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죽이다 데이브 거니 시리즈 3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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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 거니 시리즈 3번째 작품이다. <658, 우연히>와 <악녀를 위한 밤>을 읽고 그의 작품을 기다린지 거의 5년이 지났다. 퍼즐 미스터리를 엄청난 가독성으로 풀어내는 존 버든의 작품임을 생각하면 너무 느린 출간이다. 다름 작품은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언제나 그렇지만 존 버든의 소설은 두께가 문제가 된 적은 없다. 이번 작품이 오히려 짧은 편이다. 거의 550쪽에 달하지만 지루한 부분을 느낄 수 없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라면 작가가 깔아놓은 트릭의 정체를 내가 쉽게 파악했다는 것 정도다.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이미 사용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범인을 찾아낸 것은 아니지만.

 

이번 소설에서 첫 번째 살인이 일어나는 것은 소설의 중반 이후다. 중반까지는 착한 양치기 살인사건을 다시 조사한다. 그리고 재미난 설정이 하나 있다. 두 개의 프롤로그가 있는 것이다. 세 번째 파트에서 다시 프롤로그가 나오고, 이때부터 연쇄살인은 아주 빠르게 일어난다. 실제 앞의 두 파트는 이 세 번째 파트를 위한 아주 길고 중요한 기본 그림이다. 물론 바로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부분에서 집중이나 관심이 떨어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때까지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뭔가가 일어날 것이란 기대를 심어주고, 새로운 사실들과 가정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에 FBI와의 갈등은 또 다른 재미다.

 

2000년 봄 벤츠를 탄 여섯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착한 양치기로 불리는 그는 선언문을 내어 이들이 탐욕 등 때문에 죽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홀연히 사라졌다. 10년 동안 이 사건은 미해결로 남아 있고, 심리학자와 FBI는 선언문을 중심에 놓고 사건을 파헤친다. 여섯 명의 인물들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찾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딱 하나 벤츠를 탔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말이다. 한때 엄청난 관심을 누린 사건이고, 이 사건 때문에 한 케이블방송이 떼돈을 벌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용히 묻혔다. 그런데 이 사건을 다시 파헤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바로 킴이다.

 

킴은 10년 전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진 후 큰 혼란을 겪었다. 방황을 하다 학사 논문을 준비중에 미해결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생각해낸다. 너무 광범위한 것을 줄이다 특정 사건 피해자로 한정한다. 착한 양치기 살인사건이다. ‘그 여자를 막아야 한다.’란 소설의 첫 문장은 바로 킴을 가리킨다. 킴의 기획은 교수의 추천으로 케이블 램TV의 프로그램으로 발전한다. 문제는 여기서 일어난다. 잠자고 있던 악마를 깨운 것이다. 원제인 ‘LET THE DEVIL SLEEP'은 중의적으로 사용된다. 책 속에서는 ’악마를 깨우지 마라‘는 문장으로 더 강하게 다가오지만.

 

거니는 지난 사건의 총격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러다 킴의 엄마인 코니 클라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그를 슈퍼캅으로 띄워준 저널리스트다. 딸의 기획을 도와달라는 부탁이다. 킴이 그를 흠모하고 있다고 말하고, 딸의 전 남친이 딸을 괴롭힌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전설의 슈퍼캅은 미해결 사건인 착한 양치기 살인사건 속으로 발을 내딛는다. 처음에는 비교적 간단하게 생각한 채로. 킴을 도와 몇 가지 도움을 주는 정도였던 것이 하드윅에게 사건 파일을 얻은 뒤로 점점 빠져든다. 선언문을 읽고, 몇 명의 피해자 가족을 만나면서 그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솟아난다.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킴은 전 남친 로비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한다. 경찰에 연락을 해도 제대로 처리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거니가 확인하니 킴이 경찰의 CCTV설치를 거부했다. 로비의 도발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고 허세를 부린다. 엄마에게 가라는 몇 번의 의견도 묵살한다. 이런 킴의 행동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특히 집안에서 발견된 핏방울과 피 묻은 부엌칼의 등장은 이 이야기의 중심에 킴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읽는 내내 언제쯤 킴에게 착한 양치기라고 말하는 연쇄살인범이 다가올지 궁금했다. 이 예상은 전혀 내가 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연쇄살인범을 다루는 수많은 소설과 분명히 다르다. 소설 속 첫 살인이 벌어지는데 걸린 시간이나 두 번의 프롤로그뿐만이 아니다. 살인자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과 그 이유까지 다르다. 거니도 확신을 가지고 누가 범인인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세운 이론이 맞다는 확신조차 없다. 하지만 그의 놀라운 추리력과 상상력은 기존의 틀을 뛰어넘는다. 프로파일링에 대한 환상을 지우고 원점에서 다시 사건을 수사할 것을 바란다. 그의 의견이 기존의 수사관들에게 통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들이 힘들게 쌓아놓은 수사와 이론을 무너트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통찰력을 가지게 된 것은 직접 수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다른 수사가 모두 이루어졌기에 다른 시각으로 사건을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단순히 혼자만의 공은 아니다. 한 사람의 수사관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얼마나 기다려야 다음 이야기가 출간될지 머릿속으로 계산한다. 부디 지금보다 짧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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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닐 게이먼 지음, 박선령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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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말에 1909년에 출간된 <북유럽 신화, 재밌고도 멋진 이야기>를 읽었다. 이 책은 신들을 한 명씩 한 명씩 이야기로 풀어내었다. 신들의 인명사전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옛 에다를 바탕으로 한 새 에다와 산문으로 써 원전의 느낌을 살렸다. 덕분에 읽을 때는 낯선 이름과 그 운문으로 조금 고생했다. 이 고생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북유럽 신화는 기억 속에서 조금씩 사라졌다. 영화 <토르>나 <어벤저스>의 이미지만 강하게 남긴 채 말이다. 그런데 닐 게이먼은 이 북유럽 신화를 사건 중심의 각각 독립된 단편소설로 만들었다. 당연히 엄청난 가독성을 보여주었다.

 

이 북유럽 신화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의 죽음과 노쇠 등이 다루어지고, 각각의 신들이 하나의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신화를 비교하는 것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이 신화가 들려주는 놀랍고 재밌고 아주 인간적인 이야기를 즐기면 된다. 실제 에다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지 안다면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닐 게이먼처럼 재미있게는 쓰지 못할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 속에 신들의 성격을 아주 잘 드러내주었기 때문이다.

 

북유럽 신화를 다룬 에다를 읽지 않았기에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오딘, 토르, 로키 등의 분량이 실제 이렇게 많은지는 알 수 없다. 특히 이 소설에서 토르와 로키의 분량은 절대적이다. 이들이 경험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건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니면 사건 속에서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한다. 특히 로키는 대부분의 큰 문제에 직접 간접적으로 엮여 있다. 신들의 황혼이라 불리는 라그나로크의 경우에는 그의 자식들과 그가 일으키는 엄청난 사건이다. ‘로키의 자식들’이란 이야기에서 이들이 어떻게 태어났고, 앞으로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보여준다. 그리고 왜 그들을 죽이지 않고 문제를 그대로 안고 갈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이것은 운명이란 이름으로 포장된다 해도 말이다.

 

북유럽 신화를 읽을 때면 토르의 무식함과 과격함과 엄청난 힘에 늘 놀란다. ‘토르의 거인 나라 여행’은 그가 지닌 힘이 얼마나 대단하지 알려준다. 그의 엄청난 식성도 같이. 이 식성은 ‘프레이야의 이상한 결혼식’에서 한 번 나왔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훨씬 대단하다. ‘하미르와 토르의 낚시 여행’에서 거인들보다도 많이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작은 몸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음식이 들어갈지 궁금하다. 물리학적으로 본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토르에게 일어난다. 폭이 5킬로미터나 되는 솥은 들고 올 수 있을 정도의 힘이란 것에 놀라고, 이 솥을 사용하는 거인들을 아주 쉽게 죽이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란다. 이 신화를 읽을 때면 이 비과학적인 수치들에 항상 의문을 품는다.

 

토르와 함께 늘 말해지는 뮬리뇨가 로키의 장난 때문에 만들어졌다. 신들이 사랑하는 무기와 도구들이 로키의 장난 때문에 탄생한 것이다. ‘신들의 보물’ 이야기가 그렇다. 이것만 놓고 보면 장난꾸러기이자 모사꾼인 로키가 신들에게 좋은 일도 알게 모르게 많이 했다. ‘최고의 성벽 건축가’에서도 로키의 지혜와 희생이 없었다면 아스가르드의 높은 성벽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멸의 사과’에서 로키는 신들을 아주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간다. 불멸의 신들이 노쇠해지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물론 그가 기지를 발휘해 사건이 잘 해결되지만 그가 아스가르드에 아주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오딘은 이야기의 첫 부분에 등장해서 중심을 잡아준다. 까마귀들로부터 세상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알지만 이것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자리가 세상을 둘러볼 수 있는 위치인지도 모른다. 프레이가 그의 자리에서 게르드의 모습을 보고 한 눈에 반하지 않았든가. 로키의 자식들이 일으킬 문제를 알면서도 그대로 두는 것도 세계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서다. 실제 사건들에서 그가 직접 활약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식인 발드르가 죽었을 때를 제외하면 이야기가 끝까지 별다른 활약이 없다. 하지만 최고신의 거대한 존재감은 언제나 이야기 속에서 조용히 흘러간다.

 

신화는 아주 비과학적이다. 동시에 아주 많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구전문학인 경우 원래의 이야기가 어떤 전승되는 과정에서 어떤 가감을 거쳤는지 알 수 없다. 기독교가 북유럽에 전파되면서 원래의 이야기는 더 많이 사라졌을 것이다. 기독교에 맞게 가공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은 학자들에게 맡기면 된다. 과학과 동떨어져 있는 이야기가 나처럼 거슬린다면 새로운 과학 이론 하나를 만들거나 상상하면 된다. 나처럼 거인과 싸우는 토르의 크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토르의 힘을 더 크다고 생각하거나 비율이 과장된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럼 이런 신화에 대한 트집은 닐 게이먼의 놀라운 이야기 속에 파묻혀 사라질 것이다. 혹시 닐 게이먼이 <그리스 로마 신화>도 써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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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마마로 살아가기 -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한 그녀들을 위한 관계 심리학
가야마 리카 지음, 안혜은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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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마마란 단어가 낯설지 않은 것은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논마마의 정의로 저자는 ‘아이를 원하지 않거나 아이는 원하지만 일과 취미 때문에 출산을 미루는 아이 없는 여성’이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이런 여성이 있다고 해도 쉽게 입밖으로 말하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결혼 자체를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여성은 더 많다.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제는 주변에 비교적 흔한 경우가 되었다. 이 변화를 저자는 자신과 사회의 변화 속에서 경험한 것을 엮어서 책으로 내었다. 저자 자신도 논마마다.

 

결혼을 했는데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이 거의 20년 전이다. 당시 분위기에서 이런 말을 공공연히 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의 상황에서 결혼했는데 아이가 없으면 양가 어른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데 불임전문병원을 찾아가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20년 전 그 부부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을 통해 듣고 놀랐는데 최근에도 역시 아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나 자신이 그들 부부의 속내를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또 다른 집안에서 이런 부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부모가 이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와 아쉬움을 느낀다는 소식은 추가적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도 논마마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아이를 간절히 원하지만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불임전문병원이 호황을 누리는 이유 중 하나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점점 늘어나는 논마마에 대해 저자는 결혼과 출산은 지극히 사적인 문제라고 분명히 말한다. 하나의 국가가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태어나는 아이가 필수적이다 보니 많은 아이를 낳기를 원한다. 능력만 된다면 대가족을 유지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현실은 수많은 이유로 이런 논마마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질타하고 악의 없는 폭력을 휘두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음을 깨달았다.

 

논마마 여성에 대한 사회 폭력은 결혼과 육아를 경험하지 못한 남성에게도 적용되는 부분이다. 육아에서 흔히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아이를 키워보면 안다’란 말이다. 실제 아이를 키워보면 수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나의 아이가 옆집의, 친구의, 후배의, 동료의 아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라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은 분명히 있다. 이 공유할 수 있는 경험만 가지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경험한 자만이 모든 것을 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모성에 대한 과도한 신화를 만들어낸다. 강요된 모성에 수많은 엄마들이 얼마나 힘든 과정을 겪고 있는지 알려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누구나 경험하는 일로 치부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모순은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반려동물 부분에서 “동물에게 애정을 듬뿍 쏟고 거기서 얻는 반응이 만족스러워 아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냐고 한다면 솔직히 부정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지만 “반려동물에게 육아 대리만족을 얻는 일은 거의 없다.”라면서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국가가 많은 출산을 원하고 장려한다고 하지만 실제 사회 시스템은 이것을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만들어놓았다. 책 속에서 부족한 유치원을 언급한 것도 이것의 연장선이다. 실제 한국도 어린이집 문제는 아주 오래되었지만 전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출생 전에 대기신청을 해도 몇 년을 기다려야 한다. 이 문제 제기에 대한 일본 수상의 반응은 우리도 별 차이가 없지 않나 생각한다.

 

저자는 논마마 폭력에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을 긍정하고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회 배후에 있는 가치관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강요보다 무서운 마이드 컨트롤 부분에서 우리가 쉽게 만나게 되는 논마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폭력이 어디에서 기인하게 되었는지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 행복한 결혼보다 사회 안정 혹은 인구절벽의 탈출을 우선하는 일이 너무 쉽게 말해진다. 결혼이란 사회적 제도를 새롭게 만들 필요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공식처럼 되어 있는 결혼, 출산, 육아의 연결 고리를 깨트려야 한다. 이것은 실제 결혼한 부부 모두에게 아주 큰 부담이다. 길지 않은 글이지만 자신의 경험과 사회 자료를 묶어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논마마 문제를 아주 잘 다루었다. 사회적으로 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할 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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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숙한 국가 - 국가를 바라보는 젊은 중국 지식인의 반성적 사유
쉬즈위안 지음, 김태성 옮김 / 이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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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중국은 공산당 독재체제다. 중국에 가면 되지 않는 검색 엔진과 SNS가 있다. 어떤 한국 인터넷 페이지는 열리지도 않는다. 강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런 곳에서 대규모 집회가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정부의 입장은 아주 강경하다. 저자의 한국 서문에 나온 사드 문제에 관해 그의 의견에 공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정치 쪽을 제외하고 경제로 넘어가면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문화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부분이 개방되었다. 물론 정치적 필요에 의해 단속되는 것은 변함없다. 중국의 발전 속도는 과거 한국을 능가한다. 거대한 영토와 엄청난 숫자의 인구는 발전 초기에 아주 큰 힘을 발휘했다. 몇 년 전 정체기에 들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것 또한 변하고 있다.

 

이 거대한 국가의 발전을 중국의 한 지식인은 미성숙하다고 말한다. 경제 발전만 놓고 보면 틀린 말이지만 정치와 문화로 넘어가면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된다. 사실 이 책을 선택할 때 나의 관심은 과연 어디까지 중국의 정치문제를 다룰까? 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문화대혁명과 천안문사태를 정면에서 다룰까 하는 것이었다. 문화대혁명을 경험한 작가들의 소설을 읽고, 그 시대를 다룬 영화를 보았지만 정치적으로 엄청난 실패였던 이 정책의 아주 참담한 결과는 정면에서 다룬 것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물론 외국 저자들의 글에서는 아주 신랄하고 정확하게 표현된다. 수천 만 명의 아사자들을 내가 알게 된 것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물론 스탈린 체제 아래의 소련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연방이 해체되던 그 시절 중국은 천안문사태를 맞이했다. 그 대처는 아주 강력했다. 천안문 광장에서 한 청년이 전차 앞에 서 있는 사진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이후 수많은 지식인들이 중국을 떠나 외국으로 망명했다. 이 망명자들은 외국에서 그 나라의 언어로 소설이나 다른 저작물을 만들어내면서 중국과 자신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렇지만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천안문사태는 중국의 금지어 중 하나다. 사실 내가 기대한 것은 바로 이 두 부분 중 어느 하나라도 정면에서 다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원래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고 넘어간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1장부터 7장까지는 중국의 역사를 다룬다. 이 부분은 나에게 아주 흥미로웠다. 피상적이고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중국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청 제국이 무너지는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그 당시 지식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일본과 비교하는 몇 가지 대목은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많은 유학생을 일본으로 보내고,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대목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유럽 등지로 유학을 떠났고, 이들이 혁명 세력으로 발전했다. 중국 근·현대 역사를 중국인의 시선으로 해부하고 해석한 이 내용은 서양 학자나 동양의 다른 나라 역사학자들의 시선과 많은 부분이 차이가 난다. 물론 저자 자신도 외국 저자들이 기록한 것을 많이 인용한다. 이 인용은 그 자신에게도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보게 만들었을 것이다.

 

메이지유신은 잘 알고 있지만 동치중흥은 잘 모른다. 역사 시간에 졸았기 때문일까? 신해혁명은 알지만. 이 둘을 같이 놓고 한 장을 할애한 것은 비슷한 시도였지만 다른 결과로 이어졌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다. 이후 3개의 장에서는 다섯 명의 역사적 인물들을 통해 그 시대를 말한다. 쑨원과 장제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이 그 주인공이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흔히 같이 놓고 비교하는 경우는 보았지만 이렇게 나열한 경우는 조금 어색하다. 쑨원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부분 중 하나가 건국의 아버지란 것인데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조직 능력은 그렇게 뛰어난 것 같지 않다.

 

장제스의 이야기 부분에서 송가황조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처가 부분이 많이 생략된 것 같다. 전술가인 그와 전략가인 마오쩌둥으로 둘을 비교한 부분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6~70년대 마오주의가 세계를 휩쓸 때 나온 많은 저작들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 태반이지만 대장정의 기록은 아주 흥미롭다. 이 부분을 생략한 것은 아마 중국에서는 너무 잘 알려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우은라이에 대한 평가는 최근에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봤는데 한결같이 호평 일색이다. 덩샤오핑의 그 유명한 흑묘백묘 이야기는 언급조차 없지만 그가 권력을 획득한 후 펼친 정책은 아주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다. 마오쩌둥을 그대로 둔 것부터 그렇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은 엄청난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는 묻는다. 민주라는 것은 과연 좋은 것인지? 이 보다 나의 시선을 끈 것은 기업가 정신이다. 성공했지만 거짓과 부패로 이름을 알린 기업가들을 말하면서 아쉬워한다. 이것을 보면서 바로 마윈이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록펠러에 대한 그의 과한 칭찬과 기업에 대한 우대는 이 책의 정체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에 북경대학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그가 그 대학 출신이기에 가능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다른 대학 출신도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지만 몇 곳은 눈에 거슬린다. 20세기 초 일본이 아시아의 동반자로 중국을 도와주려고 했었다는 대목은 아주 놀라웠다. 나의 오독이 아닌지 의문을 품는다. 다시 정밀하게 읽고 평가해야 할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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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기발한 우연학 입문
빈스 에버트 지음, 장윤경 옮김 / 지식너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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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에서는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이 말을 뒤집는다. 우연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 우연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네 개의 파트로 나누어 설명한다. 개인의 삶, 일과 성공, 학문, 미래 등이다. 미시적으로 본다면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맞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혹은 전 우주적으로 본다면 어떨까? 아마도 우연보다는 누군가에게 일어날 일이 결국 그 사람에게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개인에게는 분명 우연이 작용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원제목은 이렇게 길지 않다. <unberechenbar>라는 원제목의 독일어를 번역하니 ‘계산할 수 없는’ 혹은 ‘예측할 수 없는’ 이란 형용사로 설명되어 있다. 이 짧은 제목이 이렇게 변한 것은 최근에 많이 팔린 책의 제목을 따라한 탓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제목은 원래의 저자가 의도한 것과 조금은 다른 식으로 변했다. 우연을 계산할 수 없는 것으로 대체 가능한가 하는 의문도 생기면서 말이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대는 앞에서 말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란 책과 나의 생각이 맞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도 거대하고 복잡한 현상을 우리가 설명할 수 없기에 ‘우연’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연학이란 학문이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 책의 앞의 두 장은 원제목에 나온 계산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져 있다. 계획한대로 잘 되지 않는 우리의 삶을 개인과 일로 풀었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삶과 일에서 수많은 계획을 세운다. 저자도 말했지만 수많은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매년 새로운 예측을 쏟아낸다. 그런데 그 중에서 제대로 맞은 것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뒤에는 다시 언론이 그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하는 기묘한 일이 벌어진다. 책 속에서 종말론을 믿는 신도의 예와 닮아 있다. 한 번 생긴 권위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익숙하고 유명한 이름은 인용하는 사람에게 아주 편한 존재다. 그 결과를 다시 검토하는 일이 없는 언론에서는 특히.

 

일상에서 만남은 우연인 경우가 많다. 수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로 볼 수도 있지만 최소한 그 순간만은 우연일 것이다. 운명적 만남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소설 등도 바로 이 우연을 극대화시켜 표현한다. 건강은 어떨까? 아이는 또? 이 부분에서는 우연보다 저자의 원제목인 ‘예측할 수 없는’ 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우리는 수없이 생각하고 살면서 바꾼다. 계산한 대로 세상이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수학 공식대로 삶이 흘러간다면, 미래가 개인별로 정해져 있다면 얼마나 단순할까? 우연한 발견이나 발명이나 만남도 역시 정해진 것이라는 의미일 테니.

 

학문에서 우연은 준비한 자에게만 온다고 말한다. 기회가 늘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말과 똑같다. 사실이다. 과학사에서 실수나 착각 등의 우연으로 발견한 놀라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측한대로, 계획한대로 되지 않아서 더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이 과학이고 발전이다. 고집스러운 사람들이 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뇌가 우연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앞에서 내가 주장한 것도 이것의 연장선일지 모르겠다. 최소한 아주 미시적인 부분에서는 말이다. 그리고 현생 인류가 살아남은 이유 중 하나로 지식의 전달과 변화에 대한 빠른 적응을 말하는데 동의한다.

 

우리는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전문가의 예측은 그냥 예측일 뿐이다. 빅 데이터의 분석도 마찬가지다. 살면서 늘 합리적으로 살지도 않는다. 늘 동일한 패턴으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변하기도 한다. 이때는 우연보다는 ‘계산할 수 없는’이란 표현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이 책 속에서 천재성에 대한 연령별 인용이 나오는데 우리의 억압적인 교육 방식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사고의 틀이 고정된 후에 우리가 가지는 선입견은 무서울 정도다. 재미처럼 나온 사이코패스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에 읽은 소설 한 대목을 떠올려주었다.

 

공연을 많이 하는 저자가 쓴 책이고, 유머를 곳곳에 넣어 생각보다 쉽게 읽었다. 덕분에 곳곳에서 실소를 풋! 하고 몇 번이나 날렸다. 그 유머가 나와 맞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우연학이란 제목 때문에 원래의 가치가 조금 사라진 것 같다. 저자는 우연보다는 우리가 계산한대로 되지 않는 삶과 미래와 일들을 말하고 싶어한 것 같은데 말이다. 이 표현의 차이를 하나로 뭉뚱그린다면 그 의미가 많이 왜곡될 것이다. 오랜만에 재미있게 대중적인 자연과학 분야 글을 쓰는 작가 한 명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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