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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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명의 시인과 21명의 철학자들이 만났다. 아니 강신주라는 철학자를 통해 짝짓기가 이루어졌다. 저자는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이란 부제에서 알려주듯이 난해한 현대 철학을 역시 난해한 시를 통해 풀어낸다. 한 편의 시와 그 해석을 한 철학자의 철학으로 풀어서 설명할 때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감탄하게 된다. 그것은 그 설명이 쉽고 친절한 것도 있지만 시를 통해 만나게 되는 철학자들의 사유와 세계가 새롭고 신선하면서 낯익은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21명의 시와 시인들 중 낯선 시인도 몇몇 있다. 거기에 비하면 철학자들은 낯선 사람이 더 많다. 워낙 유명한 시인과 철학자들이야 상식처럼 알고 있지만 그의 철학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 그 자체다. 그런데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다양한 철학과 철학자들을 만났다. 그 만남은 나의 사유 세계를 넓혀주고 깊게 만들었다. 읽으면서 감탄을 하기도 하고, 새로운 해석과 깨달음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의 생각과 엇갈린 부분에서 갸우뚱하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충동과 흡수와 관찰은 관심이 있었지만 어렵고 난해하다는 이유만으로 멀리했던 그 학문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21편의 시와 철학자를 모두 말하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이다. 그 중에서 몇몇만 추려보자. 이들은 시의 주관적이고 낯선 이미지들이나 철학의 이해하기 힘든 추상적 용어를 깨고 나에게 다가온 것들이다. 동시에 갇혀 있던 이미지와 관념들이 산산조각 나고 삶속으로 조용히 파고들었다. 낯설기만 했던 시와 철학이 나에게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모든 시와 철학이 그랬다면 정말 좋겠지만 강한 울음으로 다가온 것은 몇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작가의 말처럼 의지의 문제일 수도 있다.

20대에 만났고 즐겼던 두 시인 박노해와 기형도의 글을 통해 추억과 기억을 새롭게 만들면서 문을 가볍게 열었다. 이때만 해도 기억을 더듬고 가볍게 나아간 정도다. 그런데 김남주 시인의 시가 아렌트의 철학과 만나면서 기존의 가치관들이 산산조각 난다. 근면, 정직, 성실, 공정, 충성, 봉사 등의 전통적인 덕목들이 무사유를 거치면 어떤 형태로 발전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나치 시대의 아이히만인데 그가 수행한 유대인 학살이 광기나 악의 때문이 아니라 관료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근면성과 성실성과 그 일이 끼칠 영향이나 그 사람들의 처지를 전혀 반성하지도 성찰하지도 않은 무사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권위니 명령이니 하는 것에 쉽게 굴복하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수많은 행위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지배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이런 가치관을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마주침과 관계를 지나 너무나도 인간적인 에로티즘에 살짝 발을 담군 후 유하의 시에서 욕망의 현장을 다시 만난다. 내가 겪고 만나고 경험했던 삶들이 다가온다. 그러다 다시 김수영의 시에서 왜 4.19혁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되고, 다시 이것은 80년대 6.29선언으로 이어진다. 조그마한 성취가 주는 낭만에 취해 진정한 싸움을 중도에서 멈춘 우리의 현실이 느껴진다. 80년대를 뒤흔든 도종환 시인의 시를 그쳐 인식론으로 다가왔던 김춘수 시인을 만나고, 사놓고 아직도 읽지 못한 최영미와 사르트르의 세계를 살짝 들여다본다. 그 당시 시인의 평가를 시대 속에서 풀어내는 저자의 글에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일상과 비극을 담아낸 최명란 시인의 시에선 부끄러움을 느끼고 동시에 삶의 현실이 다가온다. 누군가에게 엄청난 비극이자 절망이 부외자에겐 한순간의 감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 처참한 아우슈비츠가 이성과 합리성 때문에 발생했다고 하는 순간 놀라게 된다. 광기나 비정상 때문이 아니라니 말이다. 이 현실은 동일성의 사유에서 비롯하는데 아도르노는 개별적인 것이나 비개념적인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다시 전체주의와 맞닿아 있다. 쉽게 표현하면 어떤 나라에서 전쟁으로 몇 명이 죽었다는 것보다 구체적인 누가 죽었다고 설명할 때 사람들에게 더 쉽고 진심으로 다가간다는 의미다. 
이후에도 한하운을 통해 배제된 자들의 울부짖음을 듣게 되고, 타인에게 이르려는 욕망을 마주하고, 다시금 난해한 이상의 시를 만난다. 황지우를 통해 사랑의 내적구조를 조금은 알게 되고, 호네트와 박찬일의 만남 속에서 다시 상호 인정과 자유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마지막에 만난 두 한국인은 이 책에서 가장 낯선 만남이다. 시인과 철학자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낯설다. 저자의 평가를 듣다보면 언젠가 반드시 공부해야 할 사람임에 틀림없다. 

책의 구성은 사실 간단하다. 한 편의 시를 내세우고, 시인을 말하면서 시를 해석한 후 철학자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그 철학자의 철학을 시를 통해 하나씩 풀어내는데 이 과정을 통해 철학과 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다. 이래서 얻게 되는 이해와 깨달음은 결국 삶으로 이어진다. 철학과 시가 각각 양 극단에 자리한 듯하지만 서로 통하는 점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쉽게 읽었다. 몇몇 철학에선 나의 삶과 마주침이 부족해 이해도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많은 재미와 즐거움을 준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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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해요 2010-03-23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