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 영혼이 향기로웠던 날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안내하는 마법
필립 클로델 지음, 심하은 옮김 / 샘터사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필로 클로델은 아직 나에게는 어려운 작가다. 지금껏 읽은 소설들도 나의 이성이나 가슴에 완전히 와 닿지 않았다. 두 번째 소설을 읽을 때 살짝 그 문을 열어주었지만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낯선 지명과 잘 모르는 단어와 수많은 주석은 함축적이고 간결한 문장과 어우러져 그 속으로 들어가기 더 힘들게 만들었다. 커피숍에 앉아 묵묵히 글을 읽기 한참만에 그 문이 살짝 열렸다. 단순히 피상적으로 느꼈던 것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추억으로 기억으로 향기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머무르는 향기처럼 곧 사라졌다.

 

목차를 보면서 한글 제목만 열심히 읽다가 놓친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에세이들이 모두 알파벳 순서대로 쓴 것이란 사실이다. 아카시아와 여행까지. 낯선 외국어와 조급한 성격이 이것을 놓쳤다. 역자 후기에 알려주지 않았다면 놓쳤을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면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라고?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 또 작가는 자신이 자란 곳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고 한다. 흐르는 시간 속에 변한 곳이 많겠지만 오히려 그 변화가 더 많은 추억과 기억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그 흔적과 기록이 바로 이 에세이일 것이다.

 

이 예순세 편의 에세이는 모두 향기와 추억을 다룬다. 시간은 어린 시절부터 비교적 최근까지. 같은 동네를 무대로 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도 살고 있기 때문인지 기억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겹치는 경우가 많다. 단편적으로 나오는 그들의 소식은 어느 순간 반갑게 다가왔다. 길지 않은 글인데 조금은 신기하다. 최근의 기억보다 오래전 기억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어른이 되면서 세상의 때가 탄 탓일까? 아니면 흥미와 신비로움을 잃어버린 탓일까? 하지만 그 기억을 하나씩 풀어내가는 것은 현재의 그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 방점 하나가 그 감정을, 향기를 살포시 품어낸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이 다섯 가지 감각은 떨어져 있는 듯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글 속에서도 그렇다. 할머니의 스테이크 맛은 후각으로 먼저 다가온다. 여자의 성기를 만지는 촉감은 다시 후각으로 넘어간다. 낡은 오토바이는 소리와 냄새로 이어진다. 아픈 자신의 몸에 어머니가 발라주던 연고의 촉감과 냄새는 나도 모르게 아련한 기억 속 향수를 불러온다. 다른 환경과 시대를 살았지만 몇 가지는 보편적인 것이라 그 느낌과 향기가 ‘나도 그랬지’란 말을 자연스럽게 토해내게 한다. 대표적으로 새 시트와 곰팡이와 묑스테르 치즈 등이다. 물론 상황이나 사연은 전혀 다르다.

 

마늘 이야기에서 할머니가 “네가 먹는 것만 봐도 난 내가 부르단다”라고 할 때는 울컥했다. 너무 자주 듣던 말이기 때문이다. 할머니를 할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버지로 바꿔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나라도 시간도 사람마저 달라도 이런 표현과 사랑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이 문장이 결코 쉽지 않은 이 작가의 에세이를 계속 읽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그냥 대충 읽거나 띄엄띄엄 읽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모두 읽은 지금 다시 펼치면 그때 놓쳤던 이야기나 아직도 남아 있는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작가는 이 에세이에서 보들레르를 자주 인용한다. 아직 나에게는 낯선 그 시인, 시집을 다 읽었지만 한 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 시인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은 그의 시를 느낄 수 있었다. 향기와 추억이 엮이면서 그 느낌이 살짝 다가왔다. 다시 보들레르를 시집을 펼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면 여행을 갈 때 그처럼 기형도의 시집을 들고 다닐지 모르겠다. 김수영이 더 좋으려나? 아니면 쌓아둔 시집 중 한 권을 들고 가 몇 편이라도 읽는다면 어떨까? 맞다. 한때 시집을 들고 가서 그냥 왔다. 신동엽의 <금강>이었지. 순간적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이 오고 간다. 가끔씩 펼쳐 다시 아무 곳이나 읽어도 좋을 듯한 에세이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