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시절]의 서평을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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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의 시절 ㅣ 문지 푸른 문학
다치아 마라이니 지음, 천지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2월
평점 :
1963년 소설이다. 그 시절 이탈리아 사람들의 사랑에 대해 잘 모른다. 뭐 지금 우리 주변의 사랑도 잘 모르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엔리카의 생활을 따라가다 보면 놀라운 장면들을 만나게 된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찾아가는 체사레나 그녀의 동기생인 카를로와의 섹스는 아무 목적 없는 것처럼 다가올 때도 있다. 건조하고 메마른 문장과 행동 속에 어떤 삶이 감추어져 있기에 이런 행동이 나오는 것일까 궁금하다. 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결코 쉽게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체사레의 아버지가 문을 열어주는 장면부터 나온다. 이 문장을 읽고 나서 친구를 만나러 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섹스는 이런 섣부른 판단을 무참하게 깨어버린다. 체사레가 엔리카를 대하는 방식은 결코 사랑하는 사람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카를로와의 섹스는 그녀를 이해하는데 더욱 어렵게 만든다. 단순히 그녀는 섹스를 즐기고 좋아하는 것일까? 아니면 삶의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마구 달린다.
엔리카의 집밖 생활이 남자들과 관련되어 있다면 집안은 무능한 아버지와 생활고에 시달리는 어머니로 힘겨운 나날이 이어진다. 돈이 되지 않는 비싼 취미인 새장 만들기에 몰두하는 아버지는 두 부부가 이미 정도 사랑도 없는 무심한 일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다고 그녀가 살갑게 아버지를 대하는 것도 아니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가슴 한 곳엔 체사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어머니가 하는 말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목적 가득한 평범한 이야기뿐이다.
열일곱 살 그녀가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결코 장밋빛으로 치장되어 있지 않다. 이런 저런 남자를 만나 섹스를 하고, 어머니가 죽은 후론 먹고 살 걱정도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체사레에 대한 애정에 비해 돌아오는 반응은 늘 육체적 욕망의 순간적 배출뿐이다. 예상하지 못한 섹스로 잠시 돈을 받기도 하지만 순간의 방황일 뿐이다. 그녀가 임신을 했다고 말했을 때 체사레와 카를로가 보여준 반응은 지극히 남성적이다. 자신의 순간적 욕망만 배출하는데 목적이 있던 체사레는 자신의 책임을 뒤로 하고, 조심하지 않은 그녀 탓만 한다. 흔히 수많은 남자들이 책임지고 싶지 않을 때 보여주는 낯익은 행동이다. 반면에 카를로의 반응은 순간적 흥분과 열정에서 비롯한다. 그녀를 책임질 능력도, 자신도 없으면서 말만 앞세운다. 물론 순수하고 순정적인 마음은 보이지만 그 순간의 감정은 젊음의 한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쉽지 않은 관계와 상황 속에서 더욱 낯선 느낌을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작가의 문체다. 그녀는 사람과 사람의 대화 속에서나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이나 심리묘사에서 감정 이입을 극도로 절제한다. 감상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장황하게 상황을 풀어주지도 않는다. 간결하면서 건조한 문장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들을 볼 것을 요구한다. 잘 읽히면서도 단숨에 읽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녀의 삶 속으로 나의 감정 이입이 이어지지 않고, 한 발짝 떨어진 곳에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모두 읽은 지금도 그녀는 알 수 없는 존재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전후 이탈리아의 생활상과 한 여고생의 방황이 사실적이고 건조한 문장과 절제된 묘사로 잘 표현되었다.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김훈을 좋아하는 독자나 건조하고 사실적이고 절제된 시선을 유지하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비가 오기 시작했다. 훈훈한 기운과 함께 빗방울은 듬성등성 인도 위로 떨어졌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곧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우선은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일은 새벽에 일어나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날 것이다. (3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