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타협 미식가 - 맛의 달인 로산진의 깐깐한 미식론
기타오지 로산진 지음, 김유 옮김 / 허클베리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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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즐겨봤던 요리 만화가 있다. <맛의 달인>이다. 몇 권까지 봤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현재 111권까지 번역 출간되었다. 이 만화에서 주인공 지로의 아버지로 나오는 우미하라를 이 책의 저자인 기타오지 로산진을 모델로 했다는 글을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다. 실제 만화 속에서 우미하라는 엄청난 미식가이자 도예공이고 요릿집을 운영한다. 성격도 얼마나 모났는지, 친아들 지로와 문제가 많다. 로산진도 실제 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유사성은 이 책을 읽으면서 안 것이고, 로산진이란 이름은 여기저기에서 이미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미식가는 아니지만 맛있는 음식에 관심이 많으니 미식가란 이름을 보고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미식가들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들이 있다. 미식을 위해 그들은 엽기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언제나 맛있는 재료와 요리사를 갈구하는 그들을 보면 심한 경우 광기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런 부분이 소설의 좋은 소재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음식 에세이는 꾸준히 나오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런 에세이를 좋아한다. 음식에 대한 기억과 추억, 좋은 식재료를 찾아가는 여정과 그것을 요리하는 모습, 새로운 경험을 섬세하게 풀어낸 문장들, 내가 몰랐던 음식의 맛과 알고 있던 맛의 정보들, 이런 글들이 나에게 재밌게 다가왔고, 나의 삶과 비교하면서 잠시 아련한 감정에 잠긴다. 그런데 이 에세이는 아련한 감정보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을 때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역자가 다섯 장으로 구분했다. 원래 이런 제목의 일본 원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역자가 로산진의 글을 모아 편집하고 번역한 모양이다. 다른 로산진의 글을 읽지 않아 비교할 수 없는데 개인적으로 만족스럽다. 맛과 재료와 미식 등을 아주 잘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맛을 알기 위해서 많이 먹어봐야한다는 표현을 볼 때 미식의 시작은 역시 많이 먹어보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로산진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식기다. 자신이 도예가이기도 한데 좋은 음식을 좋은 식기에 담아내어야 한다고 할 때 처음에는 약간 반감이 생겼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이것은 하나의 즐거운 식도락이다. 아내가 좋은 그릇 등을 탐내는 마음을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좋은 식기와 좋은 식재료를 늘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형편에 맞는다면’이란 전제가 붙어 있다. 요리가 비싼 데는 비싼 재료를 사용하고 그 가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란 논리에 쉽게 수긍한다. 실제 좋은 재료가 있으면 다른 조미료 등이 필요없고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쪽으로 가면 아주 맛있다. 어릴 때는 대구 매운탕을 즐겼지만 지금은 대구 지리를 더 좋아한다. 다른 재료의 맛이 너무 부각되어 대구의 시원한 맛을 즐길 수 없다. 로산진이 좋은 재료와 재료 본연의 맛을 강조한 것에 크게 공감하는 이유도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재료를 제대로 손질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신선하고 좋은 재료가 많으면 다른 특별한 양념이 필요하지 않다. 실제 많은 양념들이 음식이 상해가거나 맛이 떨어지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존재한다. 어떤 조미료의 경우 재료 본연을 맛을 더 강화시켜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신선하지 않거나 맛이 떨어지는 재료를 사용했을 때다. 책을 읽다 보면 지역과 그 지방 특산물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을 자주 본다. 도쿄와 교토를 비교해서 이 두 곳의 차이를 말할 때 자신의 출생지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미식가가 되기 위해 그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미식을 했기에 별다른 병 없이 잘 살았다는 말에 ‘음식이 약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저자가 최고로 치는 맛은 복어다. 사실 나는 복어국의 시원함은 알지만 복어회의 맛은 모른다. 바다에는 복어, 산에는 고사리라고 말하면서 무미라고 했는데 이때 떠오른 한국 음식이 냉면이다. 슴슴한 그 맛. 하지만 조금만 들어가면 강한 육수의 맛을 느끼는 냉면. 더불어 제비집도 같이 떠올랐다. 실제 이런 무미를 지닌 식재료를 다루면서 제비집을 말한다. 궁극의 진미를 찾아 다양한 식재료를 다룰 때 생각하지도 못한 재료를 보게 된다. 그리고 생선 초밥의 명인을 이야기할 때 초밥에서 밥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닫게 되고, 지금 같은 스시집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놀란다. 다양한 오차즈케 요리법을 보면서 머릿속을 스쳐간 것은 한 여름 보리차에 식은 밥을 말고 총각김치와 먹던 기억이다. 이 투박한 음식과 로산진의 화려한 오차즈케가 묘하게 대비된다.

 

한 끼를 때운다는 말을 자주한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아침은 대부분 건너뛰고, 점심은 무리지어 대충 먹는다. 저녁도 제대로 먹기는 쉽지 않다. 로산진이 오늘 먹은 세끼를 말할 때 이미 이 말을 계속 주창한 사람이 떠올랐고, 그의 음식 방송을 들으면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고 배웠는지 알게 되었다. 좋은 식재료를 바로 사용하지 않아 망치거나 손질을 제대로 못해 망쳤던 기억이 떠오른다. 로산진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과 정성을 기우렸는지 말할 때 내가 얼마나 안이하게 음식을 대하고 먹었는지 알게 된다. 나 자신이 결코 미식가는 아니지만 이런 지식들을 머릿속에 품고, 조금씩 실천에 옮긴다면 내 삶에 또 다른 재미와 열정을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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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의 유령 에프 그래픽 컬렉션
베라 브로스골 지음, 원지인 옮김 / F(에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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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이민 온 러시아 1.5세대의 성장 이야기다. 다른 문화 환경에 적응하고, 차별받지 않기 위한 아냐의 노력은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 주류에 포함되기 위한 노력들, 다른 사람과 달라 보이지 않으려는 노력들, 이민자를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마음 등을 그대로 담고 있다. 작가는 이런 행동을 평가하지 않고 아냐의 말과 행동 속에 조용히 녹여내었다. 10대의 심리 상태를 아주 간결하게 표현하면서 한계선을 분명하게 지킨다. 그리고 후반으로 가면서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펼쳐지고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농구팀 숀과 엘리자베스는 공인 커플이다. 잘 생기고 예쁜 이 커플을 보면서 아냐는 질투한다. 숀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등굣길에 이 둘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심란한 상태에서 숲속 길을 걷다가 오래된 우물에 빠진다. 누군가가 찾아오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우물 속에 사람 뼈가 있다. 유령도 있다. 100년 전에 빠져 죽은 아이다. 아니 처음에는 유령의 모습을 보고 아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10대 소녀다. 유령이 지나가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 자는 아냐를 깨워 도움을 받게 한다. 다시 밖으로 나온다.

 

밖으로 나온 것은 아냐만이 아니다. 유령도 같이 나왔다. 뼈 조각이 있으면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움직일 수 있다. 어떻게 그 뼈가 들어갔을까? 유령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아냐를 도와준다. 특히 시험 컨닝에서는 확실한 도움이 된다. 그리고 숀의 정보를 알려주고, 그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점점 더 만들어준다. 아냐 인생에 갑자기 빛이 비춰진다. 쇼반에게 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말했는데 쇼반은 숀의 나쁜 정보만 제공한다. 이 때문에 어쩌면 유일한 친구였던 쇼반과 멀어지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사랑이란 감정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에밀리. 유령의 이름이다. 이 이름을 묻고 알게 된 것은 유령의 도움을 받고 난 뒤다. 그녀가 왜 그 우물에 들어갔고 죽게 되었는지 에밀리에게 듣는다. 그녀의 약혼녀가 1차 대전에서 죽었다는 사실까지. 이 살인 사건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봐주겠다고 하지만 그녀의 관심사는 숀이다. 이런 아냐를 에밀리는 열정적으로 돕는다. 이때부터 유령의 모습이 조금씩 변한다. 이 형태의 변화는 심리와 욕망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숀과 엘리자베스와 함께 파티에 간 아냐는 아주 불편한 사실을 알게 된다. 밖에서 볼 때 완벽해 보이는 커플의 어두운 면도 같이. 여기에 유령의 폭주가 가세한다. 반전이 펼쳐진다.

 

십대 청소년들의 열등감과 불안감을 기본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날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엄마가 만들어준 고열량 음식을 버리고, 같은 이민자 출신인 다미를 멀리 한다. 자신의 성을 숨기기도 한다. 진짜 친구는 한 명밖에 없지만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녀가 이민 온 후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려주는 장면이 도서관에서 다미와 만났을 때다. 이 장면은 다시 다미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할 것을 예상하는 장면과 겹쳐진다. 다미가 체육 시간에 도서관에 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할 때 다미의 불안과 걱정이 살짝 드러나고, 그가 친구를 갈구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아냐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청소년기를 떠올린다. 물론 다른 문화 환경이니 다르지만 짝사랑의 감정은 비슷한 행동을 하게 만든다. 집에서 엄마에게 성질을 부리는 모습은 똑 닮았다. 시대의 변화를 담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은 비슷할 것이다. 이런 섬세한 감정과 행동을 작가는 세밀하고 길게 표현하기보다 간결한 그림과 장면 몇 개로 드러낸다. 그리고 마지막에 에밀리는 십대들의 심리를 잘 말해준다. 그것은 이해해주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이에 아냐는 자신이 경험한 다른 삶의 고민과 불안을 말한다. 그들도 자신과 다를 것 없다고. 이 부분은 이 만화가 한 소녀의 성장을 그린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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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당신들 베어타운 3부작 2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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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이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데 무려 <베어타운> 그 이후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최고 작품으로 손꼽고 그 재미와 감동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말이다. 사실 이번 작품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작 <베어타운>을 읽어야 한다. 물론 읽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그렇지만 전작을 읽고 이번 작품을 읽으면 그 재미와 감동과 여운은 더 오래간다. 전작에서 몇 명의 미래를 알려주지만 이 미래로 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빠져 있다. 삶은 바로 이런 과정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번에도 이야기의 중심에는 베어타운 하키팀이 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정치가 전면에 나선다. 정치인 리샤르도 테오가 바로 그다. 그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것을 철저하게 이용한다. 인맥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 인맥과 지저분한 정치 행동을 통해 뒤에서 목적을 달성한다. 그가 일을 이루는 과정을 보면 정치에 혐오를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들지만 목적을 달성한다는 측면을 보면 아주 유능한 정치인이다. 그가 어떻게 페테르와 그 일당을 대립하게 만들고, 갈등하고 고민하게 만드는지 보여줄 때 현실 정치의 한 모습을 그대로 본다.

 

한 마을의 하키팀이 없어진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일까? 그렇다. 최소한 이 소설 속 베어타운은 그렇다. 베어타운 하키팀은 그들의 삶이다. 아이들이 자라면 하키팀 선수가 되길 바란다. 다른 삶이 있다고 해도 일순위는 하키다. 아맛의 친구가 프로게이머로 나아갈 때 그의 부모가 보여준 모습이 대표적이다. 그들의 삶은 갇혀 있다.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면 다른 삶이, 다른 스포츠가 있다. 하지만 삶은 공간 속에 묶여 있다. 그 공간을 박차고 나가려면 그 곳에 머물지 말고, 더 성장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 결국 이 소설은 성장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의 사건이 터졌을 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보다 비난하는 것이 더 쉽다. 마야의 사건이 일으킨 문제들을 비난자들은 기준점을 옮기면서 비웃는다. 남탓을 한다. 찌질하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다. 한때, 아니 지금도 나에게 이런 모습이 보일 때가 있다. 이런 비난은 갈등을 불러오고, 갈등은 어떤 문제를 만들지 모른다. 순간적인 갈등의 폭발이 만들어내는 비극 중 하나가 이 소설에 나온다. 의도하지 않은 일들이 연속으로 이어지면서 벌어진 비극이다. 어쩌면 작가의 말처럼 기억해야할 특별한 러브 스토리이진지도 모르겠다.

 

생존자. 마야는 자신을 그렇게 말한다. 학교에서 그녀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남겨진 쪽지와 문자와 댓글 속에서 아주 힘겹게 생존한다. 벤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마야에게 한 말에서 그녀가 얼마나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타인의 시선, 암묵적인 무시, 노골적인 욕설 등에 먹히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단어가 생존이다. 전작에서 그녀의 성공을 말했기에 잊고 있던 사실을 이번 소설에서 아주 잘 보여준다. 깨어지기 쉬운 아주 얇은 유리와도 같은 상태의 그녀를 보여줄 때 아나 같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아나는 큰 실수를 한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순간의 실수다. 하지만 이 실수가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인터넷은 순간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공간이다. 그녀가 올린 하나의 동영상은 베어타운에 폭풍을 몰고 온다. 작가는 결국 좋은 쪽으로 이야기를 이어가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하다. 벤이를 믿고 좋아했던 그 일당들이 보여준 반응이 대표적이다. 마야가 아나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도 그녀 자신이 피해자였기 때문에 겪었던 일을 아나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검은 재킷을 입은 일당에 대한 이야기가 이번에 전면에 나온다. 티무와 그 일당들이다. 훌리건이지만 베어타운 사람들에게는 좋은 이웃이다. 하나의 모습에서 나쁜 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나쁜 모습도 같이 본다. 정치인은 이것을 이용하고, 하키팀 단장은 이 문제로 고민한다. 하지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이들도 누군가의 가족이다. 작가는 이 부분을 아주 잘 포착해서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눈시울을 붉힌 것도 이 대목들이다. 그 속에 우리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친구의 집을 찾아와 서로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 진한 감동이 몰려온다.

 

정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궁금한 것도 있다. 베어타운과 헤어의 두 번째 경기 결과다. 이 마을에서 자란 아이들이 상위 리그로 간 후의 이야기다. 아맛이 성공한 후 그가 자란 동네 아이들의 삶이 어떻게 될지 작가는 결코 장밋빛으로 그리지 않는다. 현실을 그대로 요약한다. 전지적 시점으로 미래의 삶 일부를 알려주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니까. 청소년들은 이 소설 속에서 점점 자라는 모습을 보여준다. 보보도, 빌리엄도 조금씩 성장한다. 남탓하기보다 자신에게 더 집중하면서 생긴 변화다. 배크만은 말한다. “삶은 항상 공평하고, 항상 불공평하다.”고.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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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란 - 오랑캐, 난을 일으키다
김은미 지음 / 채륜서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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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이 돋보이는 역사 소설이다. 물론 작가의 상상력은 역사의 가능성을 살짝 열어 펼쳐보인다. 사실 이 가능성에 큰 무게를 두고 싶은 마음은 없다. 포로로 잡힌 한 여인이 경험하는 일들이 그렇게 크게 현실성 있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가능성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일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다만 이 소설 속에서 허임의 딸로 등장하는 윤성의 존재가 너무 큰 것은 시대와 상황에 비춰 너무 로맨스적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너무 유명한 장면이지 않은가.

 

호란이라고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가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생긴 전란이다. 광해군의 외교 감각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반정으로 몰고 간 정치 세력은 굴욕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사대주의가 백성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는 50만 노예란 표현에서 알 수 있다. 그 당시 조선의 인구가 얼마나 되었겠는가. 후금에서 청으로 발전하는 여진족의 발전은 단순히 한 위대한 지도자의 등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 국제 정세와 맞물려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작가는 이 부분을 글 속에서 아주 잘 녹여내었다. 사실 이 부분들을 읽을 때 소설이란 느낌보다 간결한 역사서를 읽은 듯한 느낌이었다.

 

허윤성, 봉림대군, 도르곤, 효장태후 등이 주요인물이다. 이 시대의 분위기를 가장 잘 요약해서 알려주는 인물은 도르곤의 노예로 잡혀온 량량이다. 여진족에서 속환되어도 관노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누가 지배자가 되어도 관계없는 민초의 속마음이다. 실제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을 기득권층의 세뇌일 뿐이다. 물론 지배 민족의 일원이 된다면 다른 것을 더 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리는 것은 역시 백성이다. 역사서에 숫자로만 기록된 바로 그들이다. 전쟁은 이들을 숫자로 기록하고, 평화는 이들의 죽음을 하나의 기록으로 다룬다. 우리에게 평화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다.

 

누루하치, 홍타이지, 도르곤으로 이어지는 세대교체와 청의 명나라 정복 과정을 빠르고 간결하게 그린다. 빠른 시간의 흐름 속에 중요한 역사적 사실만 요약해서 집어넣었다. 이 과정 속에 네 사람들의 관계는 엮이고 꼬인다. 평민인 윤성을 옆에 두고 자신의 정신 질환을 돌보는 도르곤, 윤성의 대찬 모습에 위안을 얻는 봉림대군, 정략결혼으로 황제의 후비가 되었다가 태후까지 올라간 다위얼 등의 관계는 표면적인 로맨스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은근히 그 관계가 스며든다. 이 은근함이 어느 순간 폭발하는데 이것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뭐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의문을 작가의 상상력이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그 당시 동북아 국제 정세를 아주 잘 표현한 것이다. 이 시대를 처음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많은 도움을 줄 것 같다. 청의 도르곤을 주요 인물로 내세운 것은 실제 그가 명을 정복했기 때문이자 죽음에 의혹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도르곤의 어머니가 죽게 된 이유와 그가 전쟁에서 느끼는 중압감을 질병으로 풀어놓고, 이 질병을 치료하는 인물로 초보 침술가 윤성을 등장시킨 것은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이다. 작가의 이력에 한약학과 졸업과 허임에 대한 글을 쓴 것이 보이는데 이것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한때 북벌을 주장한 효종에게 강하게 끌린 적이 있다. 하지만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 주장은 단순한 의지의 표현일 뿐이다. 실제 군대를 키워 청에 도전했다면 강희제 등으로 이어지는 청의 성세기에 조선은 두 번의 호란보다 훨씬 강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불운한 소현 세자의 삶은 이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 나라의 임금과 대제국의 실세에게 구애를 받는 윤성의 존재는 결국 사랑이란 감정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실제 한 여인이 역사의 전면에 나설 기회는 없고, 그 가능성도 없다. 효장 태후처럼 직접 권력과 맞닿아 있다면 다르겠지만. 이전처럼 몇몇 아쉬운 대목은 있지만 한 시대의 역사를 이렇게 재밌고 현실적으로 잘 요약하고 풀어낸 것은 박수를 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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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가족
오에 겐자부로 지음, 오에 유카리 그림, 양억관 옮김 / 걷는책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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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읽었다. 에세이로 한정한다면 처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읽은 <개인적 체험>이나 이후 나온 몇 편의 소설은 솔직히 끔찍하게 재미가 없었다. 그 당시 나의 수준에서 그의 소설은 난해하고 천천히 그 문체를 따라갈 마음이 전혀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우연히, 아니 전적으로 허영심 때문에 다시 읽은 소설과 단편집은 어렵게만 느껴졌던 오에 겐자부로의 장벽을 조금씩 허물어주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차분하게 음미하면서 읽고 싶은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에세이는 그의 장남 히카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미 다른 책에서 히카리가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음악을 한다는 사실도 역시. 그의 소설 속에서 히카리를 등장시킨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에세이의 몇 편은 이전에 읽었던 소설의 기억과 맞물려 자전적 소설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서 자신의 경험을 소설화한 것이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함없이 간결하지 않은 문장과 난해한 문체는 집중력을 요구한다. 분량을 생각하고 빠르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역시 착각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시각이 예전에 비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 이 에세이가 나온 1995년 일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그 당시 나의 인식도 그렇게 좋지 않았다. 지적 능력에 문제가 있고, 간질 증상까지 있다면 그 가족은 더 힘들 수밖에 없다. 단순히 힘들고 불쌍하다는 생각에 머문다면 이런 에세이가 나올 수 없다. 여기에도 회복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다양한 사람들 사례로 알려주고, 자신의 경험을 같이 녹여서 보여준다. 물론 이 과정이 힘들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히카리와 백화점에서 있었던 사연은 이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앞까지 잘 보여준다.

 

작가가 많은 부분에 공을 들이는 부분은 히키리가 음악을 한다는 것과 그의 독특한 표현법이다. 클래식 음악에 집중하면서 작곡을 하고, 이 책을 발간할 당시 이미 두 개의 CD를 내었다. 이 CD를 낼 때도 아버지는 자신의 감상을 그 속에 담아놓았다. 마지막에는 산토리홀에서 히키라가 작곡한 곳을 연주할 기회마저 얻게 된다. 이 사실을 둘러싼 강한 질타나 지적에 대해 그는 한 장애인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답변을 보여준다. 단순히 결과가 아니라 자식의 삶을 함께 경험하면서 성장을 본 부모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물론 유명세가 한몫했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가족 이야기는 그의 소설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 에세이에서 할머니의 치매 증상이 같이 나온다. 히카리가 어린 시절 할머니가 큰 도움을 주었다면 그가 큰 후는 퇴행기에 접어든 할머니의 치매 증상이 또 다른 문제로 나타난다. 오빠 때문에 속 깊은 딸은 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고, 어머니는 장애가 있는 아들과 할머니까지 돌봐야 한다. 이때 작가가 집에 있으면서 잠시 도와준다고 해도 이 일들 대부분은 아내의 몫이다. 그가 여행을 떠났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더 분명해진다. 그의 글이 우리를 즐겁게 만들어 줄 재료를 제공한 시간이 다른 가족에게는 또 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유명 작가의 삶이지만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그의 작품들이 많이 팔렸겠지만 일상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기는 쉽지 않다. 요즘 많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말해지는 무라카미 하루키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꾸준히 글을 썼고, 예순을 앞둔 몇 년 동안 가족과 회복이란 주제로 이 에세이를 썼다. 자신들의 경험을 알리기 위해 방송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들이 이 에세이에 그대로 녹아 있다. 다만 그 표현이 완곡하지만 담백하다. 그리고 이 에세이에는 그의 아내가 그린 그림들이 실려 있다. 그의 아내란 사실을 모르고 그 그림을 볼 때 혹시 했는데 사실이었다. 작가의 장편 3부작 중 마지막 장편을 아직 읽지 않았는데 올해는 도전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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