북 간의 스포츠 교류는 정치가 하지 못하는 많은 부분을 이뤄낼 수 있다. 경색 국면을 넘어 파탄의 지경으로 가고 있는 남북 관계의 현 주소를 볼 때, 스포츠 교류를 통해서 부드럽게 풀어나가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조고 참배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자. 조선학교, 민족학교 즉 재일조선인들이 만든 학교는 일본의 전국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외국인으로만 구성된 팀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조선학교에는 어김없이 축구부가 존재했고, 그들의 실력은 어느 일본 팀과도 겨루어도 뒤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대회에 나가 경기할 수 없었던 조선학교 축구팀은 친선경기라는 이름으로 일본 학교 팀들과 대결했다. 그리고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민족학교만을 위한 전국체전인 재일 조선학생 중앙체육대회에서 30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조선고급학교 축구팀. 이들의 막강한 실력은 곧 일본 열도에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조고 참배이다.

 

전국 대회에 출전하는 일본의 축구 명문 고등학교들에게는 필수 코스였던 조고 참배는 자기들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도쿄 조선고급학교 축구부와 시합하는 것을 뜻했다. 도쿄 조선고급학교를 상대로 이기면 전국대회에서도 우승할 수 있다는 전설이 생겨난 것도 그 즈음이다. 이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일례로 아키타쇼교 고등학교가 먼 길을 달려 도쿄까지 찾아왔고, 1964년의 연습시합 때 50으로 패했던 나라시노 고등학교는 1965년도 고교선수권대회에서 오사카 메이세이 고등학교와 동시 우승을 차지하자마자 조선고급학교로 몰려왔다. 이유는 단 하나, 진정한 승자를 가리자는 것이었다. 우승기까지 들고 기세등등하게 입장 행진을 하며 등장한 나라시노 고등학교. 하지만 결국 그들은 조선고급학교에 참패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단지 공 하나만 있으면 되었다. 수많은 설움과 그리움, 아픔과 상처는 오기와 끈기로 무장한 조선인들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그들은 공을 차며, 땅을 구르며, 머리를 부딪치며 우리는 조선인이야. 절대 지지 않아!’ 라고 외쳤다. 그들의 이야기는 절로 머리를 숙이게 하고, 또 다른 뭉클함으로 다가온다. 우린 조선인이라는 사실.

 

일본에서 오늘도 극우정권 하에서 갖은 차별과 탄압을 받으며, 그럼에도 웃으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조선학교, 민족학교 학생들에게 다시 한 번 응원과 사랑의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그들이 끝내 승리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민족의 미래를 담보로 어처구니없는 게임을 하고 있는 남북의 권력자, 당국자들에게 말한다. 제발, 민족적 양심을 저버리지 말고, 대화와 타협으로 다시 서로의 문을 열라. 그리고 그 와중에 다시 남과 북의 뜨거운 젊은이들이, 거기에 더해 타향에 살고 있는 우리 모든 조선인들이 하나가 되어 그라운드를 누빌 수 있도록 해 달라.

 

우리는 하나다. 절대 지지 않는다.

 

감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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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 트레이더 김동조의 까칠한 세상 읽기
김동조 지음 / 북돋움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경제이야기 그리고 경제학을 재미있게 풀어 쓰거나 이야기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온통 딱딱한 용어와 법칙들이 난무하는 경제학을 일반 독자들이 편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공을 갖춘 사람이라야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상당한 내공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따분할 수도 있는 경제 이야기를 우리네 실생활과 연결시켜 매우 흥미롭게 풀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술술 읽히는 재미는 제법 쏠쏠하다.

 

그는 빤한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차라리 편견에 가득 찬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상식이라 알려져 있는 것에 도전하고, 고정 관념을 과감히 부수는 책. 누구에게는 상식인 것이 다른 누구에게는 단순한 의견일 수도 있음을 지적하며, 저자는 편견으로 가득 찬 세상은 결국 자기 목소리로 가득 찬 세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에 자신의 편견을 과감히 담아 버렸다. 때문에 조금은 도전적이고, 논쟁적이다.

 

저자는 마약 문제, 성매매, 사형제도 등 고정관념에 빠져 있기 쉬운 주제들에 과감히 이견을 제시한다. 강간범을 사형에 처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 차별 없는 세상이 오히려 불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 등은 경제학적 논리와 맞물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는 김밥 가게 두 곳에서 삼성과 애플의 미래를 점치는가 하면, 부부 간의 이해관계 속에서 게임이론의 내시 균형을 접목시키기도 한다.

 

그는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이론들을 우리의 인생에 대입시켜 설명한다. 기회비용을 이야기하며 왜 결혼 적령기에 결혼하는 것이 가장 유리한 것인지 이야기하고, 매몰비용을 말하며, 왜 아무리 오래 사귄 연인이라 해도 결혼 상대자가 될 수 없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헤어져야 하는지 설명한다. 또한 생산성의 개념을 이야기하며 중요한 것은 결국 다른 나라와의 비교, 즉 경쟁력이 아닌 온전한 생산성 증가라고 강조한다.

 

경제관념이나 경제학에 대해 당최 막연한 두려움만을 가지고 있는 내가 별 어려움 없이, 아니 상당히 재미있게 책을 읽어 내려갔다는 것은 그만큼 저자의 비유나 실생활에서의 대입이 적절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경제학 도서라면 환영하고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저자의 말대로 설득력이 없이 자기 목소리로만 가득 찬 책은 불편하고 불쾌하다. 하지만 설득력을 확보한 편견은 불편함을 줄지는 몰라도 불쾌감을 주지는 않는다. 아울러 그런 의견들은 비록 작은 목소리라 해도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의견이 상식으로 수렴하는 과정에 이바지하게 된다.

 

세상엔 엉터리 질문들이 많다. 그 중 어린 아이들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묻는 질문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이것이 나쁜 질문의 전형이라 말한다. 아이들은 아직 무엇에 적성이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직업이 좋은 직업인지도 충분히 알지 못한다. 아니, 세상에 직업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조차 모른다. 때문에 그것은 어른들이 스스로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강요하거나, 빤한 소리를 듣고 싶을 때 하는 질문일 뿐이다. 아이들은 기껏해야 티브이나 부모님,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 직업을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계적으로 정리된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가장 좋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제학적 관점이다. 이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경제학적 관점에 익숙해지면 이런 사랑을 하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보다 이런 결혼을 하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이 인간을 파악하는 더 좋은 질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물론 저자의 주장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경제학적 관점으로만 볼 수는 없다. 아마 애초부터 불가능하지 않을까? 인간은 지구상 어떤 생명체보다 합리적이지 못한 측면이 많은 동물이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자신의 주장이 100% 옳다고 스스로 자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사안을 분석하고 일상적 현안에 대응하는 데 경제학적 관점과 전략적 사고보다 더 나은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저자의 솔직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 방법론에 신뢰가 있고, 여기에 노력이 더해진다면, 설사 예측이 틀리고 대응이 서툴러 결과가 나빠도 상처입지 않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그는 전략적일 수 없다면 철학적이기라도 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책은 경제학적 관점으로 세상의 다양한 이슈를 바라보고 있다. 또한 후회 없는 인생 설계하기에서는 결혼, 이혼, 교육, 부모, 친구, 양육, 직업, 직장 등 삶의 단계마다 혹은 삶을 통틀어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을 이야기한다. 말 그대로 후회 없는 삶을 위해서는 전략적인 사고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 각자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 필요한 전략을 설명하고 있다.

 

경제학이라 하면 일단 한껏 어렵다고만 생각하는 나에게,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온 책이다. 아울러 애초에 글러먹은 성격이라 온전히 저자의 전략대로 살아가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나 역시 경제학적 관점에서 두 눈을 똑바로 바짝 뜨고 세상을, 또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도 나쁜 경험은 아니겠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정말 정말 좋은 경제학이 되리라.

 

,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느낀 궁금증 하나. 대한민국에 그 수많은 경제학자, 경영학과 교수 들은 전부 부자일까? 혹은 전부 돈을 많이 벌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헐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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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책갈피 -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위인들의 초대
김옥림 지음 / 미래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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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책 표지에 내가 그다지 맘에 들어 하지 않는 단어가 무려 두 개나 포진해 있다. ‘청춘멘토’. 왜 그러냐고? 어느 교수님이 아파야 청춘이란 위로 아닌 위로를 하신 이후로,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위로 아닌 위로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켜 돈과 명예를 교수님을 비롯한 출판사에게 안겨 준 이후로, 왠지 청춘과 멘토라는 단어는 수상쩍은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까지 청춘들에 거의 관심이 없었거나, 혹은 단순한 피착취자, 소비자로 여겼던 사회 풍토에서 단숨에 이들을 사회의 중심 혹은 매우 중요한 세대로 부각시킨 것에는 일정 정도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청춘 바람, 멘토 바람이 분 이후에도 우리 청춘들의 팍팍한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억지 춘향이 식의 위로를 날린 몇몇 자칭 멘토들만 부와 명예를 얻었다는 점은 나의 의심이 아주 허무맹랑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을 살아가는 청춘들에겐 물론 따스한 위로와 격려와 필요하다. 최고의 학력과 두뇌를 자랑하는 이들이 오히려 가장 힘든 삶을 버텨야만 하는 현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꽉 움켜쥐고선 좀처럼 이들에게 넘길 생각을 하지 않고, 아래에서는 어린 친구들이 자신들의 길을 답습하며 살아 보겠다고 치고 올라오는 상황. 오호라, 이런 상황에서 위로와 격려는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하지만 그게 전부가 되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국 청년실업, 무지막지한 대학 등록금 등의 문제는 슈퍼 울트라 멘토가 어벤져스처럼 떼로 몰려와도 해결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이는 제도적, 법적 개선과 함께 사회 전체적인 의식의 변화와 수반되어야 하는 아주 심각하고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문제를, 대충 위로 좀 하고 대충 격려 좀 하면서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생각은, 분명 매우 불순하고 비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안 되지. 양심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출판사와 저자만 실컷 배부르게 하는 힐링 도서나 멘토 어쩌구 하는 도서들, 또한 청춘을 들먹이며 폼 잡는 책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지금도 않는다. 나까지 그들에게 돈을 쥐어줄 생각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대련 등 대학생 단체들이 반값등록금 집회를 하거나 실업문제 해결을 위해 나설 때, 조용히 다가가 피자 몇 판이나 통닭 몇 마리 슬쩍 안기고 오는 게 더욱 그들을 살찌게(!) 하는 것 아닌가. 많은 기성세대들이여, 나와 함께 피자 가게로!

 

아무튼 책을 이야기해보자. 책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만든 책인 듯하다. 물론 대학생이 읽어도 무난하고, 성인들이 한 번쯤 들여다봐도 손해는 아닐 것 같다. 책 표지의 선전 문구처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위인의 초대이니, 그들이 젊은 날 역경을 이겨내고 세계무대에 중심에 선이야기들을 살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일단 저자는 무수히 많은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 중 지금의 청춘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례나 일화 혹은 일생을 담았다. 정상회담이란 말을 처음 만들어낸 윈스턴 처칠 경부터 세계 최고의 갑부 중 하나인 빌 게이츠까지. 분명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을 스캐닝 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교훈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꿈을 위해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극복하고 결국 불굴의 의지로 성공한 이들의 일화는 분명 젊은이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책을 관통하고 있는 누구에게나 삶이란 참으로 귀한 것이라는 메시지는 자칫 자신의 삶 자체에 회의를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는 청춘들에게 그야말로 따스한 위로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풍기는 자기계발서의 냄새 때문이다. 어떻게 했기에 성공했다. 어떻게 했기에 돈을 많이 벌었다. 이는 결국 성공이라는 매우 주관적이고 다양한 견해가 가능한 이야기를 부와 명예라는 단 두 가지로 단순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부와 명예가 성공의 대표적인 상징이기는 하다. 하지만 과연 청소년들에게 이 두 가지만을 중심적으로, 그리고 매우 중요한 것처럼 강조한다면, 가뜩이나 돈과 권력 앞에 정의가 사라진 지금, 아이들이 무얼 느끼게 될까. 조금 우울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릴 적 위인전을 꽤 읽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책이 많았던 것 같다. 기억에 남는 것은 이승만이나 맥아더, 나폴레옹 등이다. 맥아더도 한심했고 이승만도 왜곡이 심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으리라 믿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상야릇한 위인전들이 많다. 오바마 대통령은 당최 무엇을 하였기에 위대한 인물이라 칭송받아야 하는지, 난 여전히 모르겠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잡스 형님도 그렇고. 요즘은 그냥 성공한 사람과 위인의 구별이 애매한 것 같다.

 

아이들에게는 그리고 청춘들에게는 다양한 성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꼭 권력자이거나 갑부, 연예인 등등이 성공의 유일한 사례가 아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수많은 청춘 중 정작 그런 성공의 사례에 들어갈 이들은 티끌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청춘들의 허탈감은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일이지만, 보잘 것 없게 보일 수도 있는 직업이지만, 이를 통해 사회에 보탬이 되고, 이웃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그 역시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난 그런 위인전, 그런 멘토, 그런 청춘 도서를 만나고 싶다.

 

저자는 책 날개에 자신의 화려한 이력을 빽빽하게 적어 넣었다. 출판사에서 준비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분명 확인했을 것이다. 조금 낮 간지럽지 않았을까 싶다. 자기 스스로 나 이렇게 잘났다!’고 외치는 이들 중 정말 알맹이가 꽉 찬 이들을 거의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냥 한 번쯤 쭉 읽어 내려가며, ‘, 이 사람은 이런 삶을 살았군’ ‘, 이 양반은 이렇게 성공했군정도로 읽는다면, 괜찮을 법한 책이다. 심오한 철학이나 위로나 격려는 접어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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