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계절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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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화려한 수상 이력을 가진 시리즈다. <부서진 대지> 3부작이 모두 휴고 상을 연속으로 수상했다. SF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런 수상 이력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한때 SF 소설이 많이 번역되지 않았기에 이런 수상작이 나오면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헌책방을 뒤지면서 찾아 읽었던 시절도 있다. 이제는 그 시절에 비해 이런 작품들을 구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꾸준히 내주는 출판사도 있고, 인터넷 헌책방에 가끔 올라오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은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으로 거래되기도 하는데 다행히 읽은 책들이 많다. 이제는 상대적으로 그 당시보다 열정이 식었지만 관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흔히 생각하는 SF소설의 설정보다 오히려 판타지에 더 가깝다. 완전히 새로운 대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강력한 초능력인 조산력을 가진 오리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간다. 에쑨, 다마야, 시에나이트가 바로 그들이다. 오리진은 훈련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강력한 능력자의 경우 지진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런 오리진을 모아 교육을 시키는 곳이 펄크럼이다. 이들의 강력한 능력을 제어하는 무리가 있는데 그들은 수호자라고 불린다. 어린 능력자 다마야를 찾아서 펄크럼으로 데리고 간 인물이 바로 수호자 샤파다.

 

오리진의 조산력은 황당한 능력이다. 약간의 제약이 있지만 그 능력이 발휘되면 한 도시가 파괴될 수 있다. 실제로 이 소설 속에서 오리진이 능력을 발휘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가 가끔 나온다. 통제되지 않는 능력이 만들어내는 비극은 한두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십만 단위의 사람이 죽기도 한다. 이 숫자와 능력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왜 이런 종족을 작가는 등장시켰고, 이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었을까? 작가는 이 새롭게 창조된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단어를 만들어 내었고, 이들을 둘러싼 냉대와 음모와 숨겨진 역사를 같이 하나씩 풀어낸다.

 

아들이 오리진이라는 사실을 알고 죽인 남편을 둔 에쑨, 학교에서 친구가 놀린 것 때문에 능력이 발현한 다마야, 펄크럼에서 능력을 키워가면서 고위직으로 가려는 시에나이트 등은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순환적으로 등장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중반이 넘어가면서 조금씩 머릿속에서 윤곽이 잡힌다. 향이라는 개념과 쓰임새라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고, 이들을 로가라고 부르면서 천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말한다. 분명 이들이 지닌 조산력은 통제 가능할 때 축복이다. 하지만 감정이 조절되지 않을 때는 재앙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시에나이트다.

 

시에나이트는 알라배스터의 씨를 받기 위해 그를 찾아간다. 알라배스터는 펄크럼이 교배를 통해 만들어낸 열 반지 능력자다. 시에나이트는 네 반지를 끼고 있다. 이 반지의 개수가 흔히 판타지에서 말하는 몇 서클 마법사와 비슷하다. 펄크럼은 이렇게 인위적인 성교를 통해 오리진을 생산한다. 열 반지 능력자인 알라배스터의 아이들을 얻길 바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 둘의 첫 만남과 성교 장면은 조금 낯설었지만 이 세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이 둘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면서 하는 행동과 만나게 되는 상황은 그 대륙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에쑨. 두 아이의 엄마다. 오리진임을 숨기고 있었지만 아들이 이 능력을 보여줬기에 남편에 의해 죽는다. 이 상실감은 그녀를 끝없이 우울하고 쳐지게 만든다. 만약 다른 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면 삶의 의지가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향은 큰 흔들이 생기면 무너진 향의 향민들 공격과 유입을 막기 위해 튼튼하게 세운 벽 뒤에서 향을 방어한다. 에쑨이 남편과 딸을 찾기 위해 나가겠다고 했을 때 오리진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잘 드러나고, 그녀의 능력이 불러온 재앙을 살짝 던져놓는다. 그녀의 딸 찾기 방랑은 새로운 존재인 스톤이터와 만나게 하고, 소속된 향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준다.

 

다마야. 그녀를 통해 수호자의 탄생 전설이 알려지고, 펄크럼에서 배우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능력을 발현할 때 주변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게 된다. 어린 오리진 소녀가 합숙을 하면서 벌어지는 일들과 새로운 만남은 이 거대한 시리즈의 가장 큰 의문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알려진 역사의 이면을 파헤치는 것은 알라배스터이지만 알려진 역사를 알려주는 역할은 다마야가 한다. 수호자 집단의 힘과 쓰임새가 얼마나 중요한 신분제 역할을 하는지도 보여준다. 다마야가 지도자 신분의 비노프와 함께 작은 모험을 떠났다가 발견한 것과 경험한 것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연결 고리다.

 

기존 과학 지식으로 이 소설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스톤이터나 하늘을 떠돌아다니는 오벨리스크의 존재 등은 비과학적이다. 오리진의 조산력도 마찬가지다. 육 개월 이상 겨울이 계속되면 다섯 번째 계절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이번 책에서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마 이 계절이 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설명은 조금씩 나온다. 그리고 역사를 기록하는 도구로 돌이 이용한다거나 승자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설정은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솔직히 이 첫 권만 보고 제대로 이 세계의 감을 잡지 못했다. 복잡한 감정과 깊고 세밀한 심리 묘사를 통해 낯설 세계에 한 발짝 다가갈 뿐이다. 다음 권을 읽고 나면 에쑨, 시에나이트, 다마야의 삶을 조금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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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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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황정은의 소설로는 두 번째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세 번째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잊고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당시 쓴 서평을 찾아보니 두 번째로 읽은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 느낀 문장에 대한 어려움을 같이 다루고 있다. 실제로 이번 작품을 읽을 때도 앞부분에서는 헤맨 부분이 많다. 집중력의 차이가 불러온 부분도 적지 않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등도 조금 낯설다. 내용 때문인지 아니면 익숙해진 덕분인지 모르지만 두 번째 소설을 읽을 때는 이야기 속에 가려진 부분들 외에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책 제목은 <디디의 우산>이지만 책 속에는 이런 제목의 소설이 없다.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두 편이 담겨 있을 뿐이다. <d>의 경우는 전신이 되는 작품이 있다. <웃는 남자>이다. 이 연작소설에 같이 실렸다면 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d>의 전신인 <웃는 남자>는 <디디의 우산>을 부숴 만든 단편이다.”라고 말한다. 섣부르게 디디를 죽이고 d를 남긴 뒤 빚을 갚는 심정으로 이 책 속 두 중편을 썼다고 한다. 다른 주인공들이 등장하고, 이 두 인물의 연결점도 보이지 않았던 나에게 연작소설이란 표지의 의미를 알려준 내용이다.

 

<d>는 dd의 죽음 이후 이야기다. 반려자의 상실과 삶을 풀어가는 과정은 회색빛이다. 이 회색빛은 세운상가란 건물과 그 속에서 일하는 여소녀란 기술자 할아버지마저 처음에는 삼켜버린다. 전신을 읽지 않아서 사실 d와 dd의 성별을 알지 못한다. 도입부 등을 읽으면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세운상가 택배회사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남자라고 생각했다. 진공관 앰프로 LP판을 듣기 위해 dd에게 보낸 물건을 찾으러 간 집에서 만난 가족을 보면서 dd의 성별이 다시 모호해졌다. 곽정은이 내 동생이라고 칭했지 성별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혹은 그녀가 d에게 보여준 감정은 단순히 d가 냉정하게 보낸 택배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의 관계 때문인지는 이 중편만 가지고는 모르겠다.

 

d는 방황한다. 상실은 삶을 고여 있게 만든다. d가 머문 집에서 주인할머니가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부분은 우리의 역사다. 하나의 배경으로 이 이야기는 계속 등장한다. 그 옛날 한국전쟁 당시의 경험과 북한 조종사의 귀순 등이 그들을 통해 흘러나온다. 이것은 현재의 역사와 마주한다. dd의 책 중에서 혁명을 다룬 책을 보고 원 주인 박조배를 만나 경험하게 되는 명박산성이 대표적이다. 이때를 살았던 내가 읽어도 이 장면은 낯설고 기이하다. 만약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이 고인 공간을 떠나게 만든 것은 주인할머니의 병이다. 사위가 대리인으로 나서면서 d는 새로운 공간과 직장을 찾고, 고인 삶을 정리한다.

 

단순히 일만 반복할 때 관계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만약 여소녀가 ‘나 알지?’란 말을 건내지 않았다면 또 다른 고인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이 작은 접촉이 d로 하여금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새로운 관심을 불어오게 만든다. 더불어 세운상가란 공간이 만들어내는 무거움을 조금씩 걷어낸다. d와 여소녀가 대화를 하고, 짜장면을 시킬 때 외로워만 보였던 이들에게 친구가 있음을 알려준다. 내가 경험했던 활기 넘쳤던 그 시절의 세운상가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 건물은 관리되고 임대되고 다양한 삶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한 인물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많은 의문과 여운을 남긴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도 역시 처음에는 성별 때문에 고민했다. 아직 내 안에 담긴 성별 문제를 그대로 보여준다. 화자와 서수경이 중학생 때 첫 만남을 가졌지만 인연을 만든 것은 1996년 연세대에서 열린 제6회 8.15통일대축전 행사다. 아니 정확하게는 경찰에게 끌려가던 순간이다. 이 짧은 순간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둘은 다시 만나고 같이 산다. 이 중편에서 화자의 이름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가 동성애임을 분명하게 말한다. 이 관계 때문에 생긴 불편함도 여러 부분에서 다룬다. 점점 이런 부분이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화자는 니체에 집착한다. 아니 그가 시력 저하를 겪고 난 후 이룬 업적과 종이와 타자기에 시선을 먼저 준다. 처음에는 뭐지? 했지만 뒤로 가면서 ‘나’가 겪는 문제를 알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앞부분 몇 부분을 제외하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다루면서 이야기가 풀려간다. 화자가 읽고 있는 책과 몇 번 씩 읽어야할 책과 간단한 평가 등은 읽지 않은 책들이 대부분이라 눈길이 갔다. 성차별이 내가 살았던 학창시절과 회사 초년기에 얼마나 심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물론 이 부분은 현재 진행형이다. 화자의 조카가 오줌 누는 자세 때문에 놀림을 받는다는 것을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니체와 책과 함께 정면에서 이 시대의 큼직한 사건을 다룬다. 1996년 연세대에서 분화된 인식의 문제가 그 다음 집회 등에서 어떤 모습을 강박적으로 보여주게 되었는지 말할 때 어색했지만 공감했다. 2014년 세월호 사건, 2016년 촛불 집회와 2017년 3월 10일 대통령 탄핵까지 그 현장을 화자는 수경과 함께 한다. 촛불집회에서 기분 나쁜 경험을 하는데 이것은 이 집회가 하나의 목적으로 모인 것이지 참석자 모두가 같은 정치적 의견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화자는 탄핵의 순간 혁명이 도래했다고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그 혁명을 이루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한다. 거대한 역사의 시간들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한 모습을 녹여내고 이어가는 모습은 내가 기억하고 있던 황정은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었다. 다시 이 작가의 작품들을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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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 카멜레온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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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미치오 슈스케의 소설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그의 초기작들을 좋아한다. 아마 장르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다가 아닌 것을 깨닫고 약간 실망한 적이 있기에 초기작을 더 많이 떠올리는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은 작가 생활 10주년 기념작이자 대중적 요소가 강화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 부분을 읽고 초기작을 떠올렸다. 결과만 말하면 그 당시 작품 성향과 많이 다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문장 등은 내가 기억하는 초기작보다 훨씬 좋지만 초기작들의 강렬함은 조금 떨어진다. 특히 시작하는 부분이 조금 흡입력이 개인적으로 약했다. 하지만 중반 이후로 넘어가면서 쉼 없이 달렸다. 마지막 장면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으로 울컥하게 만들었다.

 

라디오 디제이인 기리하타는 아주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학창 시절 이것이 문제가 되어 등교 거부를 하기도 했다. 이때 그의 친구가 라디오였다. 처음부터 디제이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의 목소리가 그를 이 길로 인도했다. 반면에 목소리와 달리 외모는 볼품없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처음부터 나온다. 이 외모 콤플렉스가 그의 단골 바 IF에 찾아온 미지의 여성을 속이게 되고, 이 속임수가 들통나면서 괴상한 작업에 그를 비롯한 IF의 단골들이 끌려들어간다. 처음에는 영문도 몰랐지만 나중에 알려진 사실은 그 미지의 여성 미카지 케이의 복수극이다.

 

케이가 바 IF에 들어와서 처음 한 말은 코스터였다. 컵받침으로 알아듣고 바의 코스터를 내줬는데 힐끔 보고 다시 나갔다. 그런데 이 바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가 말한 코스터가 다른 단어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말한다. 죽였다는 비슷한 발음의 일본어다. 밖을 내다보니 어디에도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 착각일까? 다음날 그녀가 다시 와서 코스터를 보여달라고 말한다. 이것을 보는 것이 취미라고 말하면서. 그러다 기리하타의 목소리를 듣고, 옆에 앉은 게이바의 남장 여자 레이카의 외모를 보고 설레발을 친다. 생각한 그대로의 외모라고. 기라하타는 레이카에게 대역을 시키면서 케이를 속인다. 이렇게 행동하게 된 속내는 당연히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설픈 연기와 상황은 금방 케이에게 들통난다. 덕분에 이 바의 단골들은 케이가 꾸미는 작전에 동원된다. 이시노자키는 선글라스 하나로 조폭 같은 외모를 풍기고, 기리하타는 알 수 없는 유니폼을 입고 이 작전에 동원된다. 한 명은 쫓는 역할, 한 명은 쫓기는 역할이다. 이 작업 중에 대상자가 차에 치일 뻔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 장면을 보고 다시 그녀가 처음 등장하면서 한 단어가 코스터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누군가를 죽이거나 위협을 가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작업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작전까지 계획된다. 평범한 일상에 작은 파문이 일어나고, 그녀의 사연을 들은 단골들은 적극적으로 돕는다.

 

케이를 둘러싼 작전이 하나의 중요한 축이라면 다른 하나는 기리하타의 라디오 방송이다. 그는 사연을 읽어주고, 그가 들은 이야기를 각색해서 이에 대한 답변을 해준다. 그가 IF에서 경험한 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각색해서 방송할 때도 있고, IF의 단골들 사연을 각색해서 말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읽으면 유쾌하고 감동적이다. 실제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사연들은 작은 쉼터 역할을 한다. 물론 거짓인 경우가 더 많지만 이런 작은 거짓말은 늦은 밤 방송 청취자들을 위로해준다. 34세 모태솔로 기리하타의 숨겨진 재능이 꽃피운 경우다. 이런 작은 거짓말들은 작품 속에서 조금씩 쌓인다. 그리고 마지막에 크게 폭발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진실이 밖으로 드러난다. 이 장면 때문에 앞의 이야기와 상황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투명 카멜레온은 실재한 카멜레온이 아니다. 친구가 가진 카멜레온을 보고 기리하타가 상상한 카멜레온이다.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거짓말들은 이것을 대변한다. 마음의 상처를 감추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이 보여준 행동과 반응이다. 개인적으로 책을 덮으면서 이런 반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떠올리니 강하고 진한 여운으로 다가온다. 몇몇 장면에서는 웃음을 던져주고, 어떤 장면은 안타까움을, 약간의 어설픈 계획과 액션에서는 헛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기리하타의 동정은 어떻게 될까? 중늙은이의 호기심을 쓸 데 없는 곳으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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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항설백물어 - 하 - 항간에 떠도는 기묘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9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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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지 바빠 서평 올리는 것이 쉽지 않다. 시간 짜내기가 이전보다 어렵다보니 읽은 지 며칠 지나서 겨우 쓴다. 상권을 읽은 후 다른 책을 중간에 먼저 읽은 후 하권을 읽었다. 7년 시간을 두고 전작을 읽은 것에 비하면 아주 순식간이다. 이번에도 역시 세 이야기가 나온다. 구성은 상권과 별 차이가 없지만 요지로의 존재감이 점점 커진다. 그것과 함께 작가가 생각하는 요괴의 모습도 같이 풀려서 나온다. 티격태격하는 네 인물의 차이가 눈에 더 들어오고, 사요의 비밀도 한 꺼풀 벗겨진다. 그리고 예상했지만 아쉬운 한 장면을 마주한다.

 

원래 한 권이었던 책이다 보니 진행하는 앞부분은 같다. 누군가 괴담을 끄집어내고, 그 괴담을 조사하고, 토론하고, 잇파쿠 옹까지 가는 과정이다. <산사내>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요괴인지 불분명한 산사내의 아이를 낳은 여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토론은 이 산사내의 존재에 시작한다. 요괴처럼 묘사된 문헌이 나오고, 짐승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된다.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는 대목에 이르면 사람이란 설에 더 무게가 실린다. 이 토론 과정은 인간들이 어떻게 알 수 없는 존재를 마주했을 때 그것을 표현하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가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두 사건이 해결된다.

 

<오품의 빛>은 푸른 백로가 사람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유명한 유학자인 기미후사 경이 어릴 대 직접 이 경험을 했다고 한다. 성인이 된 후 여행을 하다가 한 지역에서 다시 이 경험을 한다. 이 강렬한 기억이 불가사의한 문제를 해결한 겐노신에게 전해지면서 토론으로 발전하고 잇파쿠 옹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기억도 마타이치의 기묘한 행적 중 하나와 연결된다. 희미한 기억 속 존재인 마타이치의 놀라운 능력은 이번에도 빛을 발하고, 그 전설 같은 이야기 속에 숨겨진 아픈 사연이 조금씩 풀려나온다. 모모스케가 요지로에게서 자신과 같은 냄새를 맡는다는 표현이 나오면서 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바람신>은 달빛 어두운 밤 진행하는 백 가지 이야기를 다룬다. 마지막 이야기가 끝나면 재앙을 끌어당기고 요괴를 깨운다고 한다. 이 토론을 진행하는 과정 속에 작지만 재밌는 에피소드가 일어난다. 이 이야기 속에서 사요의 과거가 드러나고, 잇파쿠 옹이 백귀물어에 가담한다.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간략한 제목만 보면 이 항설백물어 시리즈 속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것도 작은 재미 중 하나다. 하지만 진짜 재미는 잇파쿠 옹의 의도와 요지로의 설정이다. 고조되는 이야기와 어두워지는 방과 무대장치가 결합해서 만들어낼 장면을 떠올리고, 이것이 어떻게 표현될지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당연히 반전도 있다.

 

이 책의 구성에 대한 설명이 책 속에 나온다. 겐노신의 이야기는 항상 계기가 모호하고, 들고 오는 화젯거리는 언제나 황당무계하다. 결과적으로 그 이면은 멀쩡한 사건이 숨어 있지만 항상 괴담 종류에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는다는 것이다. 실제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잇파쿠 옹은 괴담에서 과거를 떠올리면서 그 당시 이면을 말하고, 겐노신은 이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찾아 사건을 해결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 해결자의 신분이 바뀐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존재는 공권력이 되었고, 이것은 어느 정도 신뢰가 쌓여가는 과정이다.

 

“요괴는 거짓이지만 있습니다.”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거짓을 거짓인 줄 알면서 믿는다고 말한다. 머릿속에 산타크로스가 지나간다. 우리가 괴담을 즐기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무언가를 이야기해서 속이면 이야기가 된다고 말한다. 이 괴담을 몇 개씩 포개놓아 현실 자체를 속임수의 공간으로 옮기고 되돌려놓는 것이 백 가지 이야기다. 이 문장들을 읽으면서 작가의 다른 작품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 항설백물어 시리즈를 한 번에 읽어보고 싶다. 그러면 지금과 다른 느낌과 재미를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혹시 요지로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작가의 다른 소설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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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성역 1 - 노아즈 아크, Novel Engine POP
카지오 신지 지음, toi8 그림, 구자용 옮김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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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구의 멸망을 소재로 한 SF소설이다. 작년에 읽었던 <세븐 이브스>가 하드SF라면 이 작품은 SF 판타지에 더 가깝다. 지구의 선택 받은 3만 명을 태운 세대 간 우주선 노아즈 아크나 성간 전이 기술을 이용한 점프 등은 현실적 기술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작가가 관심을 둔 것은 이런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제목에서 나온 것처럼 지구를 버리고 몰래 떠난 미합중국 에디슨 대통령 외 3만 명과 이들을 저주하면서 위험한 기술인 점프를 통해 약속된 별로 온 인류의 갈등이다. 아직 이야기의 도입부에 불과하다보니 이 갈등을 극한으로 몰고 가지 않았지만 점프한 인류는 이것을 단결의 동력으로 삼는다.

 

이야기는 3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당연히 점프한 사람들의 생존이다. 172광년 떨어진 약속의 땅으로 인류의 70%가 점프한다. 이 기술을 쉽게 이해하려면 스타트랙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하지만 무려 172광년이다. 자세한 과학으로 들어가면 거의 불가능하다. 별이 고정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물리적 거리도 상상을 초월한다. 이 소설에서 이런 과학적 가능성은 덮어놓고 가야 한다. 대신 이 점프를 통해 정상적으로 도착한 인류가 소수라는 설정과 이들이 낯선 땅에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작가의 상상력은 여기서 과학보다는 판타지에 더 알맞음을 잘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노아즈 아크에 딴 인류다. 에디슨 대통령의 딸 나탈리와 그녀의 연인 이안 애덤스의 로맨스나 노아즈 아크에서 일어나는 일 등은 현실적인 문제를 담고 있다. 인류를 버리고 몰래 떠난 선택 받은 인류의 고민이나 폐쇄된 공간 속의 삶, 계급 차이 등은 그 속에 살고 있는 계층들의 시선을 풀어내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물론 이들은 태양의 플레어 확장에 따른 지구의 소멸을 사실로 믿는다. 처음에는 영상 조작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을 우주선에서 관측한다. 이때 에디슨 대통령이 보여주는 모습은 아주 이중적이다. 세대가 지나면서 이야기는 우주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것으로 바뀐다.

 

마지막으로 지구에 남은 사람들 이야기다. 당연히 작가가 다루는 국가와 사람은 일본이다. 인류의 70%가 점프한 후 남은 이들은 갑자기 바뀐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해피엔드라는 독약으로 자살도 가능하다. 하지만 남은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규칙을 만들고, 서로 돕고, 사랑하고, 남은 시간을 최대한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버섯 따기와 자연 속으로 여행에서 지구를 파괴하는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인구 과밀화 문제가 해결된 지구의 놀라운 재생 속도를 보여준다. 이런 풍경 속에서 행복했던 기억을 가지고 자살 여행을 온 사람도 있고, 이들의 죽음을 보고 다른 미래를 꿈꾸는 사람도 생긴다. 마지막 장면은 일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점프한 인류는 정보가 정말 불충분한 행성에 떨어졌다. 인류의 70%가 떠났지만 실제 도착한 인류는 얼마 되지 않는다. 점프한 곳에서 나무 등과 결합할 수도 있다. 이 과학 기술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점프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원시적인 도구를 만들고, 자신들이 살았던 문명을 다시 일구고자 한다. 하지만 자원이 너무 한정적이다. 다행이라면 중력이나 대기 상태가 지구와 같다. 이런 세부적인 과학 문제는 실제 이 소설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생존을 위해 미지의 존재와 싸우고, 공동체를 구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특히 미지의 존재인 스나크 사냥은 SF판타지를 아주 잘 보여준다.

 

작가의 설정 중 하나인 다른 지역으로 점프한 사람들 사이의 만남은 후반부의 재미다. 서로 오니와 식인이라 부르면서 경계하는 모습은 정보의 부재와 공동체의 결속이란 문제를 동시에 보여준다. 점프할 때 인류가 가지고 온 씨앗에 따라 경작할 농작물이 정해진다. 다양한 인종과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살다 보니 공용어란 것이 만들어진다. 아직 한 세대 밖에 진행되지 않아 그 경계가 멀지 않다. 도구 등을 보면 원시 공동체에 가까운데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설정도 살짝 끼워 넣었다. 다음 이야기에서 어디까지 점프한 인류가 나아갈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 세 곳의 사람들 이야기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한 가지는 같다.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는 행복과 희망이다. 다음 이야기에서 이 두 인류가 만난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모습일지, 그들의 과학 기술 차이가 어느 정도일지, 노아즈 아크에 대한 복수심은 세대를 지나면서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빨리 다음 권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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