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트 블랑슈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
제프리 디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뿔(웅진)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몇 안 되는 내 바람직한 버릇, 습관 중 하나는, 비록 일기는 매일 쓰지 못하더라도, 다이어리에 그날 했던 중요한 일들을 매일 기록해온 것이다. 꽤 오래 전부터 해오던 습관이라, 지금까지 모아둔 다이어리도 제법 된다.

 

이제 어느 덧 2013년 다이어리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내 개인적으로는 딸아이를 얻은 최고의 해이기도 했지만, 뭐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또 대한민국이나 한반도에 살고 있는 이웃들의 입장에서는 뭐라 평가해야 할지 애매한 해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면, 우울하지 뭐!

 

지난 다이어리를 돌아보니 올 3월부터 정확히 6월 말까지 백수 생활을 했다. 2월 말에 일하던 잡지사의 마지막 원고 마감을 끝으로, 3월부터 본격적으로 백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참 타이밍도 죽이지. 당시 아내는 만삭이었고, 결과적으론 그 달 말에 딸아이가 태어났다. 즉 우리 딸은 태어나자마자 백수 아빠의 대책 없는 방긋 웃음을 봐야만 했다는 것. 나중에 이 녀석이 어느 정도 자라면 얘기해 줄 생각이다. 아빠가 백수였던 덕분에 조리원에 있던 엄마와 너를 보러 매일 매일 자주 갈 수 있었다고. 그런데 좋아는 하려나?

 

하지만 역시 살기는 해야 했기에, 백수 생활을 즐기면서도 알바를 이것저것 뛰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전부 다 글을 써서 벌어먹는 알바였다. 뭐, 나쁘진 않았다. 천성이 워낙 게을러 원고 마감을 제때 못해 편집자나 ‘갑’의 심기를 자주 불편하게 했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래도 결국 원고는 다 썼으니 뭐.

 

지난 서평에서도 조금 밝혔지만, 올 상반기는 참 애매한 시기였다. 핏덩이는 응애 울면서 나에게 무한한 기쁨과 두려움을 동시에 주었고, 당장 백수라는 사실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오히려 이런 시간을 재충전의 시간으로 삼으라는 아내의 고마운 말도 솔직히 와 닿지는 않았다. 아내에겐 너무나 미안하고, 또 고마웠지만, “내가 핸드폰이냐, 노트북이냐, 뭔 놈의 재충전. 어댑터도 이젠 없다!”고 속으로만! 생각하곤 했다. 티내면 죽었을 걸.

 

그런데 다이어리를 보니, 웬걸. 이 녀석 아주 느긋했다. 나름 감을 잃지 않으려 이것저것 책도 읽었고, 또한 지금까지 한 번도 관심에 두지 않았던, 무려 〈007 시리즈〉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뭐냐, 당최 나는.

 

아마도 최근작인 〈스카이폴〉을 우연히 본 것이 계기가 된 것 같다. 내겐 숀 코너리 옹과 로저 무어 옹으로 각인된 007시리즈는 그 후 비운의 배우 티모시 달튼과 ‘뺀질이’ 이미지를 줬던 피어스 브로스넌에 이어 다니엘 크레이그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백수의 간판을 달고 있을 때, 팔자도 아름답게 영화나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살펴보니 3월에만 〈007 닥터 노〉로 시작해 〈007 Live and Let Die〉까지, 무려 8편의 007시리즈를 봤다. 숀 코너리 옹에서 단 한 편으로 사라진 조지 라젠비에 이어 로저 무어 옹까지 이어진 것이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지.

 

이제 다시 매일 출근을 해야 하는, 피곤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지금, 다이어리를 보니, 가장 최근에 본 시리즈가 〈007 어나더데이〉다. 내가 피어스를 역대 007중 제일 낮게 매기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준 작품. 뭐, 솔직히 그 잘못이겠나, 감독의 무개념이 문제였지. 지금도 피어스와 할리 베리가 입었던 북한 군복의 명찰이 떠오르면 어이가 없다. 뭐? ‘창천 1동대?’ 북한에 침투하는 스파이가 민방위나 향토예비군이었다는 말이더냐?

 

암튼 미스터리, 스릴러 범죄소설과 함께 내 혼란스러웠던 백수 생활을 수놓은 것이 바로 007이었다. 이언 플레밍이 첫 작품인 《카지노 로열》을 쓴 것이 1952년이니, 이미 제임스 본드는 진즉에 자연사를 하고도 남았어야 하지만, 내 생각엔 미국이나 영국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리고 그들이 억지로라도 창조해낼 적들이 있는 이상, 이 시리즈는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한일월드컵으로 한반도가 뜨겁던 2002년에 이미 북한을 ‘악의 축’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나중에 또 어떻게 써먹을지도 관심이다. 뭐, 최근에는 아예 북한군이 미국 본토를 공격하고 백악관까지 쳐들어 가더라만. 헐, 북한의 전력을 세계 최고로 만들어 주는 것은 우리 정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리 미국이, 영국이 짱구를 굴려도 ‘적’이란 게 없으면 그땐 어찌 하냐고? 뭐 007이 우주로 나가 외계인들과 싸우겠지.

 

예전엔 전형적인 서구의 사고방식과 마초적 감성이 뚝뚝 떨어지는 007시리즈를 좋아할 수 없었다. 냉전적 적대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도 불편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그 빌어먹을 냉전 때문에, 이데올로기라는 무형의 무엇으로 인해 유형의 분단이라는 형벌을 받고 있는 한반도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007과 같은 양키 스파이 따위를 좋아할 수 있다더냐! 했더랬다.

 

그런데 이제 나도 썩었나 보다. 그냥 ‘영화는 영화’라고 위로하고 스스로를 속이고 산다. 그리고 내가 비판적으로 보고, 그냥 즐기면 되지 뭐. 이러고 산다. 솔직히 이 정도는 이제 스스로에게 풀어줘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난 헐리우드 영화가 가지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거만함과 허황된 신념도 대충 알고, 미드(미국 드라마)가 전해주는 이데올로기적 세뇌도 알지만, 그럼에도 둘 다 즐긴다. 어쩌라고? 내가 내 스스로를 온전히 가눌 수 있다면, 뭐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헐, 별 싱거운 소리 다 한다.

 

박근혜정부의 출범과 함께! 백수가 된 나는 정의와 상식이 10년 연속 2연타로 무너진 국가 속에서, 예쁘다 못해 눈물겨운 딸아이를 안고, 행복해 하는 우스운 장면을 스스로 연출했다. 그리곤 여전히 죽어가는 사람들, 여전히 자신의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이 땅에 태어난 누구라도 누려야 하는 권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들의 눈물을 바라만 봐야 했다.

 

책에서 영국 정부는 대규모 살상을 막기 위해 007에게 카르트 블랑슈, 즉 ‘백지 위임장’을 준다. 한마디로 하고 싶은 것 다 하라는 특권이다. 원체 스릴러 분야의 거장이신 제프리 디버는 21형 본드를 탄생시키며, 그에게 첨단 장비와 스마트 앱으로 무장시킨다. 그리고 2007년형 월터 PPS와 최신형 본드카(2010년형 벤틀리 콘티넨탈 GT)까지 선사하신다.

 

하지만 이 땅의 민중들에게 고통을 또 다시 5년간 참으라 하고, 불평등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라 하고, 불법과 불의를 모른 척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 ‘백지 위임장’은 존재할 수 없다. 대통령이 아니라 그 누구도 그런 위임장은 만들 수 없다.

 

영화는 결국 영화이듯, 소설도 단지 소설이다. 그런데 이 나라는, 그리고 이 세상은 소설 같은 일들이, 영화 같은 일들이 현실에서 그대로 벌어진다. 미국은 적도 아닌 우방들을 꼼꼼하게 도청해왔고, 우리나라의 안보와 국방을 책임져야 할 기관들은 대선에 개입해 수준 떨어지는 욕설과 비속어들을 남발했다. 그게 정말 공작인지, 공무인지는 잘 모르겠다. 참, 격 떨어진다.

 

영원히 죽지 않는 007은 영화다. 그리고 소설에서나 가능하다. 제프리 디버의 21세기형 007도 물론 매력적이다. 하지만 역시 난 그의 《링컨 라임 시리즈》가 더 좋다.

 

하지만 당연히 현실은 영화가 되어선 안 된다. 제발, 더 이상 한반도에서 영화 같은, 소설 같은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정상적으로 살기에도 우리나라는 너무 살기 힘들다. 그러니 제발 엽기적인 행각들은 멈추자. 특히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 받아먹으며 살면서, 오히려 국민들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정신 나간 인간들아. 007은 젠틀하기라도 하지. 찌질도 이런 찌질한 인간들이 없어요. 아무리 속물의 시대라지만, 스스로 창피한 것도 모를까.

 

옛 건달보다도 격이 떨어진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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