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춤 펜더개스트 시리즈 4
더글러스 프레스턴.링컨 차일드 지음, 신선해 옮김 / 문학수첩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펜더개스트 시리즈 중 ‘디오게네스 3부작’으로 알려진 것 중 2번째 작품이자, 펜더개스트 시리즈 4번째 이야기. 내 버릇 중 하나가 시리즈를 보게 되면 무조건 처음부터 봐야하고, 가능하면 끝까지 완결을 내버리는 것인데, 때문에 펜더개스트 시리즈 역시 국내에 출간된 것은 모조리 구해서 읽었다. 음… 가끔 생각해보면 그리 좋은 버릇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원피스나 뭐 그런 것들이면 피곤하잖아! 언제 다 모아!

 

지난 《브림스톤》에서 형인 펜더개스트를 죽음의 위기까지 몰고 갔던 디오게네스는 이번 편에서 형의 지인들을 하나하나 잔인하고, 또한 기괴하게 살해해 나간다. 그리고 이를 막으려는 펜더개스트를 조롱하듯, 그가 사랑하는 여인 비올라마저 납치하는데….

 

대부분 영미권의 스릴러 작품들은 영화나 드라마를 염두하고 처음부터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스토리의 전개 또한 장면 하나하나가 머릿속에서 그대로 떠오를 만큼 생생하고 또한 박진감이 넘친다.

 

펜더개스트 시리즈의 미덕이자 아쉬운 점 또한 마찬가지다. 나름 치밀한 플롯으로 전개되는 스토리는 긴장감이 넘치고 또한 액션도 화려하다. 책장을 넘기면서 장면장면 하나가 그대로 스크린에 담아져도 무리가 없다. 아니, 스크린용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때문에 살짝 아쉬운 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깊이감이 부족해 보인다고 할까. 눈앞에 보이는 장면 묘사나 액션에 다소 무게를 주다보니 스토리가 왠지 억지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또한 너무나 막강한 디오게네스와 여기에 속수무책인 일반 평민(!)들. 그리고 유일하게 맞서는 펜더개스트 간의 계급적(!) 격차가 심각하게 크다. 초사이어인 두 명의 대결에 일반 엑스트라들이 가끔씩 나서는 정도?

 

뭐, 그렇다고는 해도, 스릴러의 정석을 충실히 지켜가며 방대한 분량을 별 부담 없이 읽어 내려가게 하는 것은 분명 두 공동저자의 능력이자 작품의 미덕일 것이다. 또한 꼼꼼한 두 양반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사건들의 리얼리티를 100% 살리고 있다. 이건, 단지 인터넷만 뒤진다고 나올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지난한 자료조사와 사실 확인의 과정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역시, 재능도 중요하지만 작품은 근면함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이 작품 이후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지옥의 문》이 출간되었다. 물론 당연히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상 읽어 내려갔다. 가끔씩 타인의 창작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는 이들을 보게 된다. 글쟁이들의 무한한 고통을 우습게 보는 이들.

 

좀 화가 난다. 모든 글쓰기는 고통이 수반된다. 즐겁게 글쓰기를 할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냐만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이들은, 내 생각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얼 마 간의 고통은 창작의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고 있기도 하다.

 

집에 산재되어 있는 책들을 나름 장르별로 구별하여 분리시켜보려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예상 외로 스릴러나 추리문학이 적지 않았다. ‘오호라, 요거 괜찮네’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답답할 때는 뭐니 뭐니 해도 스릴러만한 것이 없다. 밑줄을 팍팍 쳐가며 책을 읽어가는 내 성격에는 더욱 더.

 

아, 난 스릴러도 밑줄 쳐가며 읽기도 한다는.

 

뭐야…. 집중력 부족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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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림스톤 펜더개스트 시리즈 3
더글러스 프레스턴.링컨 차일드 지음, 신윤경 옮김 / 문학수첩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으아, 무려 721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이틀 만에 다 읽었구나. 음……. 너 시간 많았구나. 에헴.

 

경애해 마지않는 펜더개스트 시리즈의 3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부터 슬슬 펜더개스트의 숙적인 동생 디오게네스가 등장한다. 전작에서도 살짝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이번 편부터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작품의 후반에 등장하긴 하지만, 다음 편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번 작품에서 내 흥미를 끌었던 것은 다름 아닌 자연발화 현상이었다. 인간이 아무런 외부의 영향 없이 스스로 불타오르는 현상. 이러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은 이미 많은 미스터리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단 돈 1000원 짜리 시리즈 북이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어느 출판사의 어떤 시리즈였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리즈의 내용들은 얼핏 기억이 나는데, 전체적으로 시리즈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미스터리였다. 어떤 책은 동서양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귀신이나 마귀, 요정들을 종합하기도 했고, 또 어떤 책은 UFO에 대한 집중 분석을 담기도 했다. 공룡들을 주인공으로 한 일본 액션 드라마를 분석하기도 했다.

 

그 중 하나가 아마도 영적인 존재에 대한 책이었던 것 같다. 즉 귀신, 고스트. 그런데 여기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자연발화현상이었다. 홀로 살아가던 노부인이 한쪽 발목만 남기고 스스로 불타버렸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기억이 날만큼 어린 시절 충격과 미스터리로 다가왔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자연발화는 물론 나름대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벌어진 살인이었다. 뭐, 저자들이 설명하는 내용에 동의하느냐는 각자의 몫이지만. 암튼 귀신은 없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생각을 해보면 과거, 지금처럼 과학이 한껏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며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할 것만 같은 거만함을 피우지 않았을 당시에는, 자연발화와 같은 현상에 대해 종교와 악마를 제외하고는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리라 짐작되기는 한다. 아니, 멀쩡하던 사람이 옆에서 불을 붙인 것도 아닌데, 스스로 불씨가 되어 타오르는 현상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귀신이 붙었거나, 악마의 저주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지 않았을까.

 

아무튼 이 작품 덕분에 예전 어렸을 때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했으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을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시절이 떠올라 잠시 행복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아, 그리고 우리의 히어로 펜더개스트 양반. 그리고 뉴욕의 우직한(솔직히 말하면 살짝 머리 회전이 느린) 경찰 다코스타의 콤비 플레이는 다름 괜찮았다. 워낙 댄디한 펜더개스트라 다코스타와 같이 살짝 거친 친구가 파트너로는 제격이다.

 

4월부터 5월 내내 나름의 고민이 참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너무 고민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전혀 상관이 없는 일에 몰두하기도 하는 법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세상을 바라보며 불의에 분노하고 동지들과 연대하며 강력하지만 동시에 부패한 권력에 저항하는 것은 언제나 지극히 당연한 책임지자, 권리이다.

 

하지만 스스로 내부에서 먼저 무너지고 중심을 잃어버린다면 그 싸움의 결말은 너무도 빤하다. 나는 그런 슬럼프에 빠져 있었던 것이고, 그리고 절망하고 있었다. 절대 깨뜨릴 수 없는 악에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이들의 용기와 열정은, 때문에 언제나 필요하다.

 

이 책을 읽을 당시 엄청난 충동구매 행위를 했다. 이것저것, 정말 조금이라도 맘에 드는 책이면 무조건 줄줄이 구매했다. 대책이 없어지면 개념도 감각도 함께 없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그 때 구매했던 책 중에 꽤 쓸 만한, 읽을 만한 책들이 많다. 그리고 지금도 열심히 고맙게 읽고 있다.

 

어떤 책이든 읽었다면 반드시 기록을 남긴다는 규칙. 장단점이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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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놀이 펜더개스트 시리즈 2
더글러스 프레스턴.링컨 차일드 지음, 신윤경 옮김 / 문학수첩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살인자의 진열장》으로 만나게 된 펜더개스트 시리즈 제2편. 역시나 나의 백수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어준 작품. 음, 자랑이냐.

 

스릴러 장르의 소설이 주는 미덕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가독성이다. 킬링 타임용이라고 다소 낮춰 부르기도 하지만, 스릴러 소설을 집어 들었는데, 시간이 더! 안 간다면, 그것도 낭패 아닌가.

 

사실 백수 시절, 시간이 그렇게 널널한 것도 아니었다. 갓 태어난 귀여운 딸아이를 보러 조리원에도 매일 출근해야 했고, 특히나 생계를 꾸려가야 한다는 중압감으로(뭐, 그렇다고 내가 밖에 나가 떼돈을 벌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나름 분단된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일원으로 제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거창한 사명감도 남아 있어, 이와 관련된 단체의 발족에 참여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려 까불기도 하던 시기였다.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죄송함은 지금도 남아있다.

 

무려 6개월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는 이 작품에 대한 기억은 우선, 황량함이다. 캔자스 어느 시골 마을의 끝없이 펼쳐져 있는 옥수수밭.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발견된 끔찍한 형상의 시체. 도저히 사람의 짓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시체 곁에는, 반대로 짐승이라면 할 수 없는 행위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시체를 특정한 모습으로 꾸며 놓은 것이다. 음, 그럼 사람이 했다는 것인데 말야.

 

어디서 또 이 사건의 냄새를 맡은 우리의 주인공 펜더개스트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농가에서 민박(!)을 하며, 동네의 유명한 날라리 여학생을 개인 기사로 임시 채용한 후(!), 무려 혼자 외로이(!) 수사에 나선다. 흠, 분위기 좋아. “난 파트너따위 필요 없어!”라고 외치는 어느 B급 영화의 강력계 형사가 떠오르지 않나?

 

아무튼 펜더개스트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홀로 수사를 진행해 나가고 끔찍한 살인 사건은 이어진다. 그리고 이곳에서 벌어졌던 인디언들의 학살과 복수에 대한 전설까지 회자되며 점차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짜잔.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사람인가? 초자연적 존재인가? 아님 외계인? 아, 요건 아니고.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스릴러 소설이라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며, 쏠쏠한 재미를 선사한 책이다. 아내로부터 “자꾸 그런 소설만 읽으면 사람이 이상해져. 작작 좀 보셔”라는 핀잔을 들었지만, 뭐 재미있으면 장땡이지! 그리고 이것 읽었다고 연쇄살인마가 되었으면, 지금까지 CSI 세 동네 편을 꼬박꼬박 챙겨본 건 어찌 해? 이미 증거 하나 안 남기고 사람들 다 죽이는 완전범죄자가 되어야 맞지!

 

물론 앞에선 말 못했다. 말했음 또 죽었을 걸?

 

암튼, 그때 《살인자의 진열장》서평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후 줄기차게 이 분야의 책들을 섭렵했다. 이유는 그 때 말한 것 같고. 그냥 복잡한 생각이 하기 싫었던 시기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뭐, 다들 그럴 때가 있잖아요?

 

소설의 중후반을 지나면, 점차 펜더개스트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어떤 능력을 갖춘 인물인지 드러나기 시작한다. 전작에 이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역시 육체보다는 정신력이 뛰어난 인물로 묘사된다. 뭐, 요즘 스타일이다. 요새는 너무 몸만 강조해도, 무식해 보인다는 소리를 듣지 않나. 아, 그리워라, 무대포 정신으로 사건을 해결하던 하드보일드의 전설들이여!

 

암튼 결말에 가면 살짝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없지만, 결국 그렇게 되리라는 나름의 예상이 맞았던 나는 살짝 세계적 스릴러 콤비 작가의 지성과 내가 동급이라는 즐거운 착각도 할 수 있었던! 즐거운 독서였다.

 

그리고 당연히, 다음 편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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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트 블랑슈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
제프리 디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뿔(웅진)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몇 안 되는 내 바람직한 버릇, 습관 중 하나는, 비록 일기는 매일 쓰지 못하더라도, 다이어리에 그날 했던 중요한 일들을 매일 기록해온 것이다. 꽤 오래 전부터 해오던 습관이라, 지금까지 모아둔 다이어리도 제법 된다.

 

이제 어느 덧 2013년 다이어리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내 개인적으로는 딸아이를 얻은 최고의 해이기도 했지만, 뭐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또 대한민국이나 한반도에 살고 있는 이웃들의 입장에서는 뭐라 평가해야 할지 애매한 해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면, 우울하지 뭐!

 

지난 다이어리를 돌아보니 올 3월부터 정확히 6월 말까지 백수 생활을 했다. 2월 말에 일하던 잡지사의 마지막 원고 마감을 끝으로, 3월부터 본격적으로 백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참 타이밍도 죽이지. 당시 아내는 만삭이었고, 결과적으론 그 달 말에 딸아이가 태어났다. 즉 우리 딸은 태어나자마자 백수 아빠의 대책 없는 방긋 웃음을 봐야만 했다는 것. 나중에 이 녀석이 어느 정도 자라면 얘기해 줄 생각이다. 아빠가 백수였던 덕분에 조리원에 있던 엄마와 너를 보러 매일 매일 자주 갈 수 있었다고. 그런데 좋아는 하려나?

 

하지만 역시 살기는 해야 했기에, 백수 생활을 즐기면서도 알바를 이것저것 뛰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전부 다 글을 써서 벌어먹는 알바였다. 뭐, 나쁘진 않았다. 천성이 워낙 게을러 원고 마감을 제때 못해 편집자나 ‘갑’의 심기를 자주 불편하게 했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래도 결국 원고는 다 썼으니 뭐.

 

지난 서평에서도 조금 밝혔지만, 올 상반기는 참 애매한 시기였다. 핏덩이는 응애 울면서 나에게 무한한 기쁨과 두려움을 동시에 주었고, 당장 백수라는 사실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오히려 이런 시간을 재충전의 시간으로 삼으라는 아내의 고마운 말도 솔직히 와 닿지는 않았다. 아내에겐 너무나 미안하고, 또 고마웠지만, “내가 핸드폰이냐, 노트북이냐, 뭔 놈의 재충전. 어댑터도 이젠 없다!”고 속으로만! 생각하곤 했다. 티내면 죽었을 걸.

 

그런데 다이어리를 보니, 웬걸. 이 녀석 아주 느긋했다. 나름 감을 잃지 않으려 이것저것 책도 읽었고, 또한 지금까지 한 번도 관심에 두지 않았던, 무려 〈007 시리즈〉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뭐냐, 당최 나는.

 

아마도 최근작인 〈스카이폴〉을 우연히 본 것이 계기가 된 것 같다. 내겐 숀 코너리 옹과 로저 무어 옹으로 각인된 007시리즈는 그 후 비운의 배우 티모시 달튼과 ‘뺀질이’ 이미지를 줬던 피어스 브로스넌에 이어 다니엘 크레이그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백수의 간판을 달고 있을 때, 팔자도 아름답게 영화나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살펴보니 3월에만 〈007 닥터 노〉로 시작해 〈007 Live and Let Die〉까지, 무려 8편의 007시리즈를 봤다. 숀 코너리 옹에서 단 한 편으로 사라진 조지 라젠비에 이어 로저 무어 옹까지 이어진 것이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지.

 

이제 다시 매일 출근을 해야 하는, 피곤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지금, 다이어리를 보니, 가장 최근에 본 시리즈가 〈007 어나더데이〉다. 내가 피어스를 역대 007중 제일 낮게 매기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준 작품. 뭐, 솔직히 그 잘못이겠나, 감독의 무개념이 문제였지. 지금도 피어스와 할리 베리가 입었던 북한 군복의 명찰이 떠오르면 어이가 없다. 뭐? ‘창천 1동대?’ 북한에 침투하는 스파이가 민방위나 향토예비군이었다는 말이더냐?

 

암튼 미스터리, 스릴러 범죄소설과 함께 내 혼란스러웠던 백수 생활을 수놓은 것이 바로 007이었다. 이언 플레밍이 첫 작품인 《카지노 로열》을 쓴 것이 1952년이니, 이미 제임스 본드는 진즉에 자연사를 하고도 남았어야 하지만, 내 생각엔 미국이나 영국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리고 그들이 억지로라도 창조해낼 적들이 있는 이상, 이 시리즈는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한일월드컵으로 한반도가 뜨겁던 2002년에 이미 북한을 ‘악의 축’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나중에 또 어떻게 써먹을지도 관심이다. 뭐, 최근에는 아예 북한군이 미국 본토를 공격하고 백악관까지 쳐들어 가더라만. 헐, 북한의 전력을 세계 최고로 만들어 주는 것은 우리 정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리 미국이, 영국이 짱구를 굴려도 ‘적’이란 게 없으면 그땐 어찌 하냐고? 뭐 007이 우주로 나가 외계인들과 싸우겠지.

 

예전엔 전형적인 서구의 사고방식과 마초적 감성이 뚝뚝 떨어지는 007시리즈를 좋아할 수 없었다. 냉전적 적대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도 불편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그 빌어먹을 냉전 때문에, 이데올로기라는 무형의 무엇으로 인해 유형의 분단이라는 형벌을 받고 있는 한반도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007과 같은 양키 스파이 따위를 좋아할 수 있다더냐! 했더랬다.

 

그런데 이제 나도 썩었나 보다. 그냥 ‘영화는 영화’라고 위로하고 스스로를 속이고 산다. 그리고 내가 비판적으로 보고, 그냥 즐기면 되지 뭐. 이러고 산다. 솔직히 이 정도는 이제 스스로에게 풀어줘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난 헐리우드 영화가 가지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거만함과 허황된 신념도 대충 알고, 미드(미국 드라마)가 전해주는 이데올로기적 세뇌도 알지만, 그럼에도 둘 다 즐긴다. 어쩌라고? 내가 내 스스로를 온전히 가눌 수 있다면, 뭐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헐, 별 싱거운 소리 다 한다.

 

박근혜정부의 출범과 함께! 백수가 된 나는 정의와 상식이 10년 연속 2연타로 무너진 국가 속에서, 예쁘다 못해 눈물겨운 딸아이를 안고, 행복해 하는 우스운 장면을 스스로 연출했다. 그리곤 여전히 죽어가는 사람들, 여전히 자신의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이 땅에 태어난 누구라도 누려야 하는 권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들의 눈물을 바라만 봐야 했다.

 

책에서 영국 정부는 대규모 살상을 막기 위해 007에게 카르트 블랑슈, 즉 ‘백지 위임장’을 준다. 한마디로 하고 싶은 것 다 하라는 특권이다. 원체 스릴러 분야의 거장이신 제프리 디버는 21형 본드를 탄생시키며, 그에게 첨단 장비와 스마트 앱으로 무장시킨다. 그리고 2007년형 월터 PPS와 최신형 본드카(2010년형 벤틀리 콘티넨탈 GT)까지 선사하신다.

 

하지만 이 땅의 민중들에게 고통을 또 다시 5년간 참으라 하고, 불평등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라 하고, 불법과 불의를 모른 척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 ‘백지 위임장’은 존재할 수 없다. 대통령이 아니라 그 누구도 그런 위임장은 만들 수 없다.

 

영화는 결국 영화이듯, 소설도 단지 소설이다. 그런데 이 나라는, 그리고 이 세상은 소설 같은 일들이, 영화 같은 일들이 현실에서 그대로 벌어진다. 미국은 적도 아닌 우방들을 꼼꼼하게 도청해왔고, 우리나라의 안보와 국방을 책임져야 할 기관들은 대선에 개입해 수준 떨어지는 욕설과 비속어들을 남발했다. 그게 정말 공작인지, 공무인지는 잘 모르겠다. 참, 격 떨어진다.

 

영원히 죽지 않는 007은 영화다. 그리고 소설에서나 가능하다. 제프리 디버의 21세기형 007도 물론 매력적이다. 하지만 역시 난 그의 《링컨 라임 시리즈》가 더 좋다.

 

하지만 당연히 현실은 영화가 되어선 안 된다. 제발, 더 이상 한반도에서 영화 같은, 소설 같은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정상적으로 살기에도 우리나라는 너무 살기 힘들다. 그러니 제발 엽기적인 행각들은 멈추자. 특히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 받아먹으며 살면서, 오히려 국민들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정신 나간 인간들아. 007은 젠틀하기라도 하지. 찌질도 이런 찌질한 인간들이 없어요. 아무리 속물의 시대라지만, 스스로 창피한 것도 모를까.

 

옛 건달보다도 격이 떨어진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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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진열장 1 펜더개스트 시리즈 1
더글러스 프레스턴.링컨 차일드 지음, 최필원 옮김 / 문학수첩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매번 생각하지만, 서평은 책을 읽고 난 다음에 가급적 빨리 쓰는 것이 좋다. 나란 녀석이 원래 그다지 좋지 않은 머리를 가지고 있고, 거기에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난적까지 만나면, 그야말로 기억이란 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비극을 막고자 책에 밑줄을 북북 쳐대기도 한다. 최대한 기억력을 유지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이 역시 시간이란 적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다. 결국 시간이 승리하고야 한다. 고로 성실함이 유일한 해답이다.

 

지난 4월 아주 우연히 ‘펜더개스트’ 시리즈를 접하게 되었다. 무심코 웹 서핑을 하던 중 미스터리 스릴러 도서의 서평을 주로 올리는 블로거의 글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곤 그의 서평을 통해 이 책을, 그리고 펜더개스트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블로그는 많은 미스터리 스릴러 작품을 소개하고 있었고, 글의 수준 역시 높았다. 이 분야에 조예가 깊은 ‘마니아’임이 분명했다.

 

올 4월은 내게 어떤 시간이었나. 글쎄… 축복과도 같은 새 생명을 얻었지만, 동시에 적지 않은 나이에 백수의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 애매모호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산후조리원에 있는 딸과 아내를 두고 여기저기 알바를 위해 뛰어다니던, 대책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의 독서 편력 역시 그 방향을 제멋대로 바꾸기 시작했다. 백수였지만, 몇 가지 알바로 나름 ‘바쁜 백수’였던 나는, 심각하게, 적어도 무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싶지 않다는 철없는 욕구에 항복하고 말았다. 당시의 내 심리는 무언가 ‘다 귀찮다’는 자포자기와 아이의 아빠라는 새로운 ‘행복감’,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책임감’으로 버무려져 있었다.

 

그리고 당분간 내가 붙잡고 있었던 다양한 고민들과 화두를 던져버리고 싶었다. 이를테면 공동체, 정치 개혁, 남북화해, 통일, 지방자치 등이었다. 특히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미안하지만 ‘꼴도 보기’ 싫었다.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다시 꼬여버린 남북관계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게다가 보수 언론과 정치권의 썩어빠진 모습과 여기에 무력하게 대응하는 야권이라니. 다 보기 싫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과 어디 바닥끝까지 떨어져보고 그때에도 저 따위 헛소리들을 지껄이는지 보자는 ‘악의’도 있었던 듯싶다. 다 부질없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 없이 스토리 전개에 따라 내 의식을 함께 옮길 수 있는, 그냥 편안히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책을 찾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 오해는 마시라. 미스터리 스릴러, 범죄 수사물이 사회과학, 인문 그리고 이른 바 순수문학이라 남들이 부르는 작품보다 뒤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세상엔 《소년탐정 김전일》이나《명탐정 코난》과 같은 수준 높은 작품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이보다 못한 쓰레기 같은 책들이 또한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비교적 자주 읽지 못했을 뿐이지, 스릴러 미스터리 물은 원래 내가 즐기는 장르이기도 했다. 셜록 홈즈와 아르센 뤼팽, 엘큘 포와로와 미스 마플로 사춘기를 수놓았던 내가 아니었나. 때문에 새로운 캐릭터 펜더개스트와의 만남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살인자의 진열장》은 펜더개스트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그리고 나와 펜더개스트의 첫 만남이기도 했다. 콤비 작가 프레스턴&차일드는 이미 ‘펜더개스트 시리즈’로 나름의 명성을 얻고 있던 작가였다. 이들은 각각 전직 미국 자연사 박물관과 소설 전문 편집자로 일한 바 있다는데, 작품에는 그들의 삶의 경험들이 적절히 녹아들어 있다. 이 작품은 FBI 특별요원 펜더개스트가 뉴욕 시를 배경으로 10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끊임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마를 쫓는 과정을 담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1권은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2권은 반나절 만에 다 읽어 내려갔다. 역시 백수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조금은 너무 작위적이고, TV나 영화화를 염두하고 썼다는 느낌이 강해 살짝 거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 분야의 작품들은 그러한 2차 흥행을 노리는 경우가 많기에 이해하기로 했다. 게다가 미국 작가들 아닌가!

 

FBI 특별수사관 펜더개스트는 이른 바 ‘엄친아’ 캐릭터다. 재력 빵빵하고, 못하는 것도 없다. 그리고 신비스러운 풍모와 해박한 지식까지. 셜록 홈즈와 뤼팽의 매력을 모두 갖추었다고나 할까. 거기에 약간 어두운 이미지까지 더해, 더 큰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

 

나름대로 치밀한 구성으로 독자들을 몰아가는 작품은 결말에 이르러 조금은 맥이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세게 나갔기에,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물론 미스터리 스릴러 혹은 추리물에서 독자가 결말을 대충이라도 예상할 수 있게 만든다면 그것은 실패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실패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펜더개스트’라는 캐릭터만으로 충분히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시공을 초월해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어느 순간 살인의 행렬을 멈추게 된 이유. 그 이유에 주목했다. 그리곤 씁쓸했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기에 자세히 밝히긴 힘들지만, 인류가 가지고 있는 그 잔인함, 무모함, 어리석음이 결국 살인마의 연쇄살인을 막게 된 이유가 되었다.

 

인류는 끊임없이 진보해왔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임을 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언제 다시 튀어나올지 모르는 광기 역시 함께 가지고 있음을. 바로 그것이 인간이란 존재임을 다시 느낀다. 최근 시리아의 비극이나 멈추지 않는 무차별 테러, 전쟁 등 인류는 여전히 광기와 싸우고 있다.

 

흥미진진한 스릴러나 미스터리 물에는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는 살인마들이 등장한다. 도무지 제정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르지만, 대부분 그들은 평범한 이들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다.

 

《살인자의 진열장》을 시작으로, 4월, 나의 스릴러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 나보다 먼저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서가들의 지적처럼, 1, 2권으로 굳이 나눌 필요는 없었던 듯하다. 속보인다. 출판사. 물론 그 이후 작품들의 단권 발행으로 그나마 덜 욕먹게 되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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