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집 예찬
김병종 지음, 김남식 사진 / 열림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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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나무 집 예찬>이란 제목을 읽었을 때 한옥에 대한 작가의 조사와 연구가 중심에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한옥 ‘함양당’ 이야기다. 이 함양당은 <자스민, 어디로 가니>를 읽으면서 호기심이 생겼던 곳이다. 그가 주말이면 찾아가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머물다가 간 곳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작가가 어떻게 함양당을 받았고, 그곳에 거주하면서 새롭게 짓고, 생활하고 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김남식 사진작가의 사진과 간결한 김병종 작가의 글이 어우러져 이 시대와 동떨어진 듯한 나무 집의 예찬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예찬은 어릴 때 기억 한 자락을 뒤흔들어 깨우고 한옥에 대한 갈망을 불러왔다.

 

함양당은 인연을 쌓아올린 집이라고 말한다. 처음 그 집을 받았을 때부터 다시 짓게 되었을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인연이 놓여 있다. 우연히 내뱉은 말 한 마디가 인연이 되어 결국 한옥 짓기까지 이어진다. 아주 특별한 인연이다. 그 곳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없었다면 이 인연은 짧게 끝났을 것이다. 현대 집들의 편리한 구조와 모습을 생각하면 불편하기만 한 곳이다. 최근 개량 한옥이 등장하여 이 불편함을 최소화했다고 하지만 그가 이곳을 받았을 때는 그냥 쉽게 개량, 개조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주 싼 가격에 물려받았고 그에게 집을 넘겨준 검정옥 선생에 대한 배려와 다른 땅 주인 때문이다. 이 문제는 땅 주인이 땅을 사라고 말하고, 힘겹게 그 값을 치룬 후 해결되었다.

 

매일 살지 않고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나무 집은 불편한 곳이다. 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사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것을 하나씩 풀어낸다. 빠름과 편리함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이 느림과 불편함은 오히려 삶을 더 풍족하게 만들고 시간을 늘리는 효과를 보인다. 복잡한 현실 속에서 이 단순한 공간은 자신에게 더 몰입할 수 있게 만든다. 자투리 시간을 내어 겨우 한 권을 읽을 수 있는 책들을 단숨에 몇 권을 집중해서 읽을 수 있다. 텔레비전, 인터넷도 없는 그곳에 있는 유일한 전자기기는 전축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더 집중해서 실컷 감상할 수 있다. 부럽기만 한 삶의 여유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앞에서 말한 나무 집 인연을 에세이로 풀어내고, 2부와 3부는 가을과 겨울 사진과 함께 간결한 글로 구성되어 있다. 새롭게 지어진 함양당과 주변의 풍경은 글로 표현할 수 없는 풍경을 사진으로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준다. 먼 풍경은 풍경대로, 밀착 사진은 또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으로 함양당 혹은 협선재를 차분하게 드러낸다. 사진이 먼저인지 글이 먼저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둘이 잘 어우러져 진한 여운을 남긴다. 집 구석구석을 한 장의 사진과 작가의 감상으로 풀어낼 때 그 나무 집은 이미 단순한 나무 집이 아니다. 추억과 여유와 그리움과 정적과 고요함으로 가득한 곳이다.

 

언제부터인가 한옥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아파트 생활이 주는 피로를 급격하게 느낀 순간부터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때 본 한옥들은 대부분 개량 한옥이거나 한옥의 모습만 갖춘 집들이다. 한옥을 개량한 커피숍이나 식당을 가면 그 부산함으로 그 매력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대부분이지만 잠시 여유를 누릴 때면 이곳에서 삶이 불편하다고 해도 한 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뭐 요즘은 황토집에 더 눈길이 가기는 하지만 뚜렷한 의지가 있어서라기보다 텔레비전을 보고 한 후 생긴 순간의 변덕이다.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이 일순위고, 다음이 한옥이나 황토집이다. 작가처럼 멋진 집을 지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다. 돈도 문제고 좋은 목수 구하기는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인연 이야기가 부럽기만 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당장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아주 행복한 꿈을 꾸었다.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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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
마크 해던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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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이란 이상한 제목으로 먼저 나에게 다가왔던 작가의 최근 소설이다. 열다섯 자폐증 소년을 주인공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와 심리 묘사로 나를 사로잡은 적이 있는 작가다. 그런데 이번 소설 제목이 <빨간 집>이다. 제목만 보면 뭔가 섬뜩한 느낌도, 야한 느낌도 든다. 표지를 보면 다르지만. 마크 해던이란 작가 이름을 보면 전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감정이 충돌하면서 소개글을 읽으니 가족이란 단어가 불쑥 떠오른다. 많은 소설에서 중요 소재로 등장하여 다양한 갈래로 갈라졌던 그 가족 말이다. 그리고 수많은 호평들이 이 가족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왔다.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두 가족이 함께 집을 빌려 일주일 동안 함께 산다. 누나인 안젤라 가족과 동생 리처드 가족, 이렇게 8명이 웨일스 국경 근처 헤이온와이 마을 옆 별장으로 떠난다. 안젤라 가족은 남편 도미니크와 큰 아들 알렉스, 딸 데이지, 막내아들 벤지 이렇게 5명. 리처드 가족은 아내 루이자와 의붓딸 멜리사 3명이다. 같은 동네에 살지 않는 이 두 가족은 각각 다른 교통수단으로 별장으로 향한다. 리처드 가족은 메르세데스 벤츠를 몰고 가고, 안젤라 가족은 기차를 타고 움직인다. 이 별장을 빌린 것은 동생 리처드다. 서로 왕래도 많지 않고 가족 내부의 문제도 있는 이들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여행에서 자신들 속에 잠재되어 있던 감정들을 하나씩 밖으로 쏟아낸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가족이란 화목해야하고 서로 감싸주고 도와주는 것이란 이미지에 중독되어 있다. 서로 갈등하고 싸우다가도 끝은 훈훈하게 가족애로 마무리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런 가족의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우리를 알게 모르게 세뇌시켜왔다. 그래서 이런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들을 비난하기 바쁘다. 그들이 가진 문제나 어려움은 제대로 살펴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말이다. 이때 가족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이야기를 만나게 되면 그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굳건하게 믿고 있던 가족 이데올로기가 산산조각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방식의 가족 이야기에서 벗어나 있다.

 

결혼한 지 20년이 다 된 안젤라 부부나 재혼한 리처드 부부 모두 문제를 안고 있다. 각각 다른 환경과 문화 속에 자란 두 사람이 사는데 갈등이 없다면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안젤라는 사산된 아기에 대한 환영에 사로잡혀 있고,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하는 남편 도미니크는 불륜을 저지른다. 반면에 부유한 리처드와 재혼한 루이자의 재혼 전 삶은 굉장히 자기파괴적이었다. 리처드는 의료 사고 문제로 심리적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다. 안젤라와 리처드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병수발 등으로 오해와 갈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어른들의 문제들이 하나의 축으로 흘러간다면 네 명의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문제를 안고 있다. 알렉스는 운동 중독 증상이 있으면서 섹시한 멜리사에게 끌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변한 데이지는 종교로 가족들과 갈등을 빚고 친구 문제도 가지고 있다. 벤지는 자신이 만든 환상 속에서 홀로 재밌게 놀 뿐인 아이다. 멜리사는 제멋대로 살아가면서 다른 아이들을 상처 입히는 것을 즐긴다. 이렇게 적고 보면 그냥 평범하거나 조금 나쁜 학생들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불안하고 불안정하고 걱정 많은 청소년들이다. 이 여행은 바로 이것을 밖으로 표출하여 드러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바로 화려한 해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과 전개다.

 

집을 떠났다고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지 않는다. 이 여행은 그 문제를 인식하는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여행은 서로 잘 몰랐던 가족 사이의 유대감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안젤라 남매 사이에 오해는 이해로 가는 과정 속에 놓여 있고, 딸 데이지와 엄마 사이는 소통 부재가 여전히 존재한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 애정이 사라진지 오래되었지만 서로를 탓할 뿐이다. 이것이 너무 현실적이라 오히려 낯설다. 10대들의 노골적인 성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다. 조금 다른 문화 차이를 느낀다. 그리고 영국 등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SNS의 문제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가족 문제를 밖으로 드러내어 가족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열린 결말은 현실의 충실한 반영이다. 작가의 의지는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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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의 시간
도종환 지음, 공광규 외 엮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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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당신>으로 나에게 그 이름을 알린 시인이다. 처음 이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단순히 사랑시를 쓰는 사람으로 착각했다. 영화로도 나왔던 그 시집은 나로 하여금 시인을 오해하기 딱 좋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 당시는 베스트셀러를 읽지만 배척하던 모순된 감정을 가졌던 시기였던 탓일 것이다, 그 후 전교조 문제 등으로 그를 알게 되고, 시집 <접시꽃 당신>을 제대로 읽으면서 이 오해는 조금 수정되었다. 그러다 얼마 전 RHK에서 나온 시화선집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로 그의 시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다.

 

이번 이 시선집은 그의 시집들에서 몇 편씩을 발췌해서 시집 발간 순으로 실었다. 읽으면서 초기작과 대박시집 사이의 차이를 다시 느끼게 되었고, 시간의 흐름 속에 시인의 변화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시선집이 하나의 범주로 묶여 시풍이나 시어들의 변화를 쉽게 감지할 수 없는 것과 비교되는 편집이다. 그의 일상과 의지와 희망과 사랑 등이 곳곳에 녹아 있는데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아지지 않은 현실에 울분을 토했다. 애절한 사랑의 시를 읽을 때면 나도 저럴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이전에 읽었지만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시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고, 대부분 낯선 시들은 머리와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시는 현실을 담고 있다. 첫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1985년)부터 그렇다. 개인적으로 ‘흑인 혼혈아 여가수에게’의 대상이 누군지 궁금하고, ‘조센 데이신타이(조선정신대)’의 비극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묻혀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접시꽃 당신>(1986년)속 ‘어떤 연인들’의 사랑은 그 어떤 사랑보다 굳세어 보인다. 아내에 대한 사모곡이 지닌 애절함과 그리움을 넘어 지켜보는 따스한 시선은 아직 그의 마음속에 사랑이 살아있음을 알게 한다. 이것은 나중에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로 이어진다. 이때는 이미 그가 재혼한 후이지만.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당한 후 그의 시들은 학교와 학생들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감옥에서 만난 제자와의 단상을 ‘잘가라, 준아’로 풀어냈을 때 이 시대 수많은 학생들의 삶이 겹쳐졌다. “우리가 빼앗긴 세월을 반드시 돌려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정 선생님, 그리고 보고 싶은 여러 선생님께)의 희망은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귀가)로 이어진다. 이것은 다시 “어떤 투쟁이든 값진 것은 과정일 뿐”(쏭바)이라고 말하며 현실 속에서 그 희망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그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60대가 되면서 세상을 보는 시선이 좀더 부드러워졌고, 다양해졌음을 느낀다.

 

시인이기 이전에 그는 교사였다. 이제는 정치인으로 변했지만 그의 시 대부분은 교사였을 때 쓴 시들이다. 어릴 때부터 교사가 꿈이었던 그가 전교조 문제로 해직되었을 때,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그 감정을 시로 풀어내었을 때 한결같이 그의 관심은 학생들이고 교육문제다. 전교조라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닭장차에 실려갔고, 어느 날은 한 가족의 가장이자 자신을 감옥에 보낸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이때의 감정들을 시로 정제해서 풀어낼 때 그의 고뇌와 아픔과 갈등 등이 나의 가슴 한 곳으로 콕하고 와 박힌다. 그리고 ‘부드러운 직선’에서 사람들이 부드러워지라고 할 때 그것을 받치는 기둥이 직선임을 말한다. 그의 삶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시다. 상대적으로 어렵게 쓴 시들이 아니라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사놓고 묵혀둔 다른 시집들에도 손을 한 번 내밀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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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아시아 문학선 10
쿠쉬완트 싱 지음, 황보석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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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소설이다. 두 명의 주요인물이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지만 이들이 중요 주인공은 아니다. 이 소설의 실제 주인공은 600년 긴 역사의 무대였던 델리다. 인도의 단순한 한 도시 정도로만 생각했던 그곳이 이 소설에서는 장대한 이야기의 배경이자 수많은 인물들의 삶이 교차하는 곳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이야기는 화자인 나와 그의 정부이자 창녀이자 어지자지인 바그마티가 들려주고, 과거의 이야기는 델리를 무대로 활약하고 생활했던 다양한 인물들이 화자로 등장하여 600년 역사 속 델리의 변천사를 알려준다. 실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도 바로 이 델리의 변천사다.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가지를 알면 더 좋을 것 같다. 하나는 시크교이고, 다른 하나는 인도인이다. 시크교는 작가의 종교이자 이 소설 속에서 역사의 변화를 일으키는 인물들의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고, 인도인은 삶의 모습이 우리와 너무 다른 탓이다. 힌두교, 시크교, 이슬람교 등이 서로 엮인 채 살아가는 인도에서 이들의 관계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전까지 시크교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딱 하나였다. 성이 모두 싱이라는 것이다. 검색으로 몇 가지 더 알게 되었다. 인도 역사에서 이들의 존재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더 공부가 필요한 부분이다.

 

델리라는 이름보다 뉴델리로 더 각인된 인도. 그중 델리의 과거를 되짚어 장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눈은 다양한 계급의 인물들을 통해 풀려나온다. 정복자에서 시작하여 불가촉천민까지 다양하다. 이들의 기록은 한 시대에 뒤섞이지 않고 각각 다른 시대를 자신들의 시각에서 바라본다. 보는 위치가 다르면서 생기는 시각 차이는 한 도시와 역사 속 인물에 대한 평가를 달리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힌두스탄 황제의 칸이 도움을 요청했다는 이유로 이란의 술탄이 왔을 때 보여준 행동은 이것의 정점이다. 확실한 무력의 우위를 이용한 학살과 파괴와 약탈은 그 원인보다 그 현상으로 더 많이 알려진다. 역사가 우리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현재는 바그마티란 제목으로 거의 구성되어 있는데 분량이 제각각이다. 처음 나와 바그마티의 관계를 알려주고 보여줄 때를 제외하면 이들의 비중은 점점 더 줄어든다. 이것은 이 둘의 성적 관계와 나의 활동이 줄어든다는 의미다. 신문에 글을 쓰고, 여행 가이드 역할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서양여자들과의 섹스를 즐겼던 그의 삶이 노쇠화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가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을 때 바그마티가 질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때 이 둘의 묘한 관계가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이 둘의 비중이 점점 줄어들어 아쉬웠다.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델리의 현재가 인도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록 이 소설 속에 델리의 장대한 역사를 녹여내었다고 하여도.

 

최근에 인도 여행에 대한 환상이 많이 깨졌다. 신비와 환상으로 뒤덮여 있던 그곳이 다른 곳을 여행하면서 만난 인도인들과 뉴스를 통해 들은 몇몇 사건들로 인해 그 적나라한 모습을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도 파편적인 정보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 그 정보가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려주고, 시간이 흘렀음에도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몇몇 사람들의 외설적이고 파괴적인 모습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긴 델리의 역사 속을 들여다보면 변하지 않고 있는 것도 있다. 만약 이것이 작가의 의도적인 설정이자 연출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인도와 관련된 소설을 읽을 때면 늘 혼란스럽다. 너무나도 일상적인 모습이 보이다가도 종교 갈등이나 암살 등으로 폭력 사태가 일어난다. 나디르 샤의 암살 시도 때문에 벌어진 대학살이나 최근 인디라 간디의 암살은 이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세포이 전쟁 당시 각각 다른 입장에 처한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그 현장을 풀어낼 때 역사는 결코 몇 줄의 설명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 델리 속 각각의 등장인물은 델리의 속살과 이면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이 책 출간 후 20년 이상이 지났는데 과연 얼마나 변했을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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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 영혼이 향기로웠던 날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안내하는 마법
필립 클로델 지음, 심하은 옮김 / 샘터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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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 클로델은 아직 나에게는 어려운 작가다. 지금껏 읽은 소설들도 나의 이성이나 가슴에 완전히 와 닿지 않았다. 두 번째 소설을 읽을 때 살짝 그 문을 열어주었지만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낯선 지명과 잘 모르는 단어와 수많은 주석은 함축적이고 간결한 문장과 어우러져 그 속으로 들어가기 더 힘들게 만들었다. 커피숍에 앉아 묵묵히 글을 읽기 한참만에 그 문이 살짝 열렸다. 단순히 피상적으로 느꼈던 것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추억으로 기억으로 향기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머무르는 향기처럼 곧 사라졌다.

 

목차를 보면서 한글 제목만 열심히 읽다가 놓친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에세이들이 모두 알파벳 순서대로 쓴 것이란 사실이다. 아카시아와 여행까지. 낯선 외국어와 조급한 성격이 이것을 놓쳤다. 역자 후기에 알려주지 않았다면 놓쳤을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면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라고?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 또 작가는 자신이 자란 곳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고 한다. 흐르는 시간 속에 변한 곳이 많겠지만 오히려 그 변화가 더 많은 추억과 기억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그 흔적과 기록이 바로 이 에세이일 것이다.

 

이 예순세 편의 에세이는 모두 향기와 추억을 다룬다. 시간은 어린 시절부터 비교적 최근까지. 같은 동네를 무대로 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도 살고 있기 때문인지 기억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겹치는 경우가 많다. 단편적으로 나오는 그들의 소식은 어느 순간 반갑게 다가왔다. 길지 않은 글인데 조금은 신기하다. 최근의 기억보다 오래전 기억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어른이 되면서 세상의 때가 탄 탓일까? 아니면 흥미와 신비로움을 잃어버린 탓일까? 하지만 그 기억을 하나씩 풀어내가는 것은 현재의 그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 방점 하나가 그 감정을, 향기를 살포시 품어낸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이 다섯 가지 감각은 떨어져 있는 듯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글 속에서도 그렇다. 할머니의 스테이크 맛은 후각으로 먼저 다가온다. 여자의 성기를 만지는 촉감은 다시 후각으로 넘어간다. 낡은 오토바이는 소리와 냄새로 이어진다. 아픈 자신의 몸에 어머니가 발라주던 연고의 촉감과 냄새는 나도 모르게 아련한 기억 속 향수를 불러온다. 다른 환경과 시대를 살았지만 몇 가지는 보편적인 것이라 그 느낌과 향기가 ‘나도 그랬지’란 말을 자연스럽게 토해내게 한다. 대표적으로 새 시트와 곰팡이와 묑스테르 치즈 등이다. 물론 상황이나 사연은 전혀 다르다.

 

마늘 이야기에서 할머니가 “네가 먹는 것만 봐도 난 내가 부르단다”라고 할 때는 울컥했다. 너무 자주 듣던 말이기 때문이다. 할머니를 할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버지로 바꿔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나라도 시간도 사람마저 달라도 이런 표현과 사랑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이 문장이 결코 쉽지 않은 이 작가의 에세이를 계속 읽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그냥 대충 읽거나 띄엄띄엄 읽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모두 읽은 지금 다시 펼치면 그때 놓쳤던 이야기나 아직도 남아 있는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작가는 이 에세이에서 보들레르를 자주 인용한다. 아직 나에게는 낯선 그 시인, 시집을 다 읽었지만 한 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 시인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은 그의 시를 느낄 수 있었다. 향기와 추억이 엮이면서 그 느낌이 살짝 다가왔다. 다시 보들레르를 시집을 펼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면 여행을 갈 때 그처럼 기형도의 시집을 들고 다닐지 모르겠다. 김수영이 더 좋으려나? 아니면 쌓아둔 시집 중 한 권을 들고 가 몇 편이라도 읽는다면 어떨까? 맞다. 한때 시집을 들고 가서 그냥 왔다. 신동엽의 <금강>이었지. 순간적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이 오고 간다. 가끔씩 펼쳐 다시 아무 곳이나 읽어도 좋을 듯한 에세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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