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프트 - 고통을 옮기는 자
조예은 지음 / 마카롱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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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옮기는 능력자 이야기다. 자신의 몸을 통로로 사용하여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질병을 자신이나 또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다. 이 전이능력이 누군가에게는 축복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저주일 뿐이다. 축복은 그 고통과 질병을 넘겨준 사람들이고, 저주는 그것을 받는 사람이다. 실제 이런 능력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 능력자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 이 소설처럼 악당들에게 끌려가 돈벌이로 이용되면서 사육당할 것이다.

 

소설은 두 인물의 시점으로 이어진다. 하나는 찬의 능력을 본 이창 형사고, 다른 하나는 찬의 능력을 전이받은 동생 란이다. 이창 형사는 조카를 살리기 위해 사이비종교 천령교 교주를 찾아다닌다. 자신의 누나가 교주에 의해 병이 완치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교주의 능력은 가짜지만 찬의 전이 능력이 이것을 기적으로 만든다. 이 사실은 모르는 형사는 열심히 교주만 찾을 뿐이다. 그러다 한 폐건물에서 시체 한 구가 발견된다. 그가 바로 사라진 천령교의 교주였던 한승목 목사다. 절망에 빠진 그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이야기가 들린다. 교주의 능력이 아니라 찬의 능력이란 정보다. 이제 좇는 대상이 바뀐다.

 

란의 이야기는 한승목 목사가 어떤 인물이고, 그가 저지른 악행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찬의 능력을 이용해 사이비종교를 만들고, 그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킨다.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싸들고 와 그에게 기적을 바란다. 교주는 열성적인 신도에게만 기적을 펼친다. 열성도는 헌금에 달렸다. 이창의 아버지가 전재산을 바쳐 한 번의 기적을 경험한 것이다. 하지만 교주의 아들로 포장된 것 때문에 교단은 파괴된다. 능력자가 없다면 지속될 수 없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능력이 란에게 전달된 것은 아직 모른다. 한 목사의 변사체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한 목사의 죽음은 그의 비리와 악행을 세상에 드러나게 만든다. 아이들을 납치해 찬이에게 병을 옮기도록 했다. 이 저주 받은 능력은 질병과 고통을 받을 그릇으로 연약한 아이들을 납치하게 만든다. 한 목사 일행에게는 당연한 일일지 모르지만 찬에게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자신만 죽으면 해결되는 문제였다면 그는 자신이 그 질병과 고통을 안고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쌍둥이 동생 란이 있었다. 동생에게 가해지는 고통 혹은 죽음이 두려워 누군가에서 받은 질병을 납치된 아이에게 옮긴다. 교주가 돈을 많이 벌수록 더 많은 아이가 납치되고, 죽어나간다. 정말 저주 받은 능력이다.

 

작가는 이렇게 능력에 한계를 둔 채 이야기를 만들었다. 특별히 이야기를 확장하지도 않고, 그 능력을 과도하게 포장하지도 않는다. 공간도 작은 지방 도시로 한정한 채 많지 않은 사람들을 등장시켜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한다. 덕분에 빠르게 읽을 수는 있지만 왠지 너무 가지를 쳐 앙상한 느낌이 든다. 란의 능력과 그 한계를 안 이창의 고민이 가슴 깊은 곳으로 와 닿지 않는 것은 마음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가 분석하고, 고민하고, 갈등하고, 결심하는 모습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 결정이 너무 느렸거나.

 

손과 손의 직접적인 접촉만으로 그 능력이 발현된다는 설정은 또 얼마나 제한적인가. 이 능력을 사용해 정의로운 활동을 하고, 악당을 쳐부술 수도 없다. 누군가의 병을 고친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병을 안고 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악당들에게 이 병을 옮겨준다면 통쾌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다. 육체적 능력이 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이 능력의 예방법까지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흥미로운 설정과 전개이지만 아직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아 보인다. 시리즈로 만들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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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안에서 이불 안에서
김여진 지음 / 빌리버튼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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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든 후 작고 아담한 크기가 마음에 들었다. 목차를 보니 참으로 많은 것들이 나와 있다. 그냥 한 번 휙~ 읽고 지나간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대충 본 책은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오만이자 착각이다. 겨우 한 줄 뿐이 페이지도 그냥 대충 읽고 지나갈 수 없었다. 그 속에 담긴 이야기가, 그의 생각이, 감상이 전체 흐름 속에서 훅하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잠시 머물다 저자의 다른 기록으로 넘어간다.

 

밝고 희망찬 글은 분명 아니다. 힘들어 보이고 실연으로 아파하는 마음들이 곳곳에 보인다. 20대를 지나 30대로 넘어오면서 쓴 글들을 모은 책이다. 자신의 감정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살아온 길은 어느 20대와 다르지 않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그리워하고, 잊고, 잊은 척하고, 다시 새로운 누군가를 만난다. 이 과정 속에서 친구와 나눈 대화가 정제된 글로 표현되기도 한다. 가끔 이 글을 읽으면서 내가 지나온 20대에도 이런 말을 했던가, 하고 의문을 품는다.

 

책 제목은 한 제목의 순서를 뒤바꾼 것이다. 원래는 ‘이불안에서 이 불안에서’가 제목이다.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목차를 보니 느낌이 색다르다. 보통 이런 종류의 책은 단숨에 읽는데 왠지 모르게 흐름이 뚝뚝 끊기면서 천천히 읽었다. 집중을 하지 못한 것은 나의 경험과 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저자가 말한 긴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이 글로 표현되었기 때문일까? 그가 읽은 책에서 인용한 문장들이 쉽게 이해되지도 다가오지도 않는 것은 나의 이해력이 떨어져서일까? 또 잠시 머물면서 그 문장을 노려본다.

 

글 속에서 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것이 자주 보인다. 사랑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세상 어디에, 누가 사랑을 과거와 쉽게 단절시킬 수 있겠는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미래로 이어진다. “혼자 있던 것과 혼자가 되는 것은 너무도 달랐다.”고 했을 때 고독과 외로움이 다르다는 어느 글이 떠올랐다. 저자는 자신의 쓰는 글이 실은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있지만 긍정적인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이 차이와 거리감이 읽을 때 힘겨웠는지도 모르겠다.

 

한밤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새벽 6시면 끝난다. 이 긴 밤으로 여행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질 수밖에 없다. 이 기록이 한두 동안 쌓였던 것도 아니다. 2008년부터 무려 9년간 기록한 것을 묶었다. 이 긴 시간 동안 그에게 일어난 수많은 일들은 이불 안에서 각각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견뎌내고, 흘러 보내고,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다. 불안도 외로움도 이별의 아픔도 그냥 이 시간 속에 흘러간다. 책을 묶는 순간 그는 평온한 모양이다. 다행이다. 왠지 각 글을 쓴 날짜가 궁금하다. 알면 그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조금은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욕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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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시간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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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추정시각>의 개정판이다. 원제보다 바뀐 제목이 훨씬 좋다. 처음에는 이 조작된 시간이 의미하는 바를 몰랐는데 소설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원제를 봤을 때 법의학적 공방이 나올 것이란 예상을 하게 되는데 실제 이 소설은 그런 내용이 아니다. 한 소녀의 유괴 살인이라는 범죄를 둘러싼 국가 권력의 비리와 공범 행위를 다룬다. 이 행위 속에서 무고한 한 청년은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범인으로 몰리고, 자백을 강요받고, 법정에 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가 의심을 품고, 문제를 한 번이라고 제기했다면 그런 지경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읽으면서 분노하고, 또 분노했다. 이 장면들이 한국의 법정과 경찰로 옮겨지면 그대로 붙여넣기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적수공권으로 성공한 사업가 와타나베 쓰네조의 딸이 유괴된다. 범인이 원하는 금액은 1억 엔이다. 쓰네조는 이 돈을 주더라도 딸을 구하고 싶다. 하지만 경찰은 자신들의 위신이 우선이다. 범인의 잘 짠 계획은 경찰로 인해 무산된다. 그리고 쓰네조의 딸 미카는 죽은 채 돌아온다. 이 시체를 처음 발견한 인물은 마을 청년 고바야시 쇼지다. 용돈벌이용으로 산나물을 따러 왔다가 미카를 발견한다. 신고를 했다면 문제가 없을 텐데 시체를 만지고, 지갑에서 돈을 끄집어낸다. 놀아 돌아오다가 다른 차를 만나기도 한다. 그의 몇 가지 실수와 과거의 범죄 기록이 그의 삶을 바꾼다. 경찰이 그에게 오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바뀐 제목 <조작된 시간>은 범인을 잡기 위한 사망추정시각이 아니다. 범인을 만들기 위해, 경찰 간부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시간을 조작한다. 심문을 하는 형사가 바뀐 사망추정시각에 의문을 크게 품지 않고 자신의 정의로 범인을 만들어간다. 쇼지는 공포심에 그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한다. 경찰의 굿캅, 배드캅 전략에 그냥 넘어간다.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자백하고, 납치 장소를 만들고, 누명을 뒤집어쓴다. 비극은 어머니가 변호사를 선입했지만 그 변호사가 제대로 된 변호사가 아니란 것이다. 국선보다 못한 변호사는 변론하려는 의지조차 없다. 법원도 아주 간결하게 처리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망가진다.

 

쇼지가 사형을 받는 과정을 보면서 분노했다. 쓰네조의 협박에 겁에 질린 경찰 간부와 그 간부의 요청에 사망추정시각을 바꾼 검시관과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강요하는 형사 모두에게. 범인을 만든다는 의미를 이렇게 잘 보여주는 소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공권력이 지닌 힘은 약자에게 집중된다. 쓰네조의 협박이 두려워, 조직 비리와 자신의 앞날을 위해, 잘못된 정의감과 선입견으로 중첩되어 한 곳으로 집중된다. 좋은 변호사가 나타나 이 모든 비리의 연결고리 속에서 문제점을 지적해도 이들은 공모자가 되어 꼼짝도 하지 않는다. 법정도 마찬가지다. 이 거대한 절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통곡하고 절망했을까. 이것과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이란 점이 더 무섭다.

 

한줄기 희망은 변호사 가와이의 열정과 정의다. 자비를 들여 문제점을 파헤치고, 사식비를 넣어주고, 절망에 빠진 쇼지를 일으켜 세운다. 그가 보여준 정의와 열정은 남다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사법절차 속 문제점을 알게 되고, 조직이란 거대한 괴물이 밖에서 볼 때와 어떻게 다른지 깨닫는다. 조직을 지킨다고 하지만 실제는 개인의 비리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알면서도 무죄의 한 청년을 감옥으로 보냈다. 절망과 통곡의 벽은 정의로운 변호사 한 사람의 능력으로 무너트릴 수도 넘어갈 수도 없다. 진범을 알아도 그를 고소할 수도 없다. 복잡하게 엮인 관계들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사건 발생과 시체 발견과 사법 부검과 용의자 발견으로 빠르게 이어진다. 심문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고, 조서 작성하는 과정이 나온다. 검찰에 넘어간 후 빠르게 재판에 회부되고 판결이 내려진다. 이 일련의 과정을 다루는 소설이 흔하지 않다. 각 부분이나 몇 가지 부분만 다룰 뿐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특이한 소설이다. 무고한 시민을 범죄자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분노를 자아내게 하지만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역할도 한다. 조직이 비리를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기에 낯설지도 않다. 다만 분노하고 답답할 뿐이다.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지만 사법부는 이것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는 것을 보면 아직 요원하다. 소설은 재미있지만 답답하다. 너무 현실적이라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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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별
엠마 캐럴 지음, 이나경 옮김 / 나무옆의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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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셸리의 고전 공포소설 <프랑켄슈타인>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창작한 고딕 스릴러 소설이다. 실제 메리 셸리가 등장하지만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주인공은 어린 소녀 리지다. 리지는 동생을 찾으러 멀리 스위스까지 왔다. 처음 그녀가 문을 두드렸을 때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다. 마침 유령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인 하인 펠릭스가 문을 열었을 때 사람들은 리지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셸리가 열심히 마사지를 했다. 자신의 죽은 아기를 생각하면서 정성을 다한 것이다. 이 정성 탓인지 리지는 깨어난다. 그리고 어떻게 자신이 이 먼 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액자식 구성이다 보니 열네 살 소녀 리지의 이야기가 핵심이다. 이 이야기가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으로 이어졌다는 설정이다. 하지만 이것은 작가의 창작이자 전체 이야기를 꾸미기 위한 설정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성별과 인종은 이 작품을 다양하게 해석하게 만든다. 흑인 하인 펠릭스가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란 것과 미국을 벗어났다는 사실은 나중에 그에게 낙인된 S자가 의미하는 것과 이어진다. 아직 인종차별이나 노예문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시대였기에 이 시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논의할 거리가 많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리지의 이야기는 미신과 과학이란 두 분야를 엮고 비틀었다. 미신이 비이성적이고, 과학이 이성적이란 이분법이 이 소설 속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혜성이 불길하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비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과학자로 나온 인물들이 보여준 행동 역시 이성적이지 않다. 소설 속 과학자인 스타인박사는 천둥의 전기 에너지를 이용해 죽은 자를 살리는 실험을 시도한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것과 같다. 동물의 경련을 착각한 과학자들이 이 당시는 적지 않았다. 고집 센 과학자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이 실험이 성공일 때는 엄청난 호응을 얻지만 비윤리적이고 실패하면 엄청난 비난을 마주한다. 물론 이 과학 실험에 대한 이야기는 후반부에 나온다.

 

리지의 이야기는 그녀가 왜 이 먼 스위스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동생 펙을 찾기 위해서다. 펙은 동물을 사랑하는 아이다. 이 아이가 셸리와 함께 마을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좇아온 것이다. 그리고 리지의 가족사에서 시작하여 이 모험을 시작하게 된 데까지 그 과정을 들려준다. 엄마가 들려준 혜성의 불길함과 마을 축제의 연인 전설 등이 섞여 흘러간다. 그러다 친구 머시가 본 환상이 불길함을 더한다. 엄마의 고집이 부른 불상사다. 번개를 맞은 두 모녀 중 엄마는 죽고 딸은 실명했다. 눈 먼 리지의 삶은 그래도 지속된다. 불편함이 있지만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마을에 과학자가 이사 오면서 불행은 시작되었다. 아빠가 이사 오는 사람 때문에 나가지 않았다면 엄마가 번개를 맞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비난이나 변명을 다루지 않는다. 엄마의 고집이라고 말하면서 원인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비난의 고리를 만들지 않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촉감과 소리에 민감해진다. 동물들이 죽었다는 소문이 귀에 들린 것은 그것이 아주 특별했기 때문이다. 한두 마리가 죽은 것이 아니라 모두 죽었다. 마을에 살짝 공포가 깃든다. 이 공포를 일부러 강하게 만들기보다는 몇 가지 상황으로 그 어떤 것을 짐작하게 만든다. 독자도 그 어떤 것이 무엇일까 추리한다. 나중에 드러난 정체는 완전히 예상을 벗어났다.

 

공포는 전염성이 강하다. 알 수 없을 때 더 강하게 다가온다. 어릴 때 본 공포영화를 지금 보면 너무 허술해서 무섭기보다는 웃음이 나온다. 고전 공포영화도 비슷하다. 최근에 본 공포영화는 영상과 음악의 조화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예상하지 못한 장면 전환으로 관객을 놀래킨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이 소설은 아주 약한 공포를 전달한다. 대신에 다른 것으로 그 빈 곳을 채웠다. 리지의 모험과 비워져 있던 역사적 사실의 채울 상상력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리지의 동생을 입양하려고 한 메리 셸리의 나이다. 스물한 살에 걸작을 썼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과연 펙의 나이가 입양할만한 나이였을까 하는 것이다. 읽으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이 예상보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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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 우리가 배운 모든 악에 대하여
박민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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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지만 책 제목은 우리의 교육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제목을 보았을 때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서 선생을 하는 친구와 대화를 할 때 그가 나쁘지 않은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깰 수 없는 벽을 마주한다. 학생과 선생이라는 거대한 벽은 인권이 왜 교육 현장에서 사라졌는지 알 수 있었다. 실제 학창 시절 학교를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단어를 나만 사용한 것이 아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느낀 것이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가 학교 다닐 때 선생들은 학생의 인권 따위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학교에 식민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교복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냥 비싼 교복이 있다는 것 정도만 생각한 나에게 교복이 지닌 숨겨진 의미를 알려줄 때 놀랐다. 평등해 보이지 않기 위해 단을 조정하는 등의 수선을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교복의 판매와 서열화 등으로 이어지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작은 차이에 민감한 아이들이 이 교복을 통해 차별의 명분으로 삼는 것에 익숙해졌고, 이것이 대학에서 서열화와 차별화로 이어졌다는 논리는 생각해볼 거리다.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 것들이 점점 더 큰 차이를 만들고, 이것을 고착화시키는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우리 때도 욕을 많이 했는데 “아이들의 욕은 기본적으로 비인간적이고 폭압적인 입시교육 시스템을 향한 비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교사와 부모를 간수라고 부른다. 동의한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누가 딴짓하는지 돌아보는 선생의 모습은 영화 속 간수와 닮았다. 청소년들의 쿨을 분석한 부분도 낯설었다. 세월호 학생들의 동영상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격이었다. 문화산업이 이 쿨을 조장한다고 했을 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쿨함이 최소한 내가 자랄 때는 없었다.

 

유학으로 인한 문제는 너무 많이 다루어진 주제지만 오바마가 한국의 교육열을 칭찬한 이유를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었다. 유학생이 제국주의의 첨병이란 것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이지만 한 집안이 모두 같은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을 둘러싼 불편한 현실은 낯설었다. 군대와 학교를 같이 놓고 해석한 부분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학교 교육이 어떻게 시작했는지 그 기원을 찾아가 풀어낸 사실은 학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주 잘 보여준다. 국가가 바라는 자원을 길러내는 장소일 뿐이다. 그리고 이 두 곳은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고, 폐쇄적이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기보다는 숨긴다. 이런 공간에서 민주주의가 자란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

 

학교 폭력 대신 폭력 학교란 용어로 2부를 연다. 사학 비리로 시작하는데 낯설지 않다. 비리 사학이 이렇게까지 한다는 사실은 놀랍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런 학교를 계속 그래도 둔다는 것이다. 재단 이사장을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맡아 순간적으로 태풍을 피한다. 특수학교, 종교사학으로 넘어가면 이 비리는 상상을 초월한다. 특수학교의 실태를 조금 보고 난 후 느낀 것은 저자의 말대로 ‘격리’였다. 학교가 학생을 보호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지배하는 것처럼. 사학 비리에 꽤 많은 분량은 둔 것은 그만큼 그 비리의 정도가 크고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교사가 학생들에게 피해 입었을 때 교권을 해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이런 주장을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은 교육(행정)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남자관료들이라고 한다. 힘없는 여교사를 억압당하는 학생들 앞에 총알받이로 세워 자신들의 이득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내가 늘 교권보다 인권이라고 외쳤던 것과 어느 정도 연결된다. 인권이 무시되는 학교에서 교권만 부각시키는 이런 주장은 현실을 심하게 왜곡시킨다. 학생들의 여교사 성희롱이나 성추행보다 더 심한 것은 교사들의 성희롱, 성추행이다. 여교사와 학생을 향한 이 행동들이 모두 근절되어야 하는데 이 둘을 별개의 사항으로 보는 것을 저자는 거부한다.

 

학교를 성범죄의 온상이라고 말한다. 현실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보면 맞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식은 언제나 보여주기식이고 일시적이다. 저자는 청소년 성범죄의 특징 중 하나가 집단화라고 말한다. “집단 성폭력의 강한 유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청소년의 서열 문화와 그 서열 문화가 갖는 폭력성”이고, “학교에서 서열 관계에 따른 하향 폭력을 일상적으로 배우고, 그것을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우리 삶속에 내재 되어 있는 폭력과 서열화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학교 폭력을 양산하는 조건을 만든 것이 교육부와 국가권력이고, 이 폭력이 사건화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력 사건을 은폐, 축소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가 구제되지 않고 버려지고 처벌된다. 피해자를 가해자와 같은 부류로 물거나 면학 분위기를 해친 놈으로 취급하고 도덕적 비난을 강화한다. 현실에서 자주 보는 장면들이다. “교육부와 국가권력은 학교를 앞잡이로 세우고, 피해자를 제물로 삼아 스스로를 구제한다. 학교 폭력이 처리되는 과정은 이처럼 정치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저자가 학교를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하라고 한 부분은 피해자와 그 부모들이 깊이 새겨둘 필요가 있다. 학교는 우리 사회의 폭력성을 설명해준다. “학교는 폭력의 기원이다.”란 표현에 깊이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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