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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나를 찾아가는 첫걸음 - 30대에 다시 시작하는 위안과 희망의 일기쓰기 안내서!
스테파니 도우릭 지음, 조미현 옮김 / 간장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넌 어떻게 매일 맑음이냐? 좀 양심적으로 몰아 쓰자 우리. 손 아파서 어떻게 참았니. 고생했다. 이 녀석아!”
국민학교, 절대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 시절에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가끔 벌어지곤 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그 어린 아이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두르던 선생님들이 간혹 있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 분들은 어찌나 남녀평등을 온 몸으로 실천하셨는지. 여자 아해든 사내 녀석이든 차별을 두지 않으셨다.
다행히 나는 그런 극악무도한 선생님을 담임으로 맞은 적이 없었지만, 불운했던 친구 녀석들은 가끔 퉁퉁 부은 얼굴을 하며 담임 뒷담화에 나를 끌어들이곤 했다. 참,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했다 싶다.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국민학교 때는 방학 동안 탐구생활이라는 버라이어티한 책을 꼼꼼하게 정리해서 가져오는 아해들이 제법 있었다. 우스운 것은 3학년인가 4학년 때 병환으로 집에만 계실 수밖에 없었던 아버님 덕분에 나 역시 탐구생활을 그야말로 기가 막히게 작성해서, 무려 상까지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상보다 그 상에 대해 뿌듯해 하시던 아버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은 기억이나 하실 런지.
암튼 문제는 언제나 일기였다. 국민학생이 방학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일기를 정직하고 아름답게 작성해 개학과 동시에 멋들어지게 선생님께 제출한다면, 그 아이는 분명 정신적으로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만약 그런 분들이 계셨다면 죄송), 암튼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최소한 1박 2일 동안) 작성해 제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건 아버님과의 공조도 소용없지 않나.
이런 아름다운 추억 때문인가. 일기 쓰기는 어쩐지 강압에 의해 억지로, 게다가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가정 하에 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난 군대에 들어가서도 수양록이라는 이름의 일기를 써야만 했다. 비극이다. 뭔 수양록! 쓰다가 성질 다 버리는 것이 수양록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난 대학 시절부터 일기를 써왔다. 물론 매일 매일 쓰진 못했지만, 꽤 길게 때로는 꽤 자세하게, 내 맘대로 써왔다. 누가 본다는 생각은? 물론 하지 않았다. 나중에 졸업을 앞두고 자비로 제작한 문집에 몇 개를 집어넣기도 했지만 말이다.
일기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휴식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쓰는 글들은 언제나 가슴에 무거운 부담을 안고 쓸 수밖에 없다. 지금 쓰는 서평도 그런 글에 속한다. 하지만 일기는 아니다. 내 삶의 조각들을 내 스스로 곳곳에 던지고, 때로는 그것들을 다시 꿰어 맞추는 것이 일기다. 때문에 최대한 자유로워야 하고, 지극히 개인적이며 내밀해야 한다.
저자의 책을 집어 들게 된 것은 굳이 저자가 말하는 일기 쓰기 방법을 따라하려고 했다기보다는 내가 쓰고 있는 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차원이었다. 드문드문 써내려 간다고는 하지만, 일기 역시 공력을 기울여야 하는 작업이다. 그 작업을 나는 진정 자유롭고 편안하게 하고 있는 것인지, 행여 직업병이 발동해 기자의 눈으로 기자의 마음으로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 자신은 바로 내 안에 있다. ‘이 안에 너 있다’ 식의 김정은이 아닌, 내 자신 말이다. 그러니 나를 찾으려면 내 안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나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그 방법 중 가장 현명한 것이 일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더 좋은 방법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난 일기를 나와의 대화 공간이라 생각한다. 저자 역시 여기에 동의한다. 고맙게도.
저자는 “내가 눈길을 주기만 하면, 일기는 언제든 내 이야기를 정성껏 귀담아 들어주고 내 참된 목소리를 들려준다”고 말한다. 어리석은 나는 아직 참된 나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일기는 내 마음의 소소한 안식을 주는 고마운 친구임엔 틀림없다.
게으른 내가 그나마 정기적으로(그리고 생계가 아닌 이유로) 써내려가는 것이 딱 두 개있다. 하나가 일기이며, 하나가 서평이다. 독서노트라 하여 내가 읽은 책에 대한 간단한 기록을 해두는 것도 있다. 책 제목, 저자, 출판사, 독서기간 등을 기록해두는 것이다. 난 쪼잔하게도 독서번호도 매긴다. 하도 읽은 책이 없어서 일부러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책은 내 독서번호 1413호 책이 되었다.
그리 무난한 성격이 아닌 탓에 남들이 보면 “왜 저래?”할 수도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 조금 있다. 예를 들면 월간지나 주간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전부 다 읽어야 바로소 속이 시원하다는 것, 게다가 아무리 월간지가 밀려도 최근 호 보다는 밀렸던 가장 오래된 호부터 순서대로 읽어나가야 한다는 것,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최소한 10분 전에 자리에 앉아서 맨 처음부터 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만약 시간에 늦어 첫 부분을 놓치거나, 중간에 들어가야 할 때가 발생하면 대부분 난 영화를 포기하고 아예 안 들어간다), 가능하면 색연필과 포스트 잇이 갖춰진 상태에서 책읽기를 해야 편하다는 것 등이다. 아, 생각해보니 조금이 아니었구나.
이러한 몹쓸 성격으로 인해, 하나 더 추가된 것. 일기를 하루에 두 개씩 쓴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 오늘 일기와 밀린 과거의 일기를 동시에 쓴다는 말씀. 제대로 꼬박 안 썼으니, 또 다시 ‘언제나 맑음’이 될 가능성도 농후하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다이어리에 그날 했던 일과 느낌을 간략하게 메모하는 습관은 버리지 않았느니, 대충 기억을 더듬어보면 밀린 과거에 대한 일기도 나름 재미있게 쓸 수 있다. 이쯤 되면 병이다. 나도 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내가 즐거우면 그만인 것을.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죽은 뒤 내 후손들이나 전혀 안면도 없는 누군가가 내 일기장을 보면서 킥킥 웃을 수 있다면, 그것도 성공 아니겠나? 내 사후에 일기를 출판하게 된다면, 그래도 인세 중 일부는 내 가족들에게 주시길. 판권은 내 아내에게 넘기겠노라!
즐거운 세상은 아니지만, 즐겁게 살고 싶다. 거기에 나의 은밀하고도 스펙터클하고 섹시하면서도 온갖 불법과 탈법이 난무하는 일기장이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 인정해야겠다.
여러분도 여러분만의 세계를 만들어 멋지게 꾸며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