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밀리언셀러 클럽 147
야쿠마루 가쿠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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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마루 가쿠란 이름이 왠지 입에 잘 붙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아주 잘 기억한다. 첫 작품인 <천사의 나이프>는 그 당시 많이 다루어지던 소년 범죄를 소재로 했었다. 나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일본 추리소설들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눈길을 주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피해자 가족들이다. 이런 소설에서는 늘 피해자 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복수심 등이 나온다. 이와 더불어 다루어지는 것이 가해자의 감옥에서 나온 후의 삶이다. 용서와 복수란 피해자 가족의 선택이 자연스럽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 연작단편집도 작가가 첫 작품부터 다루어왔던 소년 범죄와 피해자 가족을 소재로 한다.

 

사에키 슈이치. 이 연작단편집의 주인공이다. 그는 15살 생일날에 17살 누나가 강간 살해당한 것을 발견했다. 이 사건은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처음이 경찰학교에 들어간 것이고, 두 번째가 경찰이 되어서 강간하려는 범인의 입에 총구를 집어넣은 것이다. 당연히 경찰에서 짤린다. 이후 호프 탐정 사무소에서 조사원으로 일한다. 소장은 전직 경찰인 고구레다. 적은 임금을 받고 그는 열심히 일한다. 그러다 한 의뢰를 받는다. 11년 전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찾아달라는 것이다. 찾으니 그를 용서해도 될지 알려달라고 한다. 첫 에피소드 <악당>은 이렇게 풀려나왔다.

 

연작단편에서 다루는 이야기들은 모두 소년 범죄나 성범죄와 살인 등이다. 모든 이야기는 호프 탐정 사무소에 어떤 사람을 찾아달라는 의뢰에서 시작한다. 이 의뢰와 동시에 슈이치의 개인적 조사도 같이 진행된다. 그의 조사는 당연히 누나를 강간 살해한 세 명의 남자들의 현재다. 그가 가장 먼저 찾아낸 다도코로다. 그는 라면 전문집을 하면서 잘 살고 있다. 슈이치는 그의 주변을 맴돌며 감시하고 조사한다. 건실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퇴근 후 술집으로 가서 술을 마시고 2차를 간다. 이곳에서 그는 후유미라는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다도코로에 대한 정보를 그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슈이치에게는 이 여자가 정보원이다. 그녀는 슈이치를 좋아한다. 이 차이는 잔혹한 현실을 반영한다. 그 진심이 슈이치에게 전달되기 전까지는.

 

슈이치가 누나의 살인자들을 조사하는 것이 하나의 흐름이라면 사무소의 의뢰는 작가가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주제에 대한 냉혹한 현실이다. 의뢰인들은 대부분 피해자 가족들이다. 그들은 가해자의 현재와 그의 삶을 알고 싶어 한다. 여기에 살짝 발을 담구는 부류가 있다. 가해자를 변호했던 변호사다. 하나의 사건을 가해자, 피해자 가족, 변호인, 조사원 등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아주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악당들의 현재 모습을 보여준다. 흔하게 보던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사죄하는 가해자가 아닌 변함없이 남의 약점을 이용하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악당을 말이다. 그리고 15년 전 사건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슈이치가 있다.

 

야쿠마루 가쿠의 소설은 가볍게 읽을 수 없다. 다루는 주제가 무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은 빠르게 잘 읽힌다. 재밌다. 그리고 불편하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사람들 대신 현실의 악당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악당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비율이 절대적으로 적을 뿐이다. 불편함은 여기서 비롯한다. 사회의 법률이 너무 약한 것이 아닌가 하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감옥에서 조금이나마 빨리 나오기 위해 온갖 반성의 글을 가짜로 쓴다는 악당의 말은 아주 현실적인 표현이다. 가해자의 변호인이었던 사람이 피해자 가족으로 변한 후 자신의 삶을 새롭게 보았다는 부분은 우리가 얼마나 허약하고 불안한 존재인지 대변한다. 이런 대사들이 나올 때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라면 어떨까? 하고.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이성적이고 냉정한 판단과 논의가 필요한 주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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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일색 김태희
김범 지음 / 네오픽션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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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그냥 지나칠 뻔 했다. 이 얼마나 유치한 제목인가! 그러다 작가 이름을 봤다. 김범. 몇 년 전 <공부해서 너 가져>란 소설 한 편으로 나를 사로잡은 작가다. 어지간해서는 한 번 읽은 작가의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 작가의 작품은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간단하게 읽은 책 소개 글은 아주 반어법적이었다. 천하일색이란 단어가 무색하게 그녀의 외모는 평범 이하였다. 이런 그녀가 연하의 성형외과 의사인 멋진 남자와 연애를 한다니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지 궁금했다. 또 어떤 반전이 펼쳐질까 하는 호기심도 자극했다.

 

36살의 성우인 김태희는 서울대 출신의 미녀 김태희와 동명이인이다. 동명이인으로 인한 에피소드는 차고 넘친다. 재작년에 끝난 <별에서 온 그대> 이후 도민준이란 이름만 나오면 모든 사람의 시선이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이제 식상할 정도다. 유명인과 동명이인인 경우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김태희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학창시절 미녀 김태희와 비교되었다. 다행히 공부는 잘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천하일색 김태희’라는 놀림을 받았다. 읽으면서 나쁜 놈들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 나이의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찰스 리.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다. 평소 전철을 타고 다니지 않는데 일이 생겨 탔다. 그곳에서 그는 꿈에도 그리던 이상형의 여자를 발견한다. 바로 천하일색 김태희다. 변태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중이었던 그녀다. 성추행에 대해 그녀는 당당하게 말한다. 얼굴도 못생겼고, 몸매도 과체중인 그녀지만 괴롭다. 이때 도움을 준 인물이 찰스 리다.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가 그녀에게 빠질 줄은. 그의 이상형이 <닥터 지바고>의 라라인 것을 감안하면 도저히 얼굴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성격과 행동은 비슷한 점이 많다. 찰스는 그것을 간파한 것인지 모른다.

 

못생긴 김태희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우면서 외모지상주의를 꾸짖는다. 나도 이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강남형으로 성형한 여자들이 지나가면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간다. 가까이에서 보면 그 부자연스러움에 질리지만 윤곽이 뚜렷한 외모에는 나도 모르게 반응한다. 마눌님 말대로 속물이다. 이런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면 잠시 반성을 하지만 또 고개가 돌아가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하지만 못생겼다고 해도 있는 그대로의 그녀들을 보는 법을 배웠다. 연습과 노력을 결과다. 아니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던 미의식의 일부를 되찾은 것이다. 아닌가? 미의 기준이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는 시대에 한 개인의 모습을 존중한다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물론 아직 완전히 배운 것은 아니다.

 

찰스의 배경은 화려하다. 대학 총장인 아버지와 대기업 대표이사인 어머니에 자신도 의사다. 그것도 아주 잘생긴 연하다. 이런 그가 김태희에게 세 번만 만나자고 했을 때 그녀가 진심을 느끼기는 무리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외모는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라디오 방송에서도 밀리게 한다. 그녀에게 좋은 선배였던 박진국이 잘 가공된 고공주에게 빠져 구차한 변명을 내려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성격이니 실력이니 하는 것을 가볍게 밟고 지나가는 것이 가끔은 외모다. 목소리가 좋으면 되는 라디오인데도 말이다. 이때 찰스가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킨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사랑을 다룬다. 연인들의 사랑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사랑도 같이 다룬다. 이 가족들의 사랑을 작가는 약간 미화한다. 한 편으로는 극단적인 소유욕으로 표현한다. 비현실적인 설정들이 몇 개 나오는데 그냥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글 전체가 무겁지 않다보니 빠르게 읽을 수 있다. 전개도 빠르다. 특히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아주 멋지다. 재미의 대부분이 바로 캐릭터에서 비롯한다. 이 둘의 사이를 두고 만들어지는 소문들은 우리가 흔히 내뱉는 말들이다. 읽으면서 뜨끔했다. 경쾌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비판이 많고, 유머도 넘쳐난다. 대표적인 것이 마지막 대사다. 남자의 진심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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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 2부 암흑의 숲
류츠신 지음, 허유영 옮김 / 단숨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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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삼체>가 번역되어 출간되었을 때를 기억한다. 촌스러운 표지에 중국 SF란 소개글이 나의 관심을 완전히 접게 만들었다. 중국의 유명한 작가란 설명이 있었지만 홍보는 어디까지나 홍보라고 생각했다. 이런 와중에 인상에 강하게 남은 것은 역설적으로 표지다. 가끔 이 책에 대한 좋은 평가를 보았지만 중국 SF영화의 인상이 남아 있어 그렇게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다 놀라운 소식을 보았다. 2015년 휴고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때 그냥 촌스러운 표지를 가진 못 믿을 중국 SF소설이 신데렐라처럼 변했다. 그렇게 <삼체>를 고이 사셔 모셔두었다.

 

이 책을 읽기 전 <삼체>를 찾아 먼저 읽으려고 했다. 3부작의 2권부터 읽기를 그렇게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더미에서 1권을 꺼내기가 귀찮았다. 2권이 700쪽이 넘는 것을 생각하면서 1권도 이 정도 분량이라는 짐작을 한 탓에 더 귀찮았다. 그냥 읽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는 느린 전개와 지극히 중국적인 설정이 눈에 거슬리고, 1권의 내용을 모르다 보니 생기는 정체를 겪었다. 피곤한 몸상태도 한몫했다. 이 거대한 설정과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교차하면서 머릿속에 하나씩 쌓아가다 보니 쉬운 독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가다가 어느 순간 빠져들었다. 속도가 붙고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지 궁금해졌다.

 

이 소설의 설정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시 삼체의 세계에서 온 지자들이다. 지구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이 지자는 인류의 과학이 진보하는 것을 막고 있다. 보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이 알 수 없는 것은 딱 하나다. 사람의 생각이다. 생각은 그 사람 고유의 것이다. 모든 것이 투명한 지자들에게 사람들이 가진 속임수는 아주 낯선 것이다. 이미 삼체 세계에서 지구를 향해 함대가 출발하였다. 400년이 지나면 지구에 도착하여 멸망으로 이끌 수 있다. 이 예정된 종말을 피하기 위해 인류는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시도한다. 바로 면벽 프로젝트다. 4명의 면벽자를 선택하여 다가올 삼체 함대에 대항하려고 한다. UN은 이들을 위해 무한대에 가까운 지원을 한다. 4명의 면벽자가 공표되는 순간 이 프로젝트는 시행되었다.

 

4명의 면벽자 중 뤄지가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이끌어 나간다. 다른 세 명도 자신의 역할을 하지만 그들이 하는 행동은 모두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에 더 가깝다. 그들은 기초 과학의 발전이 한계 지어진 세계 속에서 선진 우주 문명의 함대와 싸워야 한다. 당연히 패배주의와 종말의 공포가 세계를 지배한다. 면벽자들은 하나의 희망이다. 세계의 거대한 자본이 이들을 지원한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방식은 기존 과학을 기초로 해야 하는 한계가 분명하다. 한계가 주어진 상태에서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을 옆에서 지켜보는 지자까지 있다. 여기에 지자를 추종하는 무리 ETO까지 있다. 이들은 면벽자를 저지하기 위한 파벽자를 보낸다.

 

이 거대한 설정 중에서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왜 뤄지가 면벽자로 뽑혔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놓친 것이 아니라면 충분한 설명이 없다. 그리고 지자는 뤄지를 죽이려고 한다. ETO가 저격을 하지만 방탄복 때문에 산다. 1편에 나왔다는 스창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뤄지가 우주사회학이란 학문을 만들지만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지자들이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를 죽일 이유가 없어 보인다. 뭐 면벽자로 뽑힌 것 자체가 의문이지만. 물론 다른 세 명은 대단한 이력의 소유자들이다. 이들이 거대한 자본으로 자신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반격을 준비하지만 파벽자들을 만나면서 그 숨겨진 의도는 간파된다. 알 수 없는 사람은 뤄지가 유일하다. 사실 이 메시아적 설정이 눈에 살짝 거슬렸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이야기 속에서 작가의 과학 지식은 아주 큰 힘을 발휘한다. 어느 부분에서는 아서 클라크의 작품이 연상되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는 과도한 상상을 자제한다. 대표적인 것이 삼체의 함대가 지구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함대의 비행 속도가 광속에 가깝다면 몇 년이면 도착할 수 있는데 400년의 시간이 걸린다. 이 설정이 인류에게 절망과 동시에 희망을 안겨준다. 희망은 가끔 착각을 불러와 현실 인식을 방해한다. 이 소설의 후반부는 이 부분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냉혹하고 조금의 주저함도 없다. 현실적인 모습 뒤에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희망을 남겨둔다.

 

분량만 놓고 봐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하드 SF의 모습을 보여주는 와중에 인류에 대한 냉혹한 모습을 기본으로 깔아놓는다. 대표적인 것인 도피주의에 대한 각국의 반응이다. 내가 살지 못하면 너도 죽는다는 발상이다. 생존을 위해 인류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냉정한 판단도 나온다. 이런 부분이 나올 때 작가가 세계를 보는 시각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뤄지를 최후의 희망으로 남겨둔 것은 조금 과한 설정이 아닌가 한다. 작가의 작품 중에 한 편도 그런 것을 보면 영웅에 대한 환상이 조금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3부작 중 겨우 한 권이자 2권만 읽은 상태에서 이 시리즈를 온전히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정도로 과학에 정통하면서 거대한 규모를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것은 대단하다. 예전에 기대했던 한국 SF 작가들의 부진을 생각하면 중국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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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만찬
올렌 슈타인하우어 지음, 권도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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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만 보고는 무슨 내용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원제목을 봐도 그렇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제목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것은 2006년 빈 공항 테러 사건 이후 서로 사랑했던 두 연인이 6년 만에 만나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 심리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일 때문에 갑자기 헤어진 전 여자 친구를 만나러 온 헨리의 로맨스 정도로 생각했다. 그가 보여준 셀리아에 대한 감정과 표현들이 살짝 나의 이성을 흐려놓았다. 물론 이 만남이 단순한 과거의 추억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업무가 주된 것이다. 하지만 감정은 언제나 어떻게 튈지 모른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헨리와 셀리아가 번갈아서 화자로 등장하고, 마지막에 두 사람이 같이 화자가 된다. 헨리가 현재 시점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면 셀리아는 과거 속에서 현재로 넘어온다. 모든 사건은 바로 이 과거 속에 있다. 바로 2006년 빈 공항에서 있었던 이슬람 과격단체의 비행기 납치 사건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사건으로 비행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죽었다. 이것이 헨리와 셀리아 모두에게 강한 트라우마가 된다. 특히 셀리아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고, 일을 그만두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작가는 이 과정을 아주 건조하게 풀어낸다. 이 건조함 속에 진실은 단편적으로 표현되고,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이어간다.

 

헨리가 갑자기 셀리아를 찾아온 것은 2006년 빈 공항 사건 당시 있었던 미 대사관 내부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다. 납치된 비행기 속에는 정보 요원이 있어 문자로 정보를 보내주고 있었다. 하지만 언론이 생방송을 하는 상황에서 특수부대가 작전을 펼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상황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는 이 단체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씩 흘러나온다. 이 과장에 작가는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설정이나 어떤 액션도 넣지 않았다. 실제 상황이란 점을 제외하면 일상적인 삶의 풍경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지만 실제 무대와 그 뒤에서 벌어지는 정보전은 조금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6년 만의 재회는 약속이란 이름의 레스토랑에서 벌어진다. 셀리아가 선택한 식당이다. 오랜만에 만난 두 연인은 가벼운 이야기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일상적인 모습이다. 이 모습 뒤에는 서로 다른 숨겨진 의도가 있다. 솔직히 후반부로 가기 전까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 사이사이에 현재의 삶이 드러나고, 옛 감정이 흘러나온다. 여기에 휩쓸리면 작가가 살짝 풀어놓은 함정에 빠진다. 특히 헨리의 감정에 빠지면 더 심하다. 나는 그의 손길과 추억에 빠졌다. 그러다 예상하지 못한 문장을 읽고 놀랐다. 뭐지? 숨겨진 다른 의도가 있나, 하고. 이것은 작은 시작일 뿐이었다.

 

셀리아는 현재 두 아이의 엄마다. 그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와 결혼했다. 당연히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진실은 그녀만이 안다. 이야기 후반부는 바로 이것에 대한 설명이자 이 소설의 백미다. 그녀가 발견한 한 통의 전화가 모든 것의 시발점이다. 이 전화 때문에 연인과 직장을 떠나야했다. 이 한 통의 전화가 빈 공항 사건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127명의 죽음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평생 이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야 한다. 꿈속에서 자신의 아이들이 이 상황과 연결되는 일도 일어난다. 이렇게 진실은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다가온다. 사랑의 이름을 가지고.

 

무슬림과 테러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이것이 주된 내용은 아니다. 실제 중요한 것은 약속 레스토랑에서 만난 두 남녀의 심리전이다. 현재와 과거는 어느 순간 만나게 되고, 진실은 이 둘의 충돌 속에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만든다. 각자가 가진 패를 숨겨놓고 싸우는 둘의 모습은 그냥 평범하기만 하다. 그래서 마지막이 더 인상적이다. 제목 그대로 배신의 만찬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긴장감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잘 짜인 구성 속에서 스파이의 직업과 인간의 본성 중 한 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식으로 연출할지 궁금하다. 결말이 어떻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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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아마레 로망 컬렉션 Roman Collection 6
문형렬 지음 / 나무옆의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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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순결한 사랑 이야기가 관능적인 사랑의 형식과 결합해 새롭게 구성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글을 읽고 이 책의 구성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이해는 나의 한계 밖이었다. 관능적인 경험이 과거의 순결한 사랑 이야기 기억을 되살려주는 역할을 하지만 그 연관성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두 개의 이야기를 무리하게 연관시키지 않고 사랑의 두 극단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설정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가 더 쉬울까? 이 소설이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보여준 변화는 나에게 그만큼 낯설었다.

 

첫 시작을 여는 암스테르담 아마레 카페에서 벌어지는 일을 관능적이고 철학적인 문장으로 표현되었다. 퇴폐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장면들이 나온다. 하지만 작가는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장으로 이 장면을 난해하게 만든다. 인간이 가진 본능 중 하나를 극단으로 밀어붙여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대목들을 읽을 때 난해하고 힘들었다. 얼마나 에로틱한 장면들이 나올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물론 에로 소설 같은 장면들이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장 순수한 청춘의 사랑 이야기라니. 그것도 고전적인 주제인 병자와의 사랑 이야기다.

 

암스테르담을 무대로 국제 금융과 관능적인 사랑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는데 귀국 비행기에서 열병을 앓으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10년 동안 잠들어 있던 하나의 기억을 떠오른 것이다. 플로라 서인애와 유스토 한수명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일기장이다. 플로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고, 인간의 힘으로 그 병을 나을 수 없다는 판단에 신의 도움으로 병을 낫고자 신학대학에 들어간 유스토의 사랑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화자는 이 두 연인의 증인으로 이들이 만남이 있던 곳에 함께 있었다. 플로라의 병은 진통제가 없다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다. 유스토를 만나기 위해 많은 양의 약을 먹고 온다. 그녀를 잠식하는 병의 무거움도, 두려움도 그와의 만남이 주는 행복을 막을 수 없다.

 

이 둘의 한계가 분명한 사랑 이야기는 신학의 테두리 안에서 이어진다. 신부가 되고자 신학 대학에 간 유스토와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플로라의 사랑은 한시적이다. 물론 모든 사랑이 한시적이다. 하지만 이 둘의 사랑은 세기의 사랑으로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그 순수함과 열정을 놓고 본다면 말이다. 이들의 사랑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은 각자의 위치에 따라 다르다. 작가는 이 중요한 부분을 간결하게 처리한다. 짧은 분량의 소설에서 이 부분을 깊이 있게 다루기는 쉽지 않다. 어떻게 보면 통속적인 면도 있다.

 

취향을 많이 탈 소설이다. 개인적으로는 맞지 않다. 현학적인 글을 좋아하지만 살짝 겉만 맴돌다가 머문듯한 분위기다. 그리고 플로라가 유스토에게 쓴 편지의 어투 등은 낡았다. 이 소설이 80년대에 나왔다면 그녀의 편지에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르지만 2000년대에 쓰기에는 너무 옛말투다. 미스터리로 풀어낼 수 있었던 플로라의 일기장에 대한 의문도 너무 쉽게 풀린 것도 약간 힘을 빠지게 한다. 현실적일 수 있지만 다른 장치들을 감안하면 설명이 부족하다. 특히 김일영의 이야기 부분에서. 쿼크의 여섯 가지 종류에서 따온 제목도 나의 이해를 넘어선다. 소설 속에 이 부분에 대한 해설을 내가 놓친 것인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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