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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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의 소설을 오랜만에 읽었다. <장미의 이름>을 밤새워 읽고 그의 팬이 된 후 나오면 책을 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내가 생각한 에코가 아니었다. <푸코의 진자>를 읽을 때만 해도 잘 모르지만 재밌었는데 <전날의 섬>에 넘어오면서 취향을 벗어났다. <바우돌리노>는 읽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이유를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 역자의 후기를 읽으면서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다른 소재와 다른 문체 때문이다. 사실 많은 주변 사람들이 <장미의 이름>이 힘들다고 했다. 나는 재밌었는데 말이다. 이 차이를 인정하고, 이번 소설을 읽으니 에코의 다른 모습이 보였다.

 

발행되지 않을 신문의 이름이 제0호다. 발행인의 목적은 신문을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신문이란 매체를 가지고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목적을 알고 있는 주필 시메이는 화자에게 큰 뒷돈을 주고 그에게 대필 작가의 일을 맡긴다. 이 신문 발행을 둘러싼 내용을 소설로 쓰고, 나중에 이것을 책으로 낼 것이란 협박으로 돈을 벌 생각이다. 화자는 이 내용을 알고 시메이와 계약한다. 그리고 발행되지 않을 신문사는 기자들을 채용한다. 발행인이 가진 의도를 충실히 이행하려는 주필은 기자들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용할 마음이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평범한 기사와 무기로 이용할 수 있는 기사들이다.

 

이미 한국에서는 기레기란 이름으로 기자들의 작태들이 알려줘 있다.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나 자신도 알게 모르게 이 가짜 뉴스를 듣고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진실을 파악하려는 의도보다 나의 성향에 맞는 기사가 나오면 그냥 덥석 물고 만다. 특히 정치인들의 말이 나오면 사실 여부보다 당파성을 우선시 하는 나쁜 버릇도 있다. “사람들은 정치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요. 정치인들은 말을 제대로 하지도 않고 열정에 차서 확실하게 말하지도 않아요. 그저 요란하게 짖어댈 뿐이죠.” 한국 현실 정치에서도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문장이다. 언론은 이것을 더욱 부채질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치를 이끌기 위해서라면 더욱 더 심하게.

 

시메이가 하나의 사건을 두고 어떻게 물타기를 하는지 잘 설명해준다. “오늘날에는 누군가에게 고발을 당하거나 기소를 받게 되었을 때 그것에 응수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어요. 그저 그 고발인이나 기소인의 정당성을 떨어뜨릴 만한 것을 찾아내면 됩니다.” 이 문장을 읽고 삼성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떠올랐다.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 사건이 원래 의미하는 바로 왜곡하는 것이다. 한국만 이런 것이 아니고 이탈리아도 이런 일이 자주 있는 모양이다. 뭐 가짜 뉴스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니까. 이렇게 이 소설은 이런 언론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가짜 신문 만들기라는 이야기 속에 무솔리니를 둘러싼 음모론이 또 하나의 큰 흐름이 이룬다. 무솔리니의 죽음이 가짜고, 다시 그가 나타나 정권을 잡으려고 한다는 주장이다. 작가는 이 작업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생기는 의혹과 두려움은 여기서 비롯했다. 실제로 1년 동안 유지하려고 한 신문사가 두 달 만에 문을 닫게 된 것도 이 음모론을 조사하던 기자가 살해된 탓이다. 발행인은 이 사건으로 발행 중단을 결정한다. 도입부의 걱정과 공포와 두려움은 이 때문이다. 이후 과거로 돌아가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려주는 구성인데 언론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어떤 기사가 나오는지 잘 보여준다.

 

무솔리니를 둘러싼 음모와 관련된 가설에서 놀라운 점은 이미 많은 자료들이 파편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한 인물의 역사를 조사할 때 여기저기에서 나온 이야기를 모으면 하나의 흐름을 만들 수 있다. 요즘처럼 데이터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정치인 등이 내뱉은 말들은 나중에 자신을 공격하는 말로 변하기도 한다. 무솔리니를 조사한 브라가도초도 이렇게 드러난 자료를 하나로 묶었다. 조각난 사실들은 무서울 것이 없지만 뭉쳐지면 그 이미지나 사실이 위험해진다. 그리고 이 사실이 밖으로 세상으로 알려지면 폭로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소설은 이런 지점을 꼭꼭 집고, 이 부분에 대응하는 방법까지 말해준다. 음모론과 언론을 멋지게 엮었다. 분량보다 이야기할 거리가 훨씬 많은 소설이다. 아직 읽지 않은 에코의 소설을 찾아봐야겠다. 움베르토 에코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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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트의 세계
듀나 지음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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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듀나의 장편소설을 읽었다. 한창 영화를 보던 시기에 그의 영화 평도 본 적이 많다. 최근에 와서 영화 볼 수 있는 시간이 나지 않으면서 그의 영화 평도 점점 멀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잠깐 그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본 것이 전부다. 하지만 상당히 꾸준히 나오는 그의 책들은 늘 관심의 대상이다. 그의 소설이 자주 눈에 띄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모두 읽지는 않았지만 집 책장을 뒤지면 몇 권은 더 나온다. 취향에 완전히 맞는 작가는 아니지만 꾸준히 한국 SF를 내놓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번에 내놓은 책은 상당히 취향과 잘 맞았다.

 

민트의 세계. 제목만 놓고 보면 완전히 취향 바깥에 있다. 표지는 또 어떤가. 아마도 듀나라는 이름을 보지 못했다면 편견으로 이 소설을 놓쳤을 것이다. 책소개를 보니 6년만의 장편이라고 한다. 이 소설의 가장 기본이 되는 설정이 2013년 연작소설집 <아직은 신이 아니야>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것은 초능력을 일깨우는 배터리라는 존재다. 처음에는 이 배터리의 존재를 크게 인식하지 못했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 설정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배터리임을 알게 된다. 이들이 없다면 사람들은 초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이들은 초능력 에너지 공급원이다.

 

에너지 공급원이 있다고 모두가 똑같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에 따라 발현되는 능력이 다르다. 등급에서도 차이가 난다. 하지만 배터리가 없다면 그 능력에 제한이 걸린다. 여기에서 또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자신만의 배터리와 링크된다면 그 힘이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야기를 만들고 풀어가는 과정 속에 이런 설정들을 계속해서 알려준다. 이런 장르의 특성이다. 작가가 설정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재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SF나 판타지 같은 장르 소설이 한정된 독자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솔직히 말해 나도 이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는 두 시점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21층 천장에서 시체로 발견된 류수현을 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트 팩의 이야기다. 작가는 교묘하게 이 두 시점을 꼰다. 읽다 보면 다른 시간대를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설정은 독자의 시선을 유도해서 다른 결말을 예상하게 만든다. 시체를 발견한 한상우 등의 류수현 죽음 원인 찾기는 과거 민트의 활약을 복기하는 역할을 맡는다. 동시에 민트는 적들과 싸우면서 그들의 팩이 가진 능력을 극대화시키고, 그들이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후반부로 가면서 이 두 시점은 하나로 합쳐진다.

 

이전에 듀나의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낯설게 느낀 것은 그 당시 실제 지명을 사용한 것과 한 여자 연예인의 실명을 등장시킨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Twinkle이란 단어가 들어간 노래가 나왔을 때 태티서가 떠올랐다. 나만 이렇게 생각한 것일까? 그리고 지금부터 40년 뒤에 한국에서 지금과 같은 이름의 커피숍이 그대로 나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명은 그렇다고 하지만 커피숍까지 그럴까? 이런 이름들을 보면서 작가가 새로운 이름 지어내기 귀찮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좋게 포장해서 대기업이 아직도 힘을 발휘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미 대기업이 거의 사라진 미래를 말하고 있다.

 

다양한 초능력자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힘을 합쳐 상대방을 공격한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아쉽게도 어벤져스의 영화 장면들이다. 나의 한계인지, 할리우드 영화의 대단함인지. 그리고 낯선 개념들은 읽는 속도를 생각보다 더디게 만들었다. 그 중 하나가 환영을 만들고, 거기에 인격을 부여하고, 그 인격에 중독된 사람들 이야기다. 이것은 뒤로 가면서 더 정밀해지고,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한다. 민트의 이야기는 바로 이 부분에 집중해 있다. 반면에 한상우의 시점은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는 느낌을 주었다. 어떻게, 왜 이런 사건이 벌어졌는지, 그 이면에는 어떤 일이 있는지 등. 읽으면서 많은 SF영화나 소설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중간중간 미래 이야기를 할 때는 또 다른 떡밥으로 다가왔고, 민트의 미래는 어떨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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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히나타 식당
우오노메 산타 지음, 한나리 옮김 / 애니북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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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시울을 붉게 만드는 만화다. 큰 기대 없이 늦은 밤 우연히 펼쳤다가 단숨에 다 읽었다. 그렇게 두툼하지 않은 분량 속에 너무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 단순한 요리 만화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각각의 메뉴 속에 하나의 짧은 에피소드를 정말 잘 녹여 내었다. 일본식 가정요리법까지 담고 있어 음식 만들기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씩 따라해도 될 정도다. 물론 나처럼 먹기만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다만 일본에 여행가서 이런 음식점이 있다면 꼭 한 번 먹어보고 싶다. 맛의 추억과 감성이 달라 작품 속 인물들처럼 감동할 가능성은 낮겠지만 정성 가득한 음식이 주는 맛은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에피소드 하나에 메뉴 하나의 구성이다. 카레라이스, 오코노미야키, 샌드위치 등은 예외다. 카레라이스는 일본의 국민 가정식이다. 얼마나 많은 일본 드라마나 만화 등에서 카레라이스가 나왔던가. 이 만화 속에서도 카레라이스는 엄마의 요리다. 아버지와 딸의 추억이 겹치고, 엇갈리고, 합쳐지는 부분이다. 오코노미야키와 샌드위치의 경우는 히나타 식당의 주인 데루코 씨의 개인 가정사와 엮여 있다. 살던 오사카를 떠나 도쿄로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 이후 일어나는 몇 가지 문제들을 같이 다룬다. 부모의 마음, 엄마와 자식의 용기 등이 잘 녹아 있다. 잘못이 오해로 이어지는 과정과 그 잘못을 수용하는 모습은 예상한 것과 다른 모습이다. 가족이 함께 하는 식사의 소중함을 보여주는 장면은 뭉클하다.

 

히나타 식당은 하루 하나의 정식 메뉴만 판매한다. 매일 바뀌는 듯한데 처음 며칠은 손님이 없었다. 아들 간타가 첫 손님처럼 먹는다. 하지만 이 식당에 한 번 찾아온 손님들은 조금씩 단골이 된다. 아이를 데리고 왔다가 그 맛과 정성에 반해 단골이 된 엄마도 있다. 같은 반 친구 엄마와 함께 온 에피소드에서는 맛보다 칼로리와 영양소에 집중한 엄마가 아이가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표정을 처음 발견한다. 영양도 중요하지만 맛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한 것이다. 반면에 당근 같은 야채를 먹이기 위한 작은 에피소드도 있다. 맛있는 빵과 함께.

 

이야기 속에 기본적으로 깔린 감성은 엄마가 만든 가정 음식이다. 요리에 자신 없는 한 엄마는 데루코 씨에게 맛있는 된장국 만드는 법을 배운다. 그런데 딸은 엄마의 된장국이 아니라고 운다. 맛 그 너머 있는 추억과 사랑이 더 우선이다. 사실 각 가정은 그 집만의 요리 방법이 있다. 그런데 최근 쿡방이 유행하면서 이것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만능소스가 간편하게 음식을 만드는데 도움을 줄지 모르지만 그 집만의 특색을 사라지게 한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쿡방만의 문제는 아니다. 공장에서 생산된 된장, 고추장, 간장, 조미료 등을 사서 요리하면서 맛이 비슷해진다. 하지만 이런 재료를 가지고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 히나타 식당을 보면 그것이 보인다.

 

이 만화에서 가장 자주 보게 되는 장면 중 하나가 맛있다는 감탄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늦은 밤 정성을 다해 다음날 정식에 사용할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하는 데루코 씨다.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처음 이 식당에 온 남자 손님이 매일 오고 싶다고 했을 때 데루코 씨는 미안하다고 말한다. 아들 간타가 성인 남자를 두려워한다는 이유다. 이것은 데루코 씨가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도쿄로 도망친 원인인 가정 폭력 때문이다. 이때 말하는 법도 잊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간타는 조금씩 말을 하게 된다. 이 장면들 또한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그리고 스카이트리가 보이는 동네를 보면서 혹시 몇 년 전 스카이트리까지 걸었던 그 길에 있는 식당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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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등록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7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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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티나 데이터>의 새로운 번역본이다. 같은 번역자가 출판사를 달리해서 개정판을 내는 것을 자주 보지만 이처럼 다른 번역자가 새롭게 번역하는 것은 흔치 않다. 물론 고전으로 넘어가면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출간된 것이 몇 년 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아주 낯설다. 인터넷 서점 미리보기로 첫 쪽을 비교해보니 두 번역가의 문장이 다른 곳들이 눈에 들어온다. 원문과 비교해서 읽는다고 해도 잘 모르니 어느 쪽이 더 나은 번역인가 하는 것은 넘어가자. 이 부분은 원서 능력자들에게 맡기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목의 경우는 이전 출간본이 원서를 따랐다면 이번에는 책 내용을 따라했다. 이것도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갈릴 것이다. 다만 이전 제목을 아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번 책 제목이 조금 낯설다.

 

가까운 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이번에는 DNA수사가 소재다. 현재 많은 국가에서 과학 수사의 한 방법으로 DNA수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DNA정보를 한 곳으로 모으지는 않는다. 정보가 한 곳으로 모이면 이 정보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행정 관료들이 원하는 일이다. 한국 같이 지문을 등록하는 나라가 거의 없음을 감안하고, 지문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DNA를 한 곳에 모은다면 어떻게 될까? 소설 속에서는 범죄 예방을 내세우고 있지만 현실은 행정 편의주의다. 이 때문에 범죄가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개인의 정보가 한곳에 모이면 그만큼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작가는 이런 부분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지는 않는다. 늘 이 부분은 아쉽다.

 

DNA를 통해 범인의 몽타주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면 경찰의 일을 더 쉬워진다.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이런 DNA 수사 시스템을 반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정보들을 한 곳으로 모은다면 어떨까? 한국 지문 등록처럼. 그리고 이 정보를 특정한 세력이 자신들 마음대로 만질 수 있다면? 완벽하게 모든 국민의 DNA가 등록되지 않았다면? 시스템의 해킹 가능성은? 간단해 보이는 시스템의 이면에는 많은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당연히 이런 문제점들을 차분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로 빠지면 장광설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너무 간단하다면 이야기 전체의 힘이 많이 부족해진다. 이 소설의 약점이다.

 

DNA 프로파일링이란 이름을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범인이 DNA검사를 할 수 있는 증거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발적인 범죄들의 검거율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스릴러 등에 나오는 연쇄살인범들은 이런 증거를 남겨두지 않는다. 혹시 남겨두었다고 해도 등록이 되어 있지 않으면 소용없다. 작가는 유전자의 유사성을 통해 등록된 가족들로 범위를 축소하고, 프로파일링된 몽타주로 범인을 잡는다는 설정을 보여준다. 아마 이렇게 된다면 많은 범죄들이 초기에 해결될 것이다. 아사마 형사가 경찰이 심부름꾼처럼 느낀 것도 이 때문이다. 발로 뛰는 형사가 거의 사라지고, 프로파일링된 정보에 따라 잡기만 할 것이다.

 

DNA검사란 설정에 한 가지를 더했다. 바로 이중인격이다. 주인공 가구라 연구원은 이중인격자다. 그의 또 다른 인격은 류다. 대단한 도예가였던 아버지가 자신의 작품과 프로그램으로 만든 작품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살한 순간 다른 인격이 생겼다. 여기서 작가는 과학과 인간의 대립구도를 만든다. 가구라가 유전자에 의해 인간의 성격 등이 결정된다고 믿는 반면 류는 화가처럼 그림을 그린다. 이런 경우 가구라와 류의 인격이 번갈아 등장해서 상황을 꼬고, 내적 갈등이 깊어지는 설정으로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뻔한 길 대신 더 간결하고 속도감 있는 진행으로 이어간다. 류의 존재를 오랫동안 숨겨놓는 방식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DNA프로파일링 시스템을 만든 천재소녀와 그 오빠가 죽고, 그들이 만든 프로그램이 있을 것이란 설정에서 시작한다. 가구라의 모발 하나가 현장에 떨어져 있어 프로파일링 시스템에서 그를 발견한다. 가구라는 무죄를 말하면서 다테시나 남매가 남긴 단서를 쫓고, 이런 그를 경찰들이 뒤쫓는다. 일본계 미국인 리사의 도움으로 극적 순간에 탈출한다. 이 남매가 작업한 숨겨진 별장으로 가지만 단서는 보이지 않고, 경찰의 수사망만 좁혀진다. 일본 경찰청과 경시청의 대립 속에 아사마 형사는 단서를 잡으려고 한다. 여기에 가구라의 환영이 분명한 스즈란이 같이 동행한다. 도망치고, 쫓는 과정 속에서 그 어떤 정보도 발견하지 못한 연쇄살인범의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NF13이 의미하는 바가 드러난다. 세부적인 아쉬움 속에서도 속도감과 재미는 어느 정도 보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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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기생충 - Novel Engine POP
미아키 스가루 지음, 시온 그림, 현정수 옮김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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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유효기간에 대한 수많은 연구 결과들이 있다. 이 연구들은 사랑을 하는 남녀가 내품는 호르몬에 대해 말한다. 이 물질이 효력을 발생하는 기간은 겨우 몇 개월이다. 언론에서 설레발을 친 것을 감안하면 우리의 시간이 왜 몇 개월 혹은 몇 년에 머무는지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더 많이, 더 깊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기생충으로 바꾸면 어떨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질문 중 하나가 이것이다. 신경전달물질이 현대인의 수많은 질병들을 고치는 것을 생각하면 작가의 이 상상력이 그렇게 황당하게만 다가오지 않는다. 뭐 실제 그렇다면 ‘나’에 대한 또 다른 철학적 문제가 생기겠지만.

 

코사카 켄고는 아주 심한 결벽증을 가지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인데 이 증상 때문에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도 힘들어 하고, 사람들이 많은 곳은 가지도 못한다. 작은 집안은 병원처럼 소독제 냄새가 가득하다. 회사를 그만 둔 후 유일한 취미는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드는 것이다. 이 일에는 꽤 좋은 솜씨를 발휘한다. 하나의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든 후 이즈미라는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가 바이러스를 만든 것을 알고 있다. 그가 바란 것은 한 소년을 만나 친해지라는 것이다. 성공하면 적은 돈도 주겠다고 한다. 심한 결벽증 환자 코사카는 이렇게 대인기피증이 있는 소녀 사나기 히지리를 만난다.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두 남녀가 처음 만났을 때 좋은 결과가 나오기는 쉽지 않다. 이들도 마찬가지다. 사나기는 코사카가 받기로 한 돈의 반을 받기로 약속하고 친해진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사나기는 코사카의 깨끗한 방에 침입한다. 친해진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제 내용은 그녀의 병도 한몫한다. 둘의 첫 만남에서 서로의 문제점을 말하지 않지만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사나기의 병 문제가 터졌을 때 둘은 조금 더 서로를 알게 된다. 이렇게 조금씩 관계가 쌓이면서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이 사랑은 기생충에 의한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설정이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코사카의 결백증도, 사나기의 대인기피증도 이 기생충이 만들었다. 약을 먹으면 이 증상은 사라진다. 작가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이 두 사람처럼 기생충에 감염된 사람들의 임상 사례를 보여준다. 이 기생충 때문에 자살한 사람들 이야기도 같이. 이 둘이 서로를 알면서 세상 밖으로 조금씩 나간 것은 어느새 조금씩 잊혀지고, 이 강렬한 기생충 이야기가 전면에 나선다. 앞에서 말한 사랑의 호르몬 이야기를 떠올린 것도 바로 이 순간이다. 인간의 의지를 뛰어넘는 기생충의 의지는 커플을 죽음으로 이끌기도 한다. 인간의 감정을 머릿속에 자리잡은 기생충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의 반전 장치를 남겨둔다.

 

가볍게 읽을 생각으로 선택했는데 생각보다 묵직하다. 소재도,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기생충의 힘을 새롭게 극대화한 상태에서 인간의 의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무겁게 철학적 문제를 다루기보다 이 상황에 빠진 사람들의 선택과 감정을 조심스럽게 풀어낸다. 그리고 몇 가지 앞부분에 깔아놓은 몇 가지 설정들은 뒤로 가면서 힘을 얻는다. 스산한 분위기 속에서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이 이야기에서 밝은 느낌은 잠시 나올 뿐이다. 하지만 그 잠깐의 밝음과 새로운 가능성의 희망이 여운을 남긴다. 사랑이란 추상적 감정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시간이다. 이런 기생충이라면 몸속에 키우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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