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손님
히라이데 다카시 지음, 양윤옥 옮김 / 박하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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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29장에 걸쳐 고양이 치비와의 만남과 헤어짐과 그리움을 그렸다. 이 치비와의 만남은 작가가 번개골목이라고 이름부친 곳에서 시작한다. 그 후 이 고양이는 작가 부부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그러다 치비는 교통사고로 죽고, 이 상실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아내와 옆에서 이것을 지켜보는 작가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과정과 일상을 조금은 담담하게 그려낸다. 현대 우화라는 설명에 어떤 우화가 펼쳐질까 궁금해 하면서 계속 읽었지만 치비와 작가의 일상만 나올 뿐이다. 내가 이해하는 우화와 다른 것인지, 아니면 나의 이해력이 딸리는 것인지.

 

소설로 분류되었지만 읽다보면 일상을 적은 수필처럼 읽힌다. 강렬하고 격렬한 감정은 없고, 절제되고 평범한 일상만 나온다. 이 일상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친구들이나 주인집의 문제 때문이다. 시간적 배경도 1980년대 말 일본 버블경제기에 있었던 것이라 그 시대의 단면을 조금은 느낄 수 있다. 짧은 시간이 아니라 1년 이상의 긴 시간을 다룬다. 계절의 변화와 사는 공간의 변화가 너무 정적이라 일본 영화 거장들의 일상을 다룬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아마 이 부분이 외국 독자들의 많은 호응을 불러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상을 표현하는 문장은 그 어떤 화려한 기교나 허세가 없다. 일상을 보여줄 뿐이다. 이 과정 속에서 치비는 알게 모르게 일상에 스며든다. 아내의 손을 물었을 때는 절교를 외치기도 하지만 집에 찾아오는 치비에게 전갱이를 구워준다. 작고 소소한 행복이다. 이렇게 쌓인 기억과 추억은 치비가 죽었다는 소식에 큰 상실감은 느낀다. 다른 고양이에게서 치비의 흔적을 쫓는 모습은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추억은 공간과 함께 기억 속에 남는다. 그곳을 다시 갔을 때 추억의 문이 열린다. 이때 솟구치는 감정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바뀐다. 누군가는 더 강해질 것이고, 누군가는 희미해질 것이다.

 

많지 않은 분량에, 상대적으로 큰 활자라 읽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한 장 한 장 읽다 보면 그 정적인 분위기에 조용히 휩싸인다. 작가가 그린 공간을 떠올리며 그 속에서 뛰어노는 치비를 생각하고, 그 일상을 돌아보면 아파트에 살기 전 우리의 삶이 살짝 겹쳐진다. 이 공감 속에 작가의 생각을 곳곳에 풀어놓았다. 읽을 때 놓친 것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잠깐 들쳐보는 순간에도 많은 문장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다시 읽게 되면 어떨까? 화자는 치비의 상실을 그렇게 아파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는데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일까? 아니면 아내의 감정에 너무 눈길이 간 것일까? 이 감정,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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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서정시
리훙웨이 지음, 한수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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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5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위원왕후가 별세했다. 사인은 자살이다. 문학가에게 영광스러운 상을 수상하기로 한 인물이 죽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죽기 전 그는 한 인물에게 메일을 보냈다. “이렇게 단절한다. 잘 지내길.” 이 시대는 이제 인터넷도 이메일도 구식이다. 사람들은 12살이 되면 뇌에 의식결정체라는 기기를 이식하여 기억을 저장한다. 이동영혼이라는 매개체로 의식공동체라는 일종의 서버에 접속한다. 당연히 이동영혼을 본인이 끌 수 있다. 이 부분을 보면서 다시 <공각기동대>의 전뇌로 생각이 넘어갔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이야기가 다른 부분으로 넘어간다. 구성도 일반 소설과 달라 솔직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위원왕후가 보낸 이메일을 받은 인물은 리푸레이다. 제국에서 일하다가 도서관으로 전직했다. 리푸레이는 이 소설 속에서 탐정 역할을 맡는다. 그가 보낸 메일 속 문장의 의미와 자살의 이유를 찾고자 한다. 왕후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데는 <타타르 기사>라는 서사시가 큰 역할을 했다. 작가는 이 노벨문학상 수상자 숫자를 2050년까지 중국에서 12명이 받았다고 말한다. 현재까지 2명인데 앞으로 30년 동안 10명이 받아야 한다. 이 정도면 거의 독식이다. 처음에는 이 설정을 보고 국뽕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은 지금 작가가 왜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설정을 넣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최고 권위의 문학상 수상자가 자살을 했으니 정부도 수사를 할 수밖에 없다. 그가 죽었다는 것을 의심하게 된 것도 이동영혼이 의식공동체에 비상경보를 보냈기 때문이다. 리푸레이가 이것을 끄고 술을 마시면서 경고음이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의식결정체의 역할은 아주 광범위하다. 이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하나의 예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부록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리푸레이가 왕후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에 나온다. 제목 <왕과 서정시>는 이것과 관계있다. SF소설의 외피를 가진 채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지만 그 속에는 문자와 서정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가득 담겨 있다.

 

왕이란 명칭을 보았을 때 전제군주를 떠올렸다. 미래에 왕이 통치하는 국가 말이다. 하지만 이 왕은 의식결정체를 만들어낸 제국의 수장을 말한다. 그의 이름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의 기업은 인류의 정보를 관할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왕의 거대한 실험이 조금씩 실체를 보여준다. 재밌는 것은 이 제국의 왕이 과학 전공자가 아닌 문학 전공자였다는 점이다.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한 기술을 발전시키는 기술자의 이미지는 흐려져 있다. 이 부분이 일반적인 SF소설에서 천재 과학자를 등장시킨 것과 다른 점이다.

 

문자. 여기서 문자는 한자다. 표의 문자다. 1부는 4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마다 소제목이 한자다. 설명은 <설문해자>와 <신화자전>에 수록된 것이다. 이 한자들은 내가 이해하는 것과 다른 의미도 꽤 있다.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는 한자들은 한정적이다. 리푸레이는 사용되지 않는 한자를 서글퍼하면서 한 밤중에 술을 마시고 그 글자를 쓴다. 이것이 언어의 서정성과 관계있다. 왕과 위원왕후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게 되면서, 그의 조사가 더 진행되면서 다른 의미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그리고 마주하는 마지막 장면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이 장면들을 보면서 다른 SF소설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이 소설에서 가장 난해한 것은 2부다. 2부를 1부의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기초적 물질이자 재료라고 해석한 것을 보고, 정말 내가 놓친 것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그 자체를 하나의 산문시로 읽기는 했지만 1부와의 연관성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1부에서 말한 언어의 소멸과 하나로 융합됨의 의미를 계속 떠올려본다. 표의문자와 표음문자의 차이는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가까운 미래를 그려내고 있지만 이 속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다. 생각할 거리를 잔뜩 던져준다. 중국 SF소설의 발전에 놀란다. 작가는 이 소설을 SF소설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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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있는
문목하 지음 / 아작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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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SF소설이다. 최근 한국 SF소설을 자주 보게 되는데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당연히 반갑다. 이 소설이 나의 시선을 끈 것은 한국 SF소설이기 때문이다. SF와 판타지, 미스터리를 효과적으로 결합했다는 표현은 그냥 지나가기 힘들게 만든다. 미리보기로 먼저 읽고 그 흡입력에 빨려 들어갔다. 정제된 문장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면들은 멋진 한국 SF소설을 예고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읽으면서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른 이야기들을 만났다. 읽으면서 외국 SF소설 한 편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윤서리. 신입 수사관이다. 비원이란 조직을 비호하는 서형우 팀장의 밑으로 들어간다. 이 비원이란 조직의 특성을 작가는 초반에 잘 숨겨둔다. 비원의 성장을 억제하면서도 결코 깨트리지 않는 서형우의 의도는 쉽게 알 수 없다. 윤서리와 서형우 사이에는 작은 충돌이 있지만 큰 문제없이 넘어간다. 그러다 서형우가 오랫동안 기획한 일이 윤서리의 개입으로 깨어진다. 평소 서형우라면 그녀는 죽은 목숨이다. 대신 그녀를 죽을 수 있는 임무에 투입한다. 장소는 그녀가 살았던 도시다. 그러다 일어나는 일이 이 소설의 첫장이다.

 

윤서리가 살았던 도시는 어느 날 거대한 싱크홀이 생겼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싱크홀 때문에 4만여 명의 시민들이 죽었다. 어마어마한 재앙이다. 이 싱크홀은 정부에서 관리되었고, 싱크홀 주변은 출입제한구역이다. 이 소설은 바로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다. 느와르 같이 진행되던 도입부를 지나면 이 싱크홀이 생기게 된 이유가 설명되어지고, 이 때문에 일어난 사건과 상황들이 이야기의 전면에 나선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두 무리와 이 두 무리 사이에서 이들을 없애려는 조직의 개입이 조금씩 드러난다.

 

정여준. 서형우가 죽이려고 한 남자다. 윤서리는 여준의 정체를 모른다. 암살 부대원으로 그를 죽이기 위해 다시 그 도시로 돌아왔을 때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본다. 그것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서진 건물들이 날아다니고, 깨어지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초능력이 거대한 힘을 발휘한다. 비현실적이다. 왜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 좁은 도시에 머물고 있을까? 이들은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이 의문의 답은 윤서리가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데리고 온 남자의 동료 이찬과 함께 서형우를 만나면서 풀린다.

 

싱크홀이 생긴 원인, 그 속에서 살아나온 사람들, 이들이 가진 능력 등은 하나의 실험에서 비롯했다. 하지만 왜 이런 능력이 생겼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가설만 다룰 뿐이다. 싱크홀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이 두 무리로 나누어져 싸운 이유는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능력을 두려워하지만 결코 극복하지 못할 능력은 아니기에 지역적 제한을 둔다. 재밌는 것은 이들의 능력이 정지자, 파쇄자, 복원자 등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여준의 능력은 정지자이고, 이찬은 파쇄자다. 이런 특정 능력의 극대화가 이루어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데 이것이 소설 속에서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된다. 제목도 여기서 비롯했다.

 

이런 능력을 감안하면 무대가 확장되어야 할 텐데 작가는 무대를 한정적으로 묶어둔다. 외연 확대가 이루어지지 않아 조금 답답한 면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외연을 확대할 수 없다. 더 활기 넘치고 액션이 신나고 재밌을지 모르지만 선택과 시간의 문제를 풀어내는데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 그리고 작가는 윤서리를 꾸준히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녀의 내면을 풀어내기보다 그녀의 동선과 그녀와 관련된 사람들의 심리 묘사에 더 공을 들인다. 최소한 그녀가 전면에 나서기 전까지는 그랬다. 마지막 장면에서 떠올리게 되는 여준의 시간들은 아주 강한 인상을 남긴다. 만약 이 작품이 시리즈로 발전한다면 과연 어떻게 외연 확대를 이룰지, 여준의 시간들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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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지만 죽고 싶지 않아
오키타 밧카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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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자신의 학창시절을 회고하면서 그린 자전적 만화 에세이다. 보통의 작가들과 달리 작가는 태어나면서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아스퍼거증후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학습장애(LD) 등이 작가가 가진 장애다. 1979년 출생인 그녀가 살던 시절에는 이런 장애에 대한 정보가 많이 부족했다. 정보의 부족은 이해의 부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보통의 아이와 다르다는 생각을 부모나 주변 사람들이 했고, 이것이 서로에게 스트레스가 됐다. 특히 어린 아이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집단주의적 성격이 강한 사회일 경우는 더더욱 가혹하다.

 

이런 종류의 장애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신체장애는 눈에 바로 띄는데 정신적 장애는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니면 쉽게 판별할 수 없다. 이 만화의 주인공 소녀 니트로도 장애가 아닌 유별난 문제아로 인식됐다. 그리고 한국도 80년대는 선생들의 폭력이 넘쳐나고, 권위적이었던 시기였다. 일본도 결코 이에 못지않았다. 니트로의 행동은 선생들에게 이해불가의 영역이었다. 착한 선생은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고, 나쁜 선생은 아이에게 직접 폭력을 행사한다. 그 중에서 최악은 아이의 공포를 이용한 성추행이다. 수많은 학교에서 일어난 성추행 중 일부가 어떤 방식으로 행해졌는지 알 수 있는 기회였다.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고 본 이 만화는 앞부분이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그녀가 겪은 지옥 같은 2년을 제외한다면 제3자 입장에서 그렇게 심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그녀의 장애를 모른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보통의 아이처럼 자라기를 바라는 엄마와 선생님의 반응은 늘 봐왔던 것이다. 나도 내 자식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행동을 한다면 이런 반응을 먼저 보일 것이다. 하지만 니트로처럼 계속 행동한다면 이런 행동의 원인을 알고자 인터넷 검색하고, 전문의를 만날 것이다. 안타깝게도 니트로가 살던 시절에는 이런 정보를 구할 수도, 이런 장애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다.

 

동일한 행동의 반복을 고집하고, 타인의 감정에 잘 공감하지 못하는 이 장애는 읽는 동안 니트로를 이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대상들은 이해불가의 존재다. 권위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일수록 이 소녀의 존재는 불편하다. 당연하다는 듯이 폭력이 가해진다. 문제는 이 폭력을 부모에게 알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부모도 이런 폭력에 무감각했다. 자신 속에서 이것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어린 소녀가 자살을 생각하며 자살 방법을 찾아다니는 장면이 나온다. 다른 장면들처럼 그렇게 무겁게 그리지 않아 심각하게 보이지 않지만 그때 잘못될 수도 있었다. 선생의 성추행과 폭행에 죽음을 고민하는 소녀의 마음은 이 책 제목 그대로다. 죽고 싶지만 죽고 싶지 않은 그 감정. 그 떨림. 그 두려움. 그리고 울음.

 

지나간 시절을 그려내면서 많은 무거움을 덜어내었다. 작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그린 에세이고, 그 시기를 잘 이겨낸 듯하여 아주 무거운 이야기가 그렇게 무겁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그 마음속은 어떤지 잘 보여준다. 이것만 보아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좋은 선생님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도 한 극단적인 아이의 삶을 통해 잘 보여준다. 읽으면서 참 많이 분노했지만 ‘그런 마음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더 많았다. 학교와 선생들에 대한 부모의 과도한 반응에 대한 후기는 나 자신도 돌아보게 한다. 이 에세이는 한 시점에서 멈추었지만 후기에 의하면 결코 삶의 힘겨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다음 이야기도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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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일기 (리커버 에디션)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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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롤랑 바르트의 죽음을 음모론 입장에서 다룬 소설 한 권을 읽었다. 기호학자인 그의 글을 찾는 내용인데 난해하지만 재밌었다. 그냥 이름만 알고 있던 그를 처음으로 강하게 인식하는 순간을 그때 처음 가졌다. 물론 그 이전에 롤랑 바르트의 책들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다. 20대 초반이라면 그냥 한 번 읽기라도 했겠지만 요즘은 이런 철학서적들이 점점 어렵게 다가온다. 현대 철학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높지 않은 나의 지식수준을 감안할 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에 약간 겁을 먹기도 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들로 가득한 것이 아닌가 하고. 전혀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생각보다 잘 읽혔다. 분량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1977년 10월 25일 어머니 앙리에트 벵제가 사망했다. 그 다음 날부터 바르트는 노트를 4등분한 쪽지 위에 자산의 감상과 단상 등을 적었다. 이것을 책상 위의 작은 상자에 모아두었는데 사후 이것을 모아 편집해서 출판한 것이 이 <애도 일기>다. 이 쪽지는 하루에 몇 장을 쓴 적도 있고, 며칠을 건너뛴 적도 있다. 분량도 당연히 제각각이다. 이런 외형적인 모습 속에 가장 강하게 녹아 있는 감정은 상실, 아픔, 그리움, 외로움 등이다. 단어와 문장 속에서 그의 아픔과 상실을 발견하고, 적지 않은 부분에서 공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슬픔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가올지 알 수 없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작은 소품에서, 길을 가다가 불쑥 다가온다. 일상 속에서 그는 슬퍼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슬픔 속에 있는 게 아니다. 이 차이가 읽으면서 머릿속에 강하게 다가왔다. 무심코 사용하는 단어가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한 번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슬퍼하는 그는 자주 운다. 어릴 때라면 공감하지 못한 감정이다. 이렇게 쉽게 운다니, 그것도 어른이. 하지만 어른이기에 그 감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그 상실의 늪에서 더 허우적거린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머니와의 공감과 기억들이 많이 쌓여 있어야 할 것이다.

 

죽음. 이 죽음 뒤에 만남이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바르트는 마망을 따라 죽었을 것이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흔히 한다. 이 시간의 흐름이 슬픔의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만’ 사라지게 한다. 그 슬픔은 언제 어떻게 또 자신을 뒤덮을지 모른다. 일상 속에서 그가 겪은 일들을 적은 글들을 보면 이것이 잘 드러난다. 어쩌면 이 상황들 때문에 내가 이 책에 더 공감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일상은 이어진다. 삶이 지닌 무거움과 무서움을 이 문장들을 읽으면서 다시 느낀다. 마망의 사진을 정리하다 또 다른 슬픔을 느끼는 그 감정을 머릿속에서 떠올려본다. 가슴 한 곳으로 조용히 스며든다.

 

프루스트의 글 속에서 자신의 감정과 비슷한 것을 발견한다. 아직 읽지 않은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게 되면 갑자기 이 문장들이 내게 다가올까? 망각이란 없다고 했을 때 하나의 마들렌 냄새로 이야기를 시작한 프루스트의 소설이 떠올랐다. 그는 어떤 것에, 순간에, 상황에 마망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까? 글로 표현된 것에 한정짓는 것은 너무 범위를 축소하는 것 같다. 마망이 살아 있을 때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의 노이로제였다. 마망이 그의 이름을 불렀던 기억은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녀의 걱정들은 우리의 엄마들이 보여준 것과 별 차이가 없다. 다시 공감한다. 1주기에 다시 한 번 마망을 잃을 것을 걱정하는 그를 보면서 격렬하고 강한 슬픔을 느낀다. 누군가의 글처럼 나도 애도할 시간이 오면 다시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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