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학
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음, 송태욱 옮김 / 이룸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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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서평]「독학」세상에서 가장 외롭지 않은 공부


 


 

독학 - 8점
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음, 송태욱 옮김/이룸북


 나는 무언가를 배울 때 주로 독학을 하는 편이다. 누군가를 만나서 무엇을 배우거나 하는 일은 잘 하지 않는다. 대인 관계를 무척 귀찮아 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누군가와 만났을 때 그 사이에 큰 물결처럼 솟구치는 어색한 공기와 억지 웃음, 가식적인 행동 등에 질린다. 타인 앞에서 드러나는 외적 인격인 나의 페르소나에 역겨움을 느낄 때도 있다. 혼자 즐기는 취미가 좋아 독서를 하고 혼자 배우고 익히는 게 좋아 필연적으로 독학의 길을 가고 있다. 앞으로도 삶의 한 방식으로 계속될 독학이기에 「독학」​의 내용에 궁금증을 가지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독서로 어휘가 자연스럽게 늘어나고 또 다양한 논리나 논술의 살아 있는 형식을 책에서 배우기 때문에 현실에서 부딪히는 일의 구조나 짜임을 통찰하기 쉬워진다. 이는 동시에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침착하게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도 이어진다.

P. 100 


 

 따지고 보면 모든 공부가 독학이기는 하다. 스승이나 선생을 두어 가르침을 받아도 분명 혼자 이해하고 생각해야 될 때가 있다. 하다못해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연습이라도 혼자 해야 한다. 낚시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 스스로 낚시를 해봐야 한다. 그래서 독학은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은 책상이나 서재를 정리한다든지 통근 시간을 이용한다든지 어떤 특정 음악을 듣는다든지 하는 기술론이나 방법론 보다는 주로 독학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서술했는데, 이게 누구나 거치는 평생 공부에 큰 기반이 될만하다.


 만약 근처에 제대로 된 도서관이 없다면 얼른 이사를 가야 한다. 그건 그 지역의 행정이 비인간적이라는 증거다.

재정이 파탄 난 유바리 시는 도서관을 폐관하려고 했는데, 시 운영자들이 그런 비인간적인 감성을 갖고 있기에 하찮은 유원지를 만들어 재정을 엉망으로 만든 것이다. 가건물을 시청으로 쓰는 한이 있더라도 도서관과 병원, 학교만큼은 충실하게 운영하는 것이 비인간적인 행정이다.

P. 196 




 공부라는 말에 벌써부터 진저리가 날 수도 있다. 우리는 학습과 공부를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책의 내용 중 가장 공감 했던 내용은 학습과 공부의 구분이다. 학습은 '흉내 내는 일' 이다. 아직 글을 쓰지 못하는 아이가 교본의 글자를 흉내 내어 쓸 때 그것을 학습이라고 한다. 우리가 일평생 공부라고 생각했던 일들 거의 전부가 학습이다. 빛나는 청춘의 대부분 시간을 투자한 수능 공부도 학습의 일종이다. 「독학」​에서 추구하는 공부는 바로 모든 일에 탐구하며 스스로를 단련하고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자기 변혁이다. 억지로 하는 학습이 아니고, 배우는 즐거움을 느끼는 주도적인 공부다. 세상 모든 책이 스승이 되고 또 다른 내가 나를 가르치는, 세상에서 가장 외롭지 않은 공부가 바로 「독학」​이다.


 '독학'이라는 말은 너무 고독한 느낌을 준다. 혼자 묵묵히 책상을 마주하고 있는 음침한 인상까지 갖게 한다. 하지만 독학의 독이란 고독하다는 뜻이 아니라 특정한 스승을 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특정한 스승은 두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것들을 스승으로 삼는다. 게다가 근방에 있는 시원찮은 교사를 스승으로 삼는 게 아니라 진짜 최고 수준의 스승을 두는 게 독학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최고 수준의 책을 스승으로 삼는 것이다.

P.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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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맛 - 음식으로 탐사하는 중국 혁명의 풍경들
가쓰미 요이치 지음, 임정은 옮김 / 교양인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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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평]「혁명의 맛」음식으로 알아보는 중국의 서사


 


 배가 넘치도록 가득 찬 느낌을 받을 때가 아니면 섣불리 책을 펼칠 수가 없었다. 「혁명의 맛」​에서 언급되는 음식과 요리의 과정에 대한 묘사가 무척 세심하고 뛰어나서 매번 읽을 때마다 침을 꼴깍, 하고 삼켜야 됐다. 음식의 이름도 낯설고 재료도 도대체 무슨 재료를 말하는 건지 알쏭달쏭한 요리를 보면서도 어디선가 그 요리의 향이 느껴지고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누군가 옆에서 조리를 하는 모습이 선할 정도로 이 책은 무척 투명했다. 가쓰미 요이치의 오랜 중국 요리 연구는 이런 맛있는 책을 탄생시켰다. 


 프랑스 요리와 함께 세계 2대 요리로 꼽히는 중국 요리는, 중화 요리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무척 가까우면서도 실제로 중국의 요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오묘한 거리감이 있다. 이는 일본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일본인 저자 가쓰미 요이치는 일본에서 흔히 알고 있는 중국 요리와 중국 본토에 있는 요리에 대해 자세히 술회하며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세상에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요리를 따라가다 보니 사람이 나오고 사람을 따라가다 보니 국가가 나온다. 「혁명의 맛」​은 음식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소재를

통해 중국이라는 하나의 나라를 알아보는 흥미로운 문화사이다. 


 책을 읽는 내내 오랜 연구 끝에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하며 역사서에 큰 획을 그은 시오노 나나미가 떠올랐다. 가쓰미 요이치의 글에서도 「혁명의 맛」​에서도 그정도의 역량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나의 분야에 미쳤다, 정도의 표현밖에 할 수 없을정도의 오랜 집중과 몰입이 아니었으면 고이지 않았을 그 지식의 수준에 감탄했다. 마치 무협지에

서 한 가지 기술을 극한까지 갈고 닦아 최고수의 자리에 오르는 지존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의 지식으로 요리된 중국의 서사, 그 역사의 흐름에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이 휩쓸려 나를 중국 한복판에 놓아버리고 왔다.


 책의 마지막 장, 추천사를 보면 '중국 요리의 미궁을 탐험하는 쾌락'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중국 요리를 얘기할 때 미궁이라는 단어만큼 어울리는 단어는 찾기 힘들 것 같다. 중국 요리는 미로처럼 복잡하고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지만 미궁에는 그 속에는 빠져들만한 길이 있고 반드시 출구도 있다. 나도 수많은 중국어와 한자에 길을 잃고 헤매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광대한 중국 요리의 범위는 길을 헤매는 일조차 즐거움으로 남겨뒀다. 중국 요리는 그렇게 나에게 혁명의 맛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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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옆 철학카페 - 세네카부터 알랭 드 보통까지, 삶을 바꾸는 철학의 지혜
안광복 지음 / 어크로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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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서평]「도서관 옆 철학카페」이 책 한번 마셔보세요



도서관 옆 철학카페 - 
안광복 지음/어크로스


 '책을 소개하는 책'이 있다. 개인적으로 무척 즐겨 보는 편이다. 「지난 10년, 놓쳐서는 안 될 아까운 책」은 계속 이어져 나갔으면 하고 바라는 시리즈 중 하나다. 「파이 이야기」로 유명한 얀 마텔이, 캐나다 수상에게 책을 추천하는 편지를 모은「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는 책에 대한 글을 쓰는 최고의 롤모델이 됐다. 「아주 특별한 독서」는 평소에 무척 재밌게 읽은 책이 많이 소개되어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요즘에는 북큐레이터라는 직업으로 개인의 기호에 맞춰 책을 추천하는 직업도 있는 모양이다.

 「도서관 옆 철학 카페」​도 위에 언급한 책들과 같은 '책을 소개하는 책' 의 범주에 들어 가는 책이다. 책의 가장 뒷면을 살펴보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책의 목록이 나오는데, 철학적인 이야기가 담긴 꽤 높은 수준의 책이 많고 저자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심도 있게 나눈다. 책을 소개하거나 '책을 소개하는 책'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과연 저 책이 나에게도 재미를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사람의 독서 취향은 정말 가지각색이라 내가 재밌게 읽고 친구에게 강력 추천하며 빌려 준 책이 심드렁하게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대로 빌려주는 게 미안할 정도였던 책이 친구의 찬사를 받으며 금의환향 할 때도 있다. 선천적이나 후천적으로 길러진 취향 탓에 내용에 관한 해석을 달리 하는 것이 호불호를 가르기도 한다. 「도서관 옆 철학 카페」​의 저자도 본인만의 철학적인 해석을 오해(?)하는 독서라고 귀엽게 애교 부리며 독자에게 슬며시 자신만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모든 이해는 오해다." 라는 니체의 말은 이때 빛을 발한다. 어떤 책을 읽건 나는 지은이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부터 헤아리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눈앞에 놓인 문제에 어떤 도움이 되겠는지를 가늠할 뿐이다. 나에게 철학은 현실의 문제를 싸워 이기게 하는 '무기'여야 한다.

P. 5 

 

 내가 책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바로 재미다. 재미는 다른 사람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본인만의 해석이 바탕이 됐을 때 이루어지고는 한다. 독서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사람 중에 책을 보고 잘못 이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독서를 꺼려 하는 사람이 꽤 많다. 소설이나 시를 읽고 문제를 풀며 정해진 답을 맞춰야 하는 잘못된 교육 방식에서 벌어진 비극이다. 「장미의 이름」을 쓴 움베르토 에코는 "화자는 자기 작품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화자가 해석하고 들어가는 글은 소설이 아니다. 소설이라는 것은 수많은 해석을 창조해야 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소설 뿐만 아니라 모든 책이 그렇다. 한 권의 책을 100명이 읽으면 100가지 해석이 나오고 그 중 어느 하나 정답인 것이 없고 정답이 아닌 것이 없다. 「도서관 옆 철학 카페」​의 저자가 내놓는 철학적인 해석도 역시 정답이 될 수 있는 매력적인 해석 중 하나다. 


 젊은이들은 현재에 살기 어렵다.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탓이다. 반면, 나이 든 이들은 과거를 곱씹으면서 현재를 날려버리곤 한다. 현명하게 나이 든 사람만 오롯이 '현재'를 누린다.

P. 274 


 「도서관 옆 철학 카페」​은 책을 매개로 하는 흥미로운 이야기의 연속이다. 독서 모임 같은 것을 생각하면 좋다. 독서 모임을 한번이라도 참여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게 꽤 재밌다. 특히 내가 재밌게 본 책에 관해 이야기 할 때는 노래방에서 한번 붙잡은 마이크를 놓치 않는 꼴불견처럼(?) 말하고 싶은 내용이 산더미다. 「도서관 옆 철학 카페」​에 나오는 책에 대해 저자가 말하고, 또 나의 해석도 말하는 즐거운 소통의 시간이 된다. 책은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는 매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책은 쌍방향 매체다. 저자가 책을 보며 이런 이야기를 한 것처럼 나도 「도서관 옆 철학 카페」​를 보며 내 이야기를 하면 되는 것이다. 책으로 써냈다는 점과 그렇지 않았다는 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도서관 옆 철학 카페」​는 제목 그대로 카페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느낌이 나는 책이다. 커피 향에 감각이 되살아나고 그 맛에 행복을 느끼게 된다(난 커피를 못마시지만...). 어디선가 저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 책 한번 마셔보세요".


 P.S '~해볼 일이다' '이럴 때 ~책을 읽어 볼 일이다' 등의 문장 전개가 너무 많이 반복된다. 저자의 글쓰기 습관 같은 데 조금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다. 


 인간은 자신을 직접 바라보지 못한다. 나를 보는 다른 사람의 표정에 비추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안다.

P.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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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사람 글읽는 사람 - 과학적으로 읽고 논리적으로 쓴다, 텍스트 메커니즘
구자련 지음 / 다섯번째사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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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서평]「글 쓰는 사람 글 읽는 사람」글의 과학적인 정석



 

글쓰는 사람 글읽는 사람 - 
구자련 지음/다섯번째사과


나는 글 쓰는 사람이기도 하고 글 읽는 사람이기도 하다. 해리포터 시리즈가 한창 인기를 끌었던 때부터 남몰래 학교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곤 했다. 그때는 왠지 도서관에 가는 모습이 모범생인 척 하는 행동인 듯 부끄럽게 느껴져서 비밀스럽게 가야만 했다. 작가 '귀여니'의 인터넷 소설이 장안의 화제가 됐을 때 나도 인터넷에 소설을 썼다. 쓰다가 매번 금세 포기하기는 했지만 그때 나는 자발적으로 글 쓰는 사람이 됐다. 

 대학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글 쓰는 사람, 글 읽는 사람이 됐다. 혹시 떨어질까 염려하여 여러 대학, 각기 다른 학과에 지원서를 넣었는데 그게 전부 합격했다. 그 중에서 문예창작과를 택했다. 집에서 가깝다던가 하는 부가적인 이유는 일절 생략하고 그저 '글'에 대한 관심으로 정한 학과였다. 글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고 싶고 또 잘 쓰고 싶다는 욕심과 관심이 지금의 진로를 정하게 됐고 앞으로 인생에 있어서도 빠질 수 없는 하나의 길이 되었다. 「글 쓰는 사람 글 읽는 사람」​을 펼치게 된 이유도 정확히 같다. 글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 오롯이 이 책에 대한 연결 고리로 작용했다. 여태껏 글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매커니즘을 파악한다는 등의 개념을 생각해보지도 배워보지도 못했다. 중고등학교 때 수업 시간은 자는 시간과 다름 없었기에 글의 논리를 익히거나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몸으로 부딪치면 감각적으로 글에 접근한 경험밖에 없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문제와 고민에 부딪힌다.그리고 그때마다 그것들을 극복하고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곤 한다. 그 시간 중에서 공부하는 시간 다시 말해 텍스트를 읽고 쓰는데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놀이방에서부터 대학교까지 평균 20여 년이라는 절대적 비중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여전히 글을 읽고 쓰는 것이 고민인 듯하다. 누구나 글을 읽고 쓸 수는 있지만, 모두가 잘 읽고 잘 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P. 16 


 처음에 책을 훑어 보며 이해하기 무척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 무척 전문적이고 딱딱한 느낌이어서 글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따라가기 어렵다고 느꼈다. 앞 페이지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가다보니 과연 모든 글에는 논리가 있었다. 글의 한 덩어리, 텍스트는 논문, 리포트, 논술, 보고서, 에세이 등 어떤 종류의 글이든 같은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국가의 언어이든지 똑같이 작용했다.

 책에서 강조하는 텍스트의 논리는 바로 한 문장이 아닌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고리다. 비유법이나 강조법 등의 수사법을 통해 문장을 꾸미든가 주어와 동사가 어울리게 끔 하는 등의 한 문장 문법은 이미 학교 문법 시간에 배웠기에 책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글을 읽을 때 핵심 주제를 파악하고 익히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는 일이고, 글을 쓸 때도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고리를 잘 이어줬을 때 좋은 글이 된다는 논리가 바로 책의 핵심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고리는 뭘까? 책의 초반부에 나오는 간단한 예를 보면 어느정도 감이 온다.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이 있다.

그 에 가고 싶다.


 위의 시를 보면 '섬'이라는 단어를 주고 받음으로써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별다른 접속사(책에서 표현하는 표지어)가 없음에도 의미 전달에 아무 문제가 없으며 담백하고 깔끔하며 세련된 글이 됐다. 책에서 강조하는 글의 논리는 바로 이런 연결 고리를 뜻한다. 


 좋은 글, 완성도가 높은 텍스트의 조건은 다양하다. 내용의 균형이 잡혀 있어야 하고, 중복을 피하고, 독자의 관점에서 간결하고 쉽게 읽혀야 한다. 그렇다면 내용을 떠나 형식적인 관점에서 완성도가 높은 텍스트의 구체적인 조건은 무엇일까? 우선 가시적으로 문장과 문장 사이에 표지어가 많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문장 간에 연결 고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문장 간의 방향성이 명확해야 한다.

P. 34 


 「글 쓰는 사람 글 읽는 사람」​에서 말하는 글의 논리를 익혔을 때, 글을 읽는 건 그렇다 쳐도 그 논리에 따라 매번 계산적으로 쓰는 글이 과연 매력이 있을까? 책에서 말하는 논리문법은 말하자면 글의 정석과도 같다. 어느 분야에서든 정석은 중요하다. 허영만 화백의 작품 타짜를 보면 주인공에게 화투를 가르쳐주는 화투 고수가 이런 말을 한다. "정석을 익힌다고 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석을 모르면 고수가 될 수 없다". 또한 화투로 돈을 잃고 과정을 되짚어 보는 주인공은 이렇게 생각하며 후회하기도 한다. '정석대로 쳤어야 한다. 이래서 정석이 중요하다'. 논리문법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글을 쓰라는 말이 아니다. 의식하지 않아도 몸에 베어 논리적인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훈련할 수 있게끔 논리문법이라는 글의 정석을 익히는 것이다. 정석을 익히고 나서야 변칙적이고 자유로운 글도 쓸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삶에 있어서 텍스트는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의사소통이다. 가장 고전적이지만 논리를 기반으로 하는 가장 강력한 매체이기도 하다.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이성적 사고 표현의 결정체다. 문화와 콘텐츠가 아무리 발전한다 한들 텍스트는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 해결의 도우미가 되기도 하고 사랑의 감정을 전달하는 메신저이기도 한, 어쩌면 삶의 동반자적인 역할을 하는 텍스트. 정석 정도는 익혀야 되지 않을까?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감성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이성을 극복한 감성이다. 예를 들어 피카소의 추상화는 전통 드로잉 기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을 전제로 가능했다. 구상을 극복한 사람이 추상을 넘어갈 수 있고, 이 추상을 극복한 사람은 다시 더욱 진보한 구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 추상은 구상을 전제로 하며 진보한 구상은 다시 추상을 전제로 한다 .최악의 경우는 구상 없는 추상이다. 해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해체의 대상(구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성적 사고력을 갖추고 감성적 표현을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냥 감성적인 사람은 차원이 다르다. 이성이 중심인 시대는 지났다. 그렇다고 이성이 필요없는 시대는 아니다. 

P.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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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공부하는가 - 새로운 시대를 위한 교육 프로젝트
에르빈 바겐호퍼 외 지음, 유영미 옮김 / 생각의날개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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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문/서평]「누구를 위하여 공부하는가」교육의 새로운 방향




누구를 위하여 공부하는가 - 
에르빈 바겐호퍼 외 지음, 유영미 옮김/생각의날개


 교육의 '모범' 중국이 흔들리고 있다​. 책의 첫 소제목이다. 중국의 아이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서 하루종일 공부를 하고 학원을 갔다가 하루가 바뀔 때 쯤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고 다음 날 그것을 똑같이 반복한다. 책에서는 가장 의미 없는 공부를 하는 국가의 사례로 중국이 등장하지만 대한민국 아이들의 하루 일과를 살펴보면 이정도는 코웃음이 나오는 수준이다. 창조성을 가두고 정형화된 교육에 맞추어 인간성을 상실한 아이들이 성장하여 삶에 의미를 찾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중국의 세계 최고 수준 자살률로 말한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1년 연속 1위다. 중국의 자살률이 얼마 정도 되는지 모르겠지만(중국은 OECD에 가입하지 않았다) 2008년 세계보건기구(WHO)의 집계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률이 106개 국가 중 그린란드, 리투아니아에 이어 3위라고 하니, 역시 이 부분에서도 중국보다 우리나라의 사례가 더 정확히 들어맞는다고 봐야 한다.

 「누구를 위하여 공부하는가」​책은 에르빈 바겐호퍼 감독의 다큐영화 <알파벳>을 기본 토대로 만들어진 책인데, 만약 그 다큐팀이 국가의 인지도를 배제하고 '의미 없는 공부'를 하는 정확한 사례를 찾으려 했다면 대한민국만큼 어울리는 나라는 없다. 중국은 피사 테스트(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 이제 막 발을 들여 놓은 태동 단계에 있고 우리나라는 이미 매년 상위권을 유지하는 포화 상태일 뿐이다. '누구를 위하여 공부하는지' 에 대해 가장 많은 고민을 해야 되는 나라는 바로 우리나라의 우리들이다.


  "중국은 학생들이 어려운 숙제와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면에서 세계에서 둘재가라면 서러운 나라예요. 중국 정부, 부모, 교사, 교장, 모든 사회 계층이 이런 상태를 고집스럽게 비판하고 있어요. 모두가 알다시피 이런 교육은 아동과 청소년의 건강하고 정신적인 발달에 해가 될 뿐 아니라, 창조성과 상상력을 죽이는 교육이에요. 이런 교육은 학생들을 호기심과 연구 충동, 창조성을 가진 인간이 아닌 단지 시험기계로 만들 뿐이지요."

P. 38 

 

 책의 주인공은 '안토닌'이라는 이제 막 기기 시작하는 아이다. 안토닌은 남들과 다르게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고 유치원은 물론 학교도 다니지 않은 채 성장한다. 그의 아버지인 안드레 슈테른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성장했다. 원서의 문체가 원래 그런건지 번역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의 가독성은 그다지 좋지 않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이 너무 부자연스럽고, 이 맞춤법이 맞나? 하는 의문도 곳곳에서 생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는 아주 집중적이고 압축적인 방식으로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들이 주도되는데, 이런 행위의 결과는 전혀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라는 지문은 대체 무슨 말인지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곳곳에서 느껴졌던 가독성의 문제에도 책은 원작이라 볼 수 있는 다큐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안토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카메라를 따라 같이 이동하는 기분이 든다.  안토닌의 성장 과정은 보통의 사람들이 우려하는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때 생기리라 생각했던 문제가 얼마나 편협한 생각이며 지금의 교육과 마찬가지로 무척 의미 없는 생각인지를 몸소 증명한다. 다른 아이들이 놀이방에, 학교에 또는 베이비시터와 함께 집에 있으며 정형화된 생각을 주입 받을 때 안토닌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세상을 얼마나 근사하던지!


 우리는 안토닌의 발달 과정에 개입하지 않는다. 우리는 안토닌이 적절히 발달하고 연구하는 단계에 있음을 알고 있고, 그것을 흥미롭게 생각한다.

 자연적인 과정에 개입하여 그의 진로를 바꾸려고 하면, 자연적인 과정은 단절되고 만다. 자연적인 과정을 가속시키려 하면 자연적인 과정은 끝나버린다. 나비를 잡아당긴다고 나비가 빠르게 자라는가. 나비는 오히려 죽고 말 것이다.

P. 71 


 책으로 접했을 때 안토닌 슈테른 부자의 삶은 멋지고 옳다고 느껴지지만 실제로 내가 그런 선택을 하기에는 보통의 용기로는 부족하다. 「누구를 위하여 공부하는가」​외에도 많은 현대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을 보아오며 나중에 내 아이는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 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이제 곧 아이를 가져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지만 정말 아이를 가졌을 때 학교에 보내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교육이 아직 바뀔 수 없다면, 변화의 의식이 아직은 모자르다고 생각되면 바뀌어야 하는 건 내 자신이어야만 한다. 내가 훗날 어떤 선택을 할지 아직 장담할 수 없지만 「누구를 위하여 공부하는가」​는 분명 용기 있는 선택에 한 걸음을 보태준 게 분명하다.

 웹서핑을 하다보면 무분별하게 대한민국을 폄하하는 누리꾼을 종종 보게 된다. 대한민국이 우리의 모국임에도, 마치 자신은 본인이 욕하는 그 어두운 부분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가장 살기 안 좋은 최악의 국가처럼 보인다.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이야기를 퍼트리는 데다가 밝은 곳은 일절 언급하지 않고 어두운 곳을 과대포장하여 욕 하는 이들을 보면 기분이 나빠지고는 한다. 교육도 사실 그런 분야 중 하나다. 나도 분명 우리나라 교육의 좋은 부분 보다는 안 좋은 부분을 바라보고 있다. 「누구를 위하여 공부하는가」​가 좋은 책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들은 지금의 교육을 과도하게 비판하거나 암울한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희망찬 새로운 교육 방식을 제시하는 것 뿐이다. 


  "데스밸리는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곳입니다. 데스밸리에는 식물이 거의 자라지 않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04년 겨울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데스밸리에 비가 내린 것입니다. 177mm도 넘게 말이에요. 그리고 2005년 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데스밸리 전체가 봄꽃으로 덮인 것이죠. 이것은 데스밸리가 죽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데스밸리는 잠들어 있었습니다. 표면 바로 뒤에 성장의 씨앗들이 싹틀 수 있는 조건들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나는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올바른 조건을 만들어 주고,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면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P.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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